# 53
53.
이진구는 온초방에 누워 있은 지 열흘째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가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차마 눈을 뜨고 사람들을 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중간중간 간호하는 이들이 미음을 떠먹여 주었지만 그때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척했다. 감질맛 나게 목으로 넘어가는 미음을 후닥닥 먹어치우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수치심이었다.
그로선 동굴 입구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그 경악에 찬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그 일은 뼈가 조각나는 고통보다도, 창자가 빠져나오는 고통보다도 더욱 진한 아픔이었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그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해가 저문 다음이었다.
“끄응.”
윗몸을 일으키자 이곳저곳이 쑤셔와 저절로 신음성이 터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세를 살피러 의원 온초가 들어왔다.
기실 온초는 혼절 상태에서 벗어났음을 낮 시간에 간파한 상태였다. 뛰어난 의원으로서 호흡과 눈썹의 움직임만 보고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환자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모르는 척했으며 지금도 고의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고서 기뻐했다.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대단한 정신력과 체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몸을 움직이기엔 기력이 부족하니 좀 더 누워 계시도록 하십시오.”
“네…….”
이진구는 수치심으로 인해 눈도 마주치지 못했고 간신히 기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분명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을 때 비참한 모습을 이 의원도 보았을 것이다. 이진구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가부좌를 틀고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대화하기가 쑥스러운 데다가 몸 상태도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헉∼ 이게…….’
단전을 살피며 내기(內氣)를 움직이려 했던 이진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찌 된 일인지 단전은 텅 비어 있는 듯 조금의 내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설마…….’
당황한 마음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연신 힘을 기울여 내기(內氣)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처음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아무런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즉, 이 상태는 내공이 모조리 소실되었음을 의미했다. 얼마나 부단히 노력해서 쌓은 내공이었던가.
“내, 내 몸에 어찌 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겁니까?”
초조함이 가득 서린 질문에 의원 온초는 이미 이런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이곳으로 오실 때 몸 상태는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최악이었답니다. 기는 몸 안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쳤고, 폐와 위도 많이 손상된 상태였지요. 게다가 때독과 똥독에 몸이 이상 반응을 일으켰고 거기에 심리적인 충격까지 더해져 어느 것 하나 정상인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곳으로 옮겨진 후 몸이 회복돼 가면서 반대로 내공은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실제로 경락의 여러 곳이 막히고 허물어져 오히려 몸을 보호해야 할 내기가 몸을 손상시키는 증상이 나타났었답니다. 하지만 다행히 내기가 소실되면서 몸도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지요.”
실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로선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이럴 순 없었다. 몸이 회복된들 무엇 하겠는가. 모든 내공을 잃어버렸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다.
“어,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소이까?”
이진구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온초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회복이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는 절대 내공을 익혀선 안 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경락의 여러 부분이 손상되었기에 자칫 내공을 연마하게 될 시 그로 인해 더욱 곤란한 지경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저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시면 여생은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인(武人)에게 있어서 무공의 소실은 사형 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이진구처럼 남을 업신여기고 약자를 자신의 무공으로 억눌렀던 사람에게는 더 더욱 그러했다. 이제 그는 보통 사람이 돼버리고 만 것이니 앞으론 하다못해 동네 건달에게조차 얻어맞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의 머리로 그동안 시비에 얽혀 괴롭히고 상케 했던 이들의 얼굴이 빠르게 지나갔고 그들을 처참하게 짓밟았을 때 그들이 남긴 말들이 귓가를 울렸다.
“언젠가 네놈에게 반드시 복수하고 말겠다.”
“내게 잘못이 있다면 단지 힘이 없음이겠지.”
“이진구, 이 간악한 놈아. 네가 그러고도 천벌을 면할 성싶으냐.”
그는 고통스러운 듯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는 도리질 쳤다.
“으아악… 그만… 그만…….”
의원 온초는 불안한 마음이 몸을 망치는 것을 잘 알기에 얼른 침을 꺼내 이진구의 수혈을 찍었다. 목 언저리 수혈에 침이 꽂히자 이진구는 허물어지듯이 침상으로 쓰러졌다.
“음… 차라리 처음부터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이렇게 괴롭지도 않을 것을… 쯧쯧. 어쨌든 정신이 들었으니 내일쯤엔 개방에 연락을 취해야겠구나.”
온초는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평생 환자를 돌보며 살아온 그로선 왜 굳이 무공을 연마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3장 선물 공세
온초의 연락을 받고 묵백을 비롯한 개방인들은 다시 병문안을 왔다. 그들은 지난번처럼 묵백분타주와 지타주, 그리고 당주들이었다. 이진구는 병실로 들어서는 분타주 묵백과 지타주 오선교를 보자 수치심과 함께 부글부글 울화가 치밀었다.
‘네놈들이 만약 구지경외자를 개방의 형제로 받아들이지만 않았어도 내 이런 지경에 처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죽일 놈들 같으니.’
그는 분노로 들끓었지만 마음속에 품은 것을 있는 그대로 다 표출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둘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하지만 아직은 힘없는 병자일 뿐인 것이다. 그렇듯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진구를 향해 묵백이 물었다.
“온 의원께 무공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마음은 아프겠지만 너무 낙담하지 말거라. 그래, 몸은 좀 어떤 것 같나?”
‘낙담하지 말라고? 너 같으면 내공을 다 잃고도 그런 말이 나오겠느냐.’
마음에서 울리는 소리와는 달리 이진구는 힘없이 대꾸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묵백이 이진구의 어깨를 토닥였다.
“고난이 다하면 좋은 일이 있다 하지 않았느냐. 비록 내공은 없어도 개방에는 네가 할 일이 많이 있으니 뒷일은 염려하지 말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희망을 저버려선 안 돼.”
묵백의 말에 이어 다른 이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힘을 내게.”
“모든 게 잘될 겁니다. 지타주님.”
“그럼요. 지타주님은 의지가 남다른 데가 있잖습니까.”
“우리도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겠습니다.”
오선교 지타주를 비롯해 당주들이 힘을 북돋는 말을 했지만 지금의 이진구의 마음 상태에선 도리어 조롱하는 말로 의역되어 돌아왔다.
-너는 이제 끝이야. 인마.
-넌 그 처참한 지경에서도 살아났으니 앞으로 뭐든 못 먹고 살겠어! 킬킬킬.
-생활이 어려우면 언제든지 찾아와. 도와줄 테니까 말이야. 밥 한 끼 못 주겠느냐.
-멍청한 놈! 늘 해코지만 하더니 이젠 네놈이 당했구나.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듣는 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나게 마련인 법.
이진구는 하마터면 서러움에 휩싸여 울컥하고 눈물을 쏟을 뻔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더욱 추해질 것 같아 이를 악물고 간신히 참아냈다.
묵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소문이 하도 얼토당토하지 않아 영문을 알 수가 없구나. 어떻게 하다가 동굴에 갇히게 된 거지?”
이진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먼저 구지경외자를 손봐주는 것이 순서라고 할 수 있겠지. 그놈이 개방에 온 것은 분명 계획적이었을 것이다. 절정의 무공을 가지고서 왜 개잡이나 거지 흉내를 내는지 밝혀야만 해.’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동굴에 갇히게 된 것은 순전히 구지경외자 때문입니다. 그는 사실 대단한 고수였습니다. 전 하마터면 그놈의 마수에 빠져 죽을 뻔했고 피하려다 그만 변을 당하고 만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진구는 그날 소하산에서 일어났던 일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몰래 표영을 죽이고자 양아치들을 동원했던 일과 그 다음 소하산으로 유인해서 죽이려 했다는 말은 쏙 빼놓았다.
그는 오히려 표영이 자기를 따로 보자고 했는데 엉겁결에 갔다가 공격을 당했고 너무 엄청난 고수라 당해내지 못해 도망치다 동굴에서 변을 당했다고 말했다. 나름대로는 거의 완벽에 가깝게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구지경외자를 조사해야…….”
한참 장황하게 말하던 이진구는 어색한 분위기가 느껴지자 말을 멈추고 묵백 등을 바라보았다. 묵백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은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었는데 개중엔 천장을 쳐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는 이도 있었다.
‘쯧쯧… 그래, 이해해야겠지. 정신적인 충격이 얼마나 컸겠어. 누구나 그런 상황이 되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둘러대는 법이지.’
‘이진구를 찾을 때 개방인들만 갔어야 했는데 무림인들에게 그런 꼴을 보였으니 답답하기도 할 거야. 그렇다고 이젠 환상까지 본다면 문젠데…….’
‘아예 소설을 써라, 소설을……. 이놈이 상상력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군.’
‘그런데 왜 하필 구지경외자를 끌어들이는 걸까. 꿈과 현실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걸 보니 완전히 돌아버린 게로군. 쯧쯧… 불쌍한 사람.’
개방인들 뿐만 아니라 그 옆에 있던 의원 온초조차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도 표영을 잘 아는 터였다. 어딜 봐서 무공을 익혔다는 것인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의원이라면 무공을 익힌 흔적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더욱이 온초 정도 되는 의원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눈이 정확하다. 그런 그도 표영이 무공을 익혔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정신 계열의 치료로 들어가야겠는걸.’
이진구는 모두의 표정에서 전혀 믿지 않음과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는 걸 보자 그릇 깨지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겁니까? 그 자식은 정말 대단한 고수란 말입니다. 불순한 목적으로 개방에 잠입한 게 틀림없다니까요. 당장 그놈을 잡아들여야 합니다.”
분타주 묵백은 쓴웃음을 머금고 이진구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너의 뜻은 충분히 알겠다. 휴∼ 어쩌다……. 아직은 더 휴식이 필요할 것 같구나. 좀 더 안정을 취하도록 해라.”
병실을 나온 묵백은 온초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작별을 고했다.
“힘을 다하시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조금 더 관심을 가져 주셔야겠습니다.”
“저도 정신적 충격이 저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정성을 더 기울여 보겠습니다.”
온초까지 그에 동의하자 이진구는 눈이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묵백은 다시 한 번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병실 복도를 걸었다.
이진구는 멍하니 있다가 썰물 빠지듯이 나간 빈자리를 바라보자 울컥하고 화가 치밀었다.
“야 새끼들아, 그냥 가면 어떡해. 거기 서지 못해. 난 미친 게 아니라고∼. 야∼.”
감히 지타주로서 분타주에게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묵백이나 모두는 그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 고개만 도리질하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만일 이진구가 정상이었다면 다시 병실로 쫓아와 주먹을 날려주었을 것이다. 욕설은 그가 더욱 정상이 아님을 증거하는 것을 밝혀주는 것일 뿐이었다.
이진구는 병실 문이 닫히고 욕설을 퍼부었음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치 혼자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벽에 쿵쿵 찧어대며 절규했다.
“난 미친 게 아니라니까. 으아악∼”
온초는 저러다 머리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침을 꺼내 그의 수혈을 짚었다.
‘한 시진 후부터 신경을 안정시키는 탕약을 달여야겠구나.’
이제 본격적인 정신 치료에 들어가고자 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