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0장 (51/199)

 # 50

50.

동굴 생활 20일째.

텅∼ 텅∼

아련히 들려오는 소리에 이진구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의 입가엔 큰 것들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지만 이제 그런 냄새조차 그에겐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뿐이었다.

‘무슨 소리지?’

이제까지 제대로 된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던 이진구였다. 그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희망이 솟아오름을 느끼고 황급히 기어 동굴 입구로 향했다.

‘이건… 이건…….’

분명 동굴 바깥 입구에서부터 들리는 소리가 분명했다.

‘난 살았어. 난 살았어!’

“여깁니다. 여기예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는 힘겹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저 꿈만 같았다.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버틴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잠시 후, 돌이 툭 하고 하나 떨어지더니 조그마한 구멍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얼마 만에 본 햇빛인지 모른다. 그는 눈이 부셔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너무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눈이 적응되어진 까닭이었다. 이럴 때 빛에 급작스럽게 노출되면 실명하기 딱 좋은 것이다. 이진구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살려주세요. 거기 누굽니까?”

구멍은 어린아이 팔뚝 정도의 크기였고 동굴 안쪽과 바깥쪽까지는 바로 맞대어 있지 않고 어른의 긴 팔 정도의 두께로 이어져 있었다.

“대답 좀 해보시구려, 누구시오.”

다급하게 물은 이진구의 말에 뜻하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어어… 어거거거… 어거거거…….”

‘이런, 벙어리인 게로구나.’

다소 실망은 되었지만 벙어리들은 말을 하지 못할 뿐 들을 수 있는 이들이 많기에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 이 벙어리(?)의 출연은 이진구로서는 실망을 해야 할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벙어리(?)의 정체가 바로 표영이었기 때문이다.

표영은 오랜 시간 동굴을 살피며 나름대로 계산을 했다. 어느 정도가 되어야만 가장 위급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표영은 때를 맞춰 동굴에 작은 구멍을 내기로 하고 만두를 준비해 왔다. 그 만두는 표영이 직접 만든 것으로 정성이 한껏 담긴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간 재료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넣어본 적이 없는 특이한 것이었다. 재료의 이름은 바로 표영의 때였던 것이다. 표영은 때 만두 다섯 개를 죽봉에 차례로 꽂아 작은 구멍 안으로 들이밀었다.

“어거거… 어거거…….”

표영이 벙어리 흉내를 내며 때 만두를 들이미는 것도 모른 채 안에 있던 이진구는 냉큼 만두를 챙겼다. 구수한 냄새가 얼마나 향긋한지 몰랐다.

“고맙네, 고마워.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네.”

“어거거… 어거거…….”

표영은 대충 대답(?)한 후에 준비한 진흙으로 뚫어놓은 구멍을 막아버렸다. 이렇게 해야 만두 속에 든 재료가 무엇인지 모르고 맛있게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진구를 배려하는 마음이 극에 달한 표영이었다. 동굴 안의 이진구는 갑자기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들자 덜컥 다시 두려움이 일었다.

“이봐, 왜 구멍을 막은 거야. 이봐, 이보라구!”

허나 아무리 외쳐 봐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음, 그래도 먹을 것을 건네주는 걸 보면 사람들을 모아 다시 올 게 분명해.”

그는 삶의 대한 희망에 가득 차 만두를 입에 넣었다. 아까 전만 해도 큰 것(?)을 먹어치웠던 그의 먹성이었다. 우그적 씹으며 만두피가 입 안에서 터지고 표영의 때가 입 안을 가득 매웠다.

‘좀 매캐하구나. 하하, 아니야. 내 입맛이 변했겠지. 원래 맛있는 것이었을 거야.’

그는 애써 좋게 생각하며 남은 만두를 모두 처치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포만감으로 인해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일 식경(30분)이 지나며 배에서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다.

“으윽… 아악… 어떻게 된 거야.”

그는 구토와 함께 참을 수 없는 배설의 욕구를 느꼈고 끝내 바지춤을 내리고 주르륵주르륵 일을 보았다. 더불어 입으로는 먹은 만두들을 토해냈다.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며 그는 죽을 맛이었다.

벙어리로 위장한 표영의 식량 공급은 계속되었다. 주식(主食)은 여전히 정성 들여 만든 때 만두였고 음료수(陰料水)로는 주로 개 오줌이나 소 오줌 등이 주를 이루었다. 매일매일 음식을 얼른 집어넣고 구멍을 막아버렸기에 이진구는 예전 혼자 있을 때보다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

“야 이 벙어리자식아! 어서 가서 사람을 데려오란 말이야. 그리고 왜 자꾸 오줌 물만 퍼오는 거야. 시냇물이라도 가져오란 말이다. 이 바보 멍청아!”

이진구로서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어 끝내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욕을 퍼부은 다음 날은 표영이 아예 가질 않았기에 다음부터 이진구는 욕도 할 수 없게 돼버렸다.

“미안미안, 그렇다고 사람이 삐치면 곤란하지. 근데 이보게. 만두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안에 뭘 넣었나? 먹기만 하면 설사를 하니 이거 몸이 배겨나질 못하겠단 말일세.”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여전히 매한가지였다.

“어거거… 어거거…….”

‘저 새끼는 저 소리밖에 못하나. 썅!’

때 만두를 주식으로 먹게 된 이진구의 몸은 더욱 피폐해졌다. 먹는 것도 변변치 않은데 거기에다 설사를 해대니 몸이 배겨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희한한 것은 살이 빠지는 게

아니라 부풀어 오른다는 점이었다. 그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실은 때를 너무 많이 먹어 부작용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렇게 이진구는 동굴에 갇힌 지 30일이 지나고 있었다.

이진구가 행방불명된 지 한 달이 되었지만 개방에서는 그를 찾으려는 노력조차 없었다. 원래 성격이 괴팍하고 유별났던지라 그를 좋아하는 무리는 거의 없었다. 단지 그의 뒷배경이 워낙 막강한 데다가 한번 찍히면 크게 곤욕을 치르는지라 그 앞에서만 비위를 맞춰줄 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남의 간섭을 받기 싫어했고 이번에 지타주로 발령이 난 상태였기에 보이지 않는 것도 발령지로 떠난 것이라 생각한 터였다.

개방의 형제들은 오히려 그런 그를 탓하는 마음까지 품었다.

‘싸가지없는 놈,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가다니.’

개방인들이 이렇게 생각할 때 표영은 이젠 이진구를 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생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 버릇은 고쳐졌을 터였다. 하지만 직접 구해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개방에 사실 그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표영은 해결책으로 ‘발없는 말’을 선택했다. 표영은 이 일을 위해 일각두와 양조포를 불러 은밀히 말했다.

“오랜만에 부탁 한 가지 들어주어야겠다. 할 수 있겠지?”

누구 말이라고 거부하겠는가. 지금은 양아치 전선에서 은퇴하고 생활 전선에서 열심히 일하는 둘은 오랜만에 재밌는 일이 있을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말을 받았다.

“말씀만 하십시오.”

“이진구 지타주에 대한 이야기다.”

표영은 그가 지금 동굴에 갇혀 있으며 자신은 특별한 사정으로 그를 직접 구하기 힘드니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너희들이 소문을 내주어야겠다. 대충 여러 가지 소문을 내되 반드시 소하산 중턱 위쯤의 어느 동굴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하하하, 그런 것이라면 식은 죽 먹기 아니겠습니까?”

일각두와 양조포는 자신들만 믿으라며 가슴을 두드렸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개방의 고수 한 명이 실종되었다더군.’

‘개방의 지타주라고 하지, 아마.’

‘나이도 별로 많지 않다고 하던데 참 불쌍한 사람이야.’

‘소하산 중턱의 어느 동굴에 갇혀 있다고도 하던데…….’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지도 모른 채 소문은 계속 덩치가 커져 갔다. 원래 소문이란 게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이 나중에 가서는 감당 못할 만큼 커지기 마련이다. 급기야 소문은 이렇게 변질되고 말았다.

‘그는 절세비급을 얻어 소하산 동굴에서 수련하고 있다더군.’

‘천근산삼 세 뿌리도 함께 얻었다고 하는 것 같지, 아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소문은 당연히 개방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그저 막연하게 바라볼 수만은 없게 되어 버리고만 것이다. 이 소문은 여러 무림인들의 귀도 솔깃하게 만들었다.

‘절세비급!’

‘천년산삼 세 뿌리!’

개방에서는 이진구가 발령지에 도착했는지를 확인하기에 이르렀고, 도착한 적이 없음을 연락받자 본격적으로 수색에 들어갔다. 거기에 많은 무림인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무림인들에게 있어 비급과 산삼은 어떤 보물보다도 값진 것이 아니던가.

수색의 중심엔 구지경외자 표영이 있었다. 묵백이 개들을 통해 찾아보자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500여 마리의 개들과 개방인들, 그리고 수많은 무림인들이 소하산을 뒤졌다. 개들은 하루를 넘기지 않고 이진구의 흔적을 찾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표영이 어느덧 동굴 앞에 이르러 묵백에게 말했다.

“분타주님, 이곳인 것 같습니다. 개들이 하나같이 이곳이라고 하는데요.”

“음… 그럴 만하군.”

묵백이 보기에도 돌 무더기가 이곳저곳 놓여져 있는 것이 얼마 전에 무너져 내린 것이 분명한 듯했다.

“이곳은 원래 어떤 곳이었나?”

묵백의 질문에 이곳 토박이인 지타주 오선교가 공손히 답했다.

“이곳엔 동굴이 있었습니다. 어쩌하여 이렇게 무너지게 되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좋다. 자. 모두 힘을 모아 돌을 치우도록 하자.”

개방의 인원도 적지 않았지만 여러 무림인들도 가세한지라 돌을 치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곁다리로 따라온 무림인들은 돌을 함께 치워야만 혹시 떡고물이라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굉장한 열심을 보였다.

‘과연 이곳에 지타주가 있을까.’

‘그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동굴 안쪽은 어떤 신비한 장소와 통해 있는 것은 아닐까.’

‘절세비급을 익혔다면 빼앗기 힘들지도 모르겠군.’

‘산삼 세 뿌리 중 하나 정도는 남아 있으면 좋으련만.’

온갖 망상 속에서도 끝내 큰 바위까지 다 들어내고야 말았다. 확연히 드러난 동굴 안, 그 안의 광경을 바라본 개방인들과 여러 무림인들은 입을 귀까지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경악 그 자체였다.

“헉!”

“뭐, 뭐지!”

“사, 사람이 맞나?”

퉁퉁 부어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대자로 누워 있는데 온몸에 똥칠을 하고 있었고 그 주변엔 쥐 꼬리들과 먹다 남은 박쥐 껍질들, 그리고 신발 쪼가리 등이 널려 있었다. 여기 모인 모두는 세상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보았지만 이렇게 추접한 광경을 보긴 처음이었다. 더럽다고 생각했던 구지경외자는 되려 깨끗한 편이었다. 기연이나 절세비급, 산삼 따위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추접스러움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개방인들이었다.

“이진구 지타주가 맞는지 확인해 보아라.”

묵백의 지시에 개방 제자 둘이 달려갔다. 보니 얼굴이 부어 있고 온통 추접스러움으로 가득했지만 이진구가 확실했다.

“맞습니다, 분타주님.”

묵백은 그 말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허허허… 그것 참.”

다른 개방 제자들도 누워 있는 사람이 이진구 지타주라는 말을 듣고 모두 하나같이 기가 막혀했다. 그동안 혼자 얼마나 깔끔을 떨고 다녔던가. 조금만 더러워도 혐오스러운 눈짓을 보내곤 했던 그었다.

“지타주님! 일어나십시오. 우리가 왔습니다.”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힘없이 잠들어 있던 이진구가 부스스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하다가 서서히 초점이 잡히며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이게 꿈인가 하고 눈을 몇 번이고 끔벅이다가 다시 눈을 뜨고 꿈이 아님을 알곤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아나꾸너… 사라쩌…….”

발음도 안 되는 목소리로 그는 기쁨을 발했다. 하지만 곧 그는 동굴 앞쪽에 자리한 무리들을 보게 되었다. 낯익은 얼굴들도 보였고 처음 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느린 동작으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에 범벅이 된 똥들과 박쥐 뼈다귀, 쥐 꼬리, 그리고 자신의 현재 모습.

다시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보았다. 심각하게 쳐다보는 자가 있는가 하면 실실거리며 웃는 자도 있었고. 또 한쪽에서 구토를 하는 자도 보였다. 그는 손에 들린 만두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베어먹고 남은 절반의 만두가 시키먼 속피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몰려들었다. 이진구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안 돼∼ 으어억∼!!”

* 작가의 말

마천루 스토리 2 - 마천루 독극물 테러 사건

세상이 온통 테러 사건으로 인해 떠들썩하다. 뉴스를 통해 들려오는 앵커의 긴박함을 알리는 목소리는 이제 당연히 들어야 할 뉴스의 한 부분이 되고 있다. 뉴욕의 고층 빌딩 숲을 일컬어 마천루라 하는데 같은 인간으로서, 또 동일한 이름을 지닌 단체로서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인간은 왜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의문을 품어본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원시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전쟁을 멈춘 역사가 없는 듯하다. 단지 그 전쟁의 방식이 돌도끼에서 총, 미사일 등으로 바뀌었을 뿐 그 마음에 품고 있는 호전성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역시 세상은 비정한 강호였단 말인가. 인간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다. 누구도 함부로 빼앗을 권리 같은 것은 없다. 자신의 생명이 고귀한 만큼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한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난 과거 무협을 읽으면서 늘 의문점을 가져온 것이 있었다. 왜 주인공은 고생 끝에 무공을 익혀 저리도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두목급들만 죽여도 될, 혹은 두목급들만 손을 봐줄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무래기들까지 모조리 죽이는 상황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모든 것이 원수를 갚는다든지 정의를 지킨다라는 명목 아래 합리화를 꾀하지만 아무리 그래 봤자 그저 변명일 뿐이다.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가족과 자녀들은 주인공을 원수로 생각할 것이며 어리석은 한 인간의 무모함으로밖에는 생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협의 주인공이 지혜롭고 현명하다고 표현되지만 그런 점에서 도저히 납득할래야 할 수 없다(아무리 환상을 다룬 글들이라고 해도 여지껏 내가 보아온 책들은 한 질이 다 끝나갈 때쯤이면 사망자가 거의 만 명에서 많게는 수천만 명에 이르도록 죽어가는 것을 보아왔다. 파리 목숨도 이보다는 값지지 않을까? 되려 무협 소설에서는 파리들이 훨씬 생존률이 높다. 여하튼 등장했다 하면 어딘가 부러지는 것은 예사고 어지간하면 대부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이 여린 편이어서 - 사무실 사람들은 안 믿을 것이다. 끙∼ - 누굴 죽여야 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난 대신 글 쓰다가 방해하는 모기들은 무지 잘 죽인다). 그래서 내가 만약 무협을 쓴다면 그런 어리석음은 범하고 싶지 않았다. 진정한 주인공이라면 사람을 가려서 죽일 수 있어야 할 것이며 죽음을 선고하기 이전에 회개의 기본적인 과정을 거쳐야만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악한 두목 밑에서 정신없이 따라다닌 똘마니들은 혼을 내줄지언정 죽여서는 안 된다. 난 나의 처음 글인『만선문의 후예』를 통해 최대한 사람이 죽지 않고 돌이키는 쪽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만선문의 후예에서는 사망자 수가 대략 10명 미만을 이루었다. 더 줄일 수도 있었지만 스토리 전개상 어쩔 수 없이 죽어간 엑스트라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이자리를 빌어 표하는 바이다.

물론 핑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남궁무결(과일색마)를 호위하러 가다가 흑살단주에게 죽임을 당하는 상황인데 흑살단주도 냉엄하기 이를 데 없어 결국 호위무사들까지 도매금으로 죽어간 것이다. 더불어 과일색마에 대한 문제를 마무리하기 위함과 흑살단주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근처에 있는 무사들까지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걸인각성』에서도 되도록 죽어가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모든 것이 작가의 손에 달려 있는지라 캐스팅되어 출연하는 모든 인물들은 작가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늘 행동과 말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다 보니 주제가 옆으로 샜는데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미국에서 연일 벌어지는 독극물 테러 사건이 아니라 마천루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이다. 탄저균이다, 천연두다, 세상이 어지럽지만 그보다 먼저 생화학 테러는 마천루 사무실에서 벌어졌다. 이 사건은 뉴스에 보도가 되지 않아 세인들이 전혀 모르고 있는 바이다.

정부에서는 이 일이 알려질 경우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클 것을 우려해 보도를 하지 말기로 걸정한 듯하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무상검』의 작가 일묘님께서 우유를 사 오셨다. 이분은 덩치와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콘플레이크를 즐겨 드시는데(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매치가 안 된다. 생각해 보라 사시미 옆에 차고 조폭 모드로 콘플레이크를 먹는 장면을… )거기에 우유를 버무려 드신다. 하지만 그것마저 게을러져 큰 우유 팩에 담긴 우유는 유유히 날짜를 지나고 있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 사무실에 있는 뭇 작가들은 한마디씩 하기에 이르렀다.

“우유 날짜가 지난 것 같으니 일묘님 이제 버리시죠.”

“저러다 누가 먹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요.”

이러한 작가들의 외침에 일묘님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치울게요∼”

물론 이곳에서 그 말을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당연히 우유는 냉장고 안에서 유통 기한을 훨씬 넘긴 채 썩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동안 집에서 글을 쓰신다며 자리를 비우섰던 『표류공주』의 작가 최후식 선생님께서 사무실에 나오신 것이다. 시간이 지나 약간 출출함을 느낀 최후식님은 무의식적으로 냉장고를 열었고 든든히 채워져 있는 우유를 발견하게 된다. 얼마나 기뻤겠는가. 자신을 위해 먹어달라고 애원하듯 버티고 선 우유를 보고서 말이다. 일이 묘하게 되려고 하는지 마침 콘플레이크가 남아 있었던 관계로 최후식님을 통해 썩은 우유는 콘플레이크와 상봉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때쯤 뭇 작가들은 우유에 대해서는 거의 잊은 상태였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당연히 우유가 버려졌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우유를 남겨두었겠나라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인간으로서 최후의 양심을 우리는 믿었던 것이다. 드디어 최후식님은 우유를 들이키게 되었고 뿌듯한 미소까지 남기신 상태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대략 한 시간가량, 최후식님이 급하게 화장지를 찾고서 화장실로 경공을 발휘해 날아가셨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우린 그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화장실을 다녀온 최후식님의 말이 걸작이었다.

“변이 어찌나 독한지 내가 봐놓고도 너무하다 싶어.”

이미 극독에 중독된 것도 모른 채 최후식님과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그러길 두어 차례 화장실에 신법을 날려 다녀오신 후에 비로소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우유=독극물!!

그때부터 시작된 집단 구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이건 살인 미수다.”

“생화학 무기를 제조하는 것은 징역 50년 감이다.”

“생차학 무기 기술자로 아랍이나 북한으로 파견 나가야 한다.”

기타 등등 수많은 갈굼이 일묘님에게 미사일처럼 쏘아졌고 그 와중에도 일묘님은 꿋꿋이 버터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을 우리는 보고 말았으니 바로 최후식님의 내공이었다. 이미 강호의 초절정고수인 줄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경지가 노화순청에 이른 건지 변 세 방으로 독을 다 몰아내 버린 것이다. 사무실의 작가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고 모두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진정 천하제일 고수십니다.”

살인을 기도한(?) 일묘님은 이젠 더 이상 자신의 독공으로도 없앨 수 없음을 알았는지 사죄하는 뜻으로 밥 한끼를 샀다. 하지만 모든 작가들의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모두의 핸드폰 단축 다이얼 1번(대개 1번은 집을 설정해 놓기 마련이다)번호를 다른 데로 옮기고 1번을 119로 설정해 놓기에 이르렀다. 연제 극독에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119만이 유일한 피난처요 생명의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행히 그 뒤로 다른 테러가 발생하고 있지 않지만 어느 누구도 긴장을 풀지 않고 있다. 아마도 내 글이 늦어지는 이유도 거기에 따른 스트레스가 아닌가 싶다.

독극물 테러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정리를 하고 지난번 마천루 스토리 1로 인해 마천루 작가들로부터 극심한 갈굼을 당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솔직히 스토리 1이 나간 후 후기를 쓰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도 했었다. 하지만 독자 메일 중에서 본편보다 후기가 더 재밌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비록 스토리 2가 나간 후에 더한 폭행을 당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써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마천루 스토리를 중단하려 할 정도였다는 것을 통해 명철한 두뇌의 소유자인 독자님들은 대충이나마 본 작가의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 정도에 대해서는 아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한마디로 ‘궁극의 고난!!’이라고밖에는… (그건 직접 동호회 회원 자격으로 방문하신 독객님과 시안님, 철갑님, 그리고 청하님도 보았던 일이다) 갈굼의 주된 이유는 말도 안 되게 과장되이 썼다는 이유였다. 본인 또한 그런 외침에 솔직히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10%의 내용을 100%로 확대 재생산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그들은 알고 있을까.

이유야 어쨌든 과장은 과장이므로 진실한 마음으로 시인하는 바이며 반성하는 바이다.

(이후 3권에서도 마천루 스토리가 있을 예정입니다. 하지만 마천루 테러의 소지가 늘 존재하는 바 독자 분들의 기원을 바라는 바입니다.)

추가 1)

얼마 전 새로운 멤버가 마천루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새로울 것은 없군요. 이미 오래전부터 들락거리며 예정되어 있던 터였으니까요. 그는 바로『황제의 검』의 작가 임무성님입니다. 넉넉함을 물씬 풍기는 인상에 예리한 성찰이 돋보이는 말투가 인상적인 분이랍니다. 모두 축하해 주시길(칼 맞지 않으려고 노력 중인 것이 보이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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