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1장 (52/199)

 # 51

51.

걸인각성(乞人覺醒) - 거지의 깨달음 3

내가 곧 개방이다

제1장 전직 살수 상문표

무당파의 도청환 앞.

백발이 성성한 운경 도장은 양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한줄기 바람에 도포 자락이 펄럭이며 너풀거렸다. 그 모습은 도청환의 경관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애지중지하며 마치 친아들처럼 키워온 제자가 검기(劍氣)를 사방으로 뿌리며 태극검법 수련에 한참이었다.

검이 공간을 그을 때마다 검기가 봉황이 승천하듯 곡선을 그리며 모아졌다 틀어졌다. 그런가 하면 일순간 사방으로 뻗어 나가다 안으로 오므라들고 다시 둥그런 원이 그려지다가 밖으로 퍼져 나가는 모양새가 현란하기 짝이 없었다.

검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운경 도장은 오른손을 들어 길게 늘어진 수염을 쓰다듬고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이제까지 본 검법 중 오늘같이 형편없는 검법은 처음 보는구나. 검 끝이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무당파에서 검이란 쇠로 만들어진 물체를 말함이 아니었다. 검의 실체는 검을 다루는 시전자인 것이다.

검술가는 마음과 몸과 검이 하나이니 검이 흔들림은 곧 마음이 흔들림을 의미했다.

‘마음이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음이지. 부모를 뵙고 와서는 더욱 마음을 다해 수련할 줄 알았건만 오히려 집에 다녀오지 않은 만 못하게 되었구나. 음……. 혹시 숙이의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운경은 제자 표숙의 동작을 살피다가 더 이상 이 상태로의 수련은 무의미하다 느꼈다. 마음이 바로서지 못하면 그저 시간 낭비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가만히 제자를 불렀다.

“숙아, 됐다. 그만 하고 이리로 오렴.”

한참 태극의 묘를 따라 운용하며 검법에 열중이던 표숙은 사부의 음성을 듣고 검을 회전시키며 거두어들였다.

표숙은 바로 표영의 형으로 일찍이 무당파에 보내져 무당의 후계 중 가장 탁월한 실력을 갖춘 검사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그의 외모는 날카로운 검미에 매의 눈을 하고 있었으며 두껍지도 가늘지도 않은 입술에 이목구비가 어느 것 하나 비뚤어짐이 없는 준수함을 갖추고 있었다.

표영과 비슷한 외모이긴 했지만 표영의 얼굴이 전체적으로 부드러우면서 상대에게 따뜻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이라면, 표숙의 외모는 표영의 부드러운 얼굴에 명확한 윤곽을 더해 날카로운 기세가 묻어나 훨씬 남자답고 더욱 준수하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검을 거둔 표숙의 마음은 무거웠다.

‘사부님도 보셨을 것이다.’

집에 다녀온 후로 검의 움직임이 둔탁하고 산만해진 것을 시전하는 자신도 느낀 만큼 이제껏 가르쳐 왔던 사부도 그것을 느끼고 지적하려 함이 분명하다 여겼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표숙이 송구스러운 낯빛으로 미리 용서를 구하자 운경 도장은 껄껄대고 웃었다.

“껄껄, 미련한 놈 같으니……. 오늘같이 흔들리는 모습은 처음 보는구나. 마음에 근심을 산처럼 쌓아두고 어찌 마음을 비우는 태극검을 연마한다고 하느냐. 분명 네 녀석의 마음엔 집안일로 인한 걱정이 있으렷다.”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알아차릴 만큼 운경 도장은 표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에게 있어 표숙은 제자 이상이었다.

“별일 아닙니다, 사부님. 마음 쓰지 마십시오.”

표숙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집안일을 상기하자 마음이 편치 못해 날카로운 검미가 꿈틀거렸다.

운경 도장은 표숙이 어지간해서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요즘같이 고민한 적은 여태 본 적이 없는 터라 다그치듯 물었다.

“네가 무당산을 내려갈 때는 얼굴에 빛이 나고 활기에 넘쳤었다. 허나 지금은 어찌 된 일인지 수심에 가득 차 있지 않느냐. 네놈은 사부를 외인(外人)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렷다.”

“아닙니다, 사부님. 어찌 제가…….”

황급히 부인하는 말에 운경 도장이 중도에 말을 잘랐다.

“나라의 임금과 스승, 그리고 부모는 하나라 했다. 네가 집에 다녀온 후 부모님의 일로 근심하고 있다면 그건 바로 나의 일인 것이다. 검법과 내공을 연마하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그 모든 것의 기초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법. 사람을 위하지 않는 검법이나 무공이 무슨 소용 있겠으며 마음으로 다스리지 못한 검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 근심하는 바를 내게 말해 보거라. 어떤 응어리라도 마음에 담아두면 결코 수련은 아무 의미가 없음이야.”

표숙은 사부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더 이상 속으로만 삭일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집안일을 사문(師門)에까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이제껏 망설였던 터였다. 하지만 지금 표숙은 무엇보다 사부의 도움이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번에 사부님의 은혜로 이 제자 부모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언제나처럼 반갑게 맞아주셨지만 제자는 두 분의 마음에 슬픔이 가득함을 보았습니다.”

“무슨 일이더냐?”

“어린 동생이 여태 5년여 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고 돌아올 기미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갔기에 소식이 없더란 말이냐?”

운경 도장은 물으면서도 마음 한쪽이 뜨끔했다. 제자를 아끼면서도 이제껏 집안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지도 않은 자신이 민망해진 까닭이었다.

‘이 아이에게 무공을 전수하는 데만 관심을 가졌을 뿐 정녕 그 근본 된 집안을 살피지 못했구나. 어찌 무공만이 사랑하는 마음의 전부겠는가. 이 녀석은 무공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묻고 매달리면서도 개인적인 고민은 물어보지 않는 이상 말하지 않으니…… 그래, 그건 다 나 자신을 합리화시키려는 핑계일 뿐이지. 이 모든 게 다 나의 부덕함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제껏 엄하게 가르쳐 사사로운 데 마음을 쓰지 못하게 했으니…….’

운경 도장이 혹독한 수련만을 내세웠던 스스로를 되돌아볼 때 표숙이 답했다.

“동생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쯤 녹정이라는 개방의 분타주 한 분의 눈에 띄어 개방 제자로 따라나섰습니다. 워낙에 고생 없이 자란데다가 게으르기 그지없어 부모님은 떠나보내 시면서도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녹정이라는 개방 분타주는 특이하게도 5년이 되기 전까지는 결코 집에 돌아올 수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마음은 아팠지만 두 분은 5년이 지나기만을 하루를 천 날[千 日]처럼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제가 한 번씩 집을 다녀올 때면 부모님의 걱정하시는 모습에 직접 찾아보겠다고 말씀드렸지만 부모님께서는 고심하시다가도 고개를 저으시곤 하셨습니다. 그건 동생이 워낙 특이한 경우로 떠난 터라 혹시나 악영향이 있을까 우려하심이었습니다.”

운경 도장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궁금증이 일어 말을 끊었다.

“특이한 경우라니…… 그건 무슨 소리더냐?”

“사실 동생은 태어난 지 1년이 되었을 때 눈빛이 푸르스름하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만성지체의 표식으로 천하에서 가장 게으름을 타고난 체질임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믿기 힘든 일이시겠지만 천의 소공공께서 직접 다녀가셔서 말씀하신데다가 실제로도 발가락 하나 움직이길 싫어했답니다.”

표숙은 그 후에 귀인이 다녀갔고 어떤 과정을 통해 개방 분타주를 따라나서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거참, 희한한 일이로구나. 천의 소공공이 다녀갔다니 틀린 말은 아닐 터. 세상천지에 그런 신체를 타고난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 후엔 어떻게 되었느냐?”

운경 도장은 자못 흥미로움에 휩싸여 재촉했다.

“그 후로 5년이라는 길고 긴 시간이 지나게 되어 저는 이번에 내려가면 동생을 볼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동생을 보진 못했습니다. 부모님의 상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얼굴엔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조금 위안을 삼을 수 있으신 건 예전에 집안에 도움을 주었던 그 귀인께서 작으나마 소식을 알려온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동생이 현재까지 잘 있으니 아무 염려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고 지금은 여러 이유로 돌아올 수 없고 다시 5년이 지난 후에야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떠나시면서 사람을 보내 연락을 취해볼 수는 있을 성싶다는 말만 남기고 홀연히 떠나셨다고 합니다. 저는 부모님께 어떻게든 영이를 찾아보겠노라고 말씀드려 일단 안심은 시켜드렸지만, 지금 저로서 어떻게 동생을 찾아야 할지 몰라 마음만 애태우고 있었습니다.”

운경 도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희한한 일이야. 너의 동생의 몸은 그렇다 쳐도 개방이라면 구파일방의 하나로 그리 앞뒤를 구분 못할 곳이 아니건만 참으로 무심하기 그지없구나. 강호에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지금은 표면적으로나마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다는 말이다.”

표숙은 ‘사부님, 부디 제가 동생을 찾도록 보내주십시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꾹 눌러 참고 우선 사부님의 답변을 기다렸다. 검술이 흐트러진 것을 보셨고 말씀까지 다 드렸으니 어떤 해답이 나올 것이라 여긴 것이다.

“음… 그래, 너는 형으로서, 그리고 맏아들로서 마땅히 도리를 다해 동생을 찾고자 함이렷다. 그래서 내게 시위라도 하듯이 엉터리 검법을 시전하여 하산코자 함인 게냐?”

농담 섞인 말임을 잘 알았지만 표숙은 하늘같은 사부님께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시위라뇨. 사부님, 당치 않으십니다. 전 단지…….”

“껄껄껄껄… 됐다, 이 녀석. 좋다. 내 네놈의 고단수 술책에 넘어가 주기로 하마. 하지만 너를 동생 찾는 데 보내줄 순 없다.”

표숙은 됐구나 싶었는데 뒷말을 듣자 마음이 조급했다. 하지만 운경 도장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널 보내지 않는 대신 내가 아는 사람을 통해 너의 동생을 찾아보도록 하마. 어때, 되겠느냐?”

표숙은 막힌 체증이 뻥 뚫리는 듯했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기뻐했다.

사부는 무당사대고수 중 한 명으로 그 무공이 하늘과 같으니 마침내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무공이 자신과 비견할 바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정말이십니까, 사부님!”

“허허, 녀석… 이제 좀 마음이 놓이느냐?”

표숙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렸다.

“사부님의 높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 녀석, 너는 생각도 깊고 마음 씀씀이도 너그럽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느냐?”

“…….”

표숙이 아무 말이 없자 운경 도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너의 수련에만 힘을 쏟았을 뿐 그동안 너의 집안일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너의 부친 표 장주는 덕이 높아 은연중에 그를 돕는 강호인들이 있을 정도이기에 크게 마음 쓰지 않았던 것이지. 이런 고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너는 사문에 폐를 끼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는지 몰라도 그건 큰 어리석음이다. 너는 내게 있어 소중할 뿐만 아니라 무당파에서도 너의 존재는 소중하다. 네가 곧 무당파이며 너의 검이 곧 무당검이 아니더냐. 그러니 너의 문제는 곧 무당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앞으로는 사소한 것이라도 마음에 묵혀두지 말고 이 사부에게 온전히 고하도록 해라. 그렇게 하지 않을 시엔 나는 네가 나를 사부로 생각지 않는다고 여기고 그땐 나도 더 이상 너를 무당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겠다. 알겠느냐?”

표숙은 ‘네가 곧 무당파이며 너의 검이 곧 무당검이 아니더냐’라는 말을 듣자 마음이 뭉클해졌다. 전체 무당파에서 볼 때 자신은 작은 지체에 불과할 뿐이건만 사부는 이토록 소중하게 여기고 있지 않은가.

“제자 명심하겠습니다.”

“좋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추적술에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이가 있으니 그에게 부탁해 보도록 하겠다. 마음 같아서는 너도 그와 함께 가게하고 싶다만, 현재 무당파에서 행하는 수련 중에 오행검진은 네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만큼 어쩔 수가 없구나. 이해할 수 있겠지?”

“사부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래, 좋다. 그래도 너의 진전이 뛰어나 내년 후반부터는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칠옥삼봉의 모임에도 편하게 다녀오도록 하려무나.”

칠옥삼봉의 회합은 젊은 신진고수들을 칭하는 말로 표숙은 일곱 명의 남자 기재를 뜻하는 칠옥의 첫째인 일옥검수(一玉劍手)라 불렸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표숙은 무당파의 기대주로 무공 수련 강도가 높아지면서 그저 친목을 목적으로 외유를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온통 짙은 흑의에 감싸인 채 상문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어려울 것은 없을 듯합니다.”

상문표는 운경 도장으로부터 표영의 인상착의와 이동 지점을 듣고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다. 운경 도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대답을 듣자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자네만 믿네. 내 어지간해서는 자네를 피곤하게 하고 싶지 않지만 이번만은 부탁함세.”

“하하, 운 도장님의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야 소문이 자자하잖습니까. 저는 처음에 친아들인 줄 알았습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허허, 이 친구도 참…….”

이제 30대 후반의 상문표는 전직 살수였다.

그는 강호에서 활약할 당시 워낙 그 행동이 은밀해 얼굴을 아는 사람도 없었으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단지 별호로만 불려졌다. 또한 어떤 청부 조직에도 속해 있지 않고 독자적으로 청부를 받아 일을 수행하곤 했었기에 더욱 그 행적은 묘연하기만 했다.

그의 별호는 흑조단참(黑鳥斷慘)이라 했다. 별호의 의미는 ‘흑조와 함께하며 무자비하게 목숨을 끊어놓는다’라는 뜻이었다. 강호에서는 까마귀 울음소리가 세 번 들리면 근처 누군가의 목은 떨어질 것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의 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삼 년 전부터 홀연히 강호에서 그 소식이 끊어졌었다. 어떤 이는 그가 청부에 실패해 어디선가 죽었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운경 도장을 만나 고침을 받은 후 마음을 바로잡게 되었음이었다.

그 후 상문표는 일 년에 한두 차례씩 운경 도장에게 인사를 드리러 오곤 했는데 바로 오늘이 그날이었다. 상문표는 운경 도장에게 표영과 관련된 이야기를 더 듣고 담소를 나눈 후에 본격적으로 표영 추적 작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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