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3장 (34/199)

 # 33

33.

“잘 들어라. 현재 방주 노위군은 타구봉법을 모르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가짜일 수밖에. 사실 이건 내가 해야 할일이지만 난 너를 제자임과 동시에 아들과 같이 여기고 있다. 아버지가 못다 이룬 일을 그 아들이 받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 영아, 너는 그것을 충분히 해낼 만한 자격과 힘이 있다. 지금 내 앞에서 대답을 해라. 좋은 방주가 되겠다고.”

표영이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자 엽지혼의 얼굴이 참담히 일그러지며 어디서 힘이 솟아났는지 크게 고함쳤다.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게 만들려 하느냐!”

고함에 깜짝 놀란 표영은 그 기세에 눌리고 마음이 약해져 얼른 머리를 조아리고 대답했다.

“이 제자 부족하나마 사부님의 가르침대로 따르겠습니다.”

“쿨럭쿨럭…… 좋아, 좋아…….”

엽지혼은 언제 화를 냈냐 싶게 웃음을 머금더니 손짓으로 표영을 가까이 오라고 했다.

표영이 얼굴을 가까이 대자 엽지혼은 냅다 한 움큼의 침을 표영의 면상에 뱉어냈다.

퉤∼

그가 말 대신 손짓으로 오라 한 것은 입 안에 침을 고이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표영은 느닷없는 침 세례를 받게 되자 이마에서부터 흐르는 침을 닦을 생각도 않고 깜짝 놀라 물었다.

“제가 사부님의 명을 받든다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마음이 풀리지 않으셨나요?”

사부가 아직 화가 덜 풀려 침을 뱉은 것이라 이해한 것이다.

“쿨럭, 쿨럭. 이제 진정으로 너는 개방의 방주가 되었다. 원래 개방의 법도엔 방주가 되기 전 문도들의 침을 그 몸에 받도록 되어 있지. 그 의미는 방주가 되었지만 자신은 변함없이 거지임을 잊지 말라는 교훈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이더냐.”

엽지혼은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삶은 비록 불행했지만 마지막은 큰 복을 받은 것이라 생각했다.

“오늘 내 너에게 타구봉을 주어야 하지만 나는 어리석게도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방주는 모름지기 타구봉이 있어야 하니 앞으로는 네가 지니고 다니는 견왕봉을 타구봉으로 명하겠다.”

그가 견왕봉을 타구봉으로 정한 것은 그저 모양과 형식을 갖추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실제 그는 견왕봉을 처음 만져 보았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탄성과 강도가 타구봉에 견주어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색깔이 타구봉이 청록이라면 견왕봉은 윤기 나는 검붉은 빛을 띠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표영은 그때까지도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침이 볼을 타고 한 방울 한 방울 흘러내릴 때까지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사부의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고 있음을 본 것이다.

“사부님의 부탁을 들어드렸으니 사부님도 저의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십시오.”

표영의 진지한 물음에 엽지혼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답했다.

“무엇이냐.”

“사부님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누구입니까?”

표영의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엽지혼은 손을 가슴에 대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 아닐 거야, 아니구말구. 위군, 그 녀석이 야망이 있었다고 해도 내게 이런 짓을 했을 리는 없어. 암, 그렇고 말고,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야.’

엽지혼은 자꾸만 부인하고 싶었다. 진실이 어떻든 그는 제자에게 배신당했음을 생각조차 하기 싫었던 것이다.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네가 강호에서 ‘의를 숭상하라’는 개방의 가르침을 행한다면 자연히 그 근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애써 그에 착념하지 말거라. 그저 너는 너의 길을 가면 돼. 알겠느냐?”

표영은 그래도 다시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묻지 못했다.

마지막 ‘알겠느냐?’라는 말을 할 때의 사부의 음성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기 때문이다. 극도로 악화된 심신에 자극을 더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더 이상 말을 하기 힘들 것 같구나.”

엽지혼은 더 이상 눈을 뜰 힘조차도 남지 않았다. 그저 본능적으로 희미한 호흡을 내쉴 뿐이었다. 그러나 엽지혼의 얼굴엔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젠 훨훨 날아가고 싶다. 이 몸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 저 아이는 잘 해낼 수 있겠지. 아무렴.’

가만히 실눈을 뜨고 옆을 바라보았다. 왠지 이끌리 듯 눈이 돌아간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동굴 입구에 온통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람이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얼굴은 희미하여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기 힘들었다.

‘날 데려가려고 온 것이로군. 이보시오.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되겠소? 제자와 하루 정도 더 있고 싶구려.’

그는 속으로 말했다. 그러자 흑의를 걸친 신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접응신(接應神), 그대를 데려가려 왔지만 하루 정도는 말미를 주겠다.」

‘고맙소.’

엽지혼은 편안한 마음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표영은 가늘게 숨을 내쉰 채 잠들어 있는 사부를 걱정에 가득 찬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이미 정오가 지났건만 사부는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해질 무렵, 엽지혼은 가만히 눈을 떴다. 하지만 이미 그의 눈은 초점을 잃은 상태였다.

“형! 형! 어딨는 거야…….”

“여기에 있어, 걱정 마.”

“형, 앞이 보이질 않아. 왜 이렇게 어두운 거지?”

표영은 울컥하며 굵은 눈물을 쏟았다.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지금은 캄캄한 밤이야. 달도… 뜨지 않아서 형 눈에도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형, 울어? 왜 우는 거야?”

“울긴. 내가 왜 울어. 난 울지 않아.”

눈물을 꾹 참고 입술을 삐죽이며 표영이 답했다.

“으악∼”

엽지혼은 고통스런 비명을 내질렀고 표영은 그런 사부를 꼭 끌어안았다.

“사부님!”

어느새 정신이 돌아왔는지 엽지혼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헉헉… 헉헉……. 영아, 내가 한 말들을 잊지 않았겠지? 부디…….”

“네, 이 제자 명심하고 있습니다.”

“넌 개방의 방주다… 개방의 방주야……. 으윽.”

“네. 저는 개방의 방주예요. 훌륭한 방주가 될 거라구요.”

하지만 다시 엽지혼은 정신을 잃고 중얼거렸다.

“형, 무서워……. 저기 검은 옷 입은 사람이 날 데려가려고 해. 제발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해줘.”

표영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저기 있잖아……. 저 사람이 날 데려가려고 한단 말이야. 무서워…….”

“걱정 마. 내가 쫓아내 줄게.”

표영은 억지로 엄한 표정을 지으며 동굴 입구를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질렸다.

“썩 꺼지지 못해!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는 것이냐!”

동굴 입구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던 접응신은 조용히 발길을 옮겨 동굴에서 잠시 물러났다.

엽지혼은 혼미한 가운데 정신이 두 개로 분산되어 미친 상태와 정상적인 상태를 순식간에 반복했다.

“으어억…… 영아, 영아……. 형…… 추워. 형, 내 곁에 있어 줄 거지? 영아, 너는 해낼 수 있겠지. 해낼 수 있을 거야. 형, 가지 마. 형.”

“정신 차리세요, 사부님! 이대로 가실 순 없어요.”

한동안 오락가락하던 엽지혼이 고통스러워 하다가 힘겹게 눈을 떴다. 아까와는 달리 지극히 평온한 눈빛이었다. 언제 혼미했었냐는 듯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죽기 직전 정신이 돌아오는 ‘회광반조(廻光返照)’ 현상이었다.

“허허… 녀석. 울고 있는 게냐. 넌 좀 더 모질어져야겠구나.”

그는 눈을 돌려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는 접응신에게 중얼거렸다.

“이제 갑시다. 시간을 줘서 고맙소이다.”

흑의의 접응신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엽지혼의 손을 잡았다.

「나는 그대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으니 너무 원망치 마시오. 그대의 제자는 당신의 염원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고맙구려. 함께 갑시다.”

“어디를 가신다는 겁니까, 사부님.”

“영아, 너는 오랜 후에 천천히 오거라. 알겠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엽지혼은 눈을 감았다. 그는 한 마리의 새처럼 창공을 날아 구름 사이를 뚫고 환한 빛 가운데로 끝없이 날고 또 날았다. 그리고 어느새 빛 가운데로 파묻혀 그도 빛이 되었다. 엽지혼의 손이 서서히 식어가는 만큼 표영의 눈물은 방울방울 더해져만 갔다.

‘저더러 떠나지 말라 하시더니 이렇게 떠나시는 건가요?’

불러도 대답 없는 사부를 보며 표영은 가슴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제7장 삶과 죽음에 대한 깨달음

동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엔 봉긋 솟아난 흙무더기가 생겨났다. 엽지혼의 무덤이었다. 표영은 그 앞에 마치 석상이라도 된 양 서 있었다. 사부를 묻고 난 후 벌써 네 시진(약 8시간)째다. 당장에라도 웃으며 달려올 것 같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어떤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사람이 살고 죽음은 과연 무엇인가. 사부님은 어디로 가신 걸까? 또 다른 세계로? 아니면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일까? 모든 사람은 이렇게 죽는 것인가?’

산비탈에 매달려 있다 죽은 괴이한 자를 보았을 때는 그저 두려움만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음은 그런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신적 충격 속에 짙은 허무와 절망감만이 하염없이 밀려들었다. 이제껏 풍요로움 속에 젖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적이 없는 표영에겐 너무도 힘겹고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사부가 죽은 후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표영은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사부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날이 가도 사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가끔 새와 바람, 그리고 허전함과 지난날의 추억만이 스쳐 갈 뿐이었다.

‘사부님은 이제 돌아오지 않으시는 건가.’

표영은 넋 나간 사람처럼 동굴을 떠났다. 어떤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정처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저 발길이 움직이는 대로 몸이 갈 뿐이었다.

‘무림은 무엇이며, 또 개방은 무엇인가. 그 많은 무공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또한 방주가 되면 무엇하겠는가.’

사부의 부탁도 그저 공허로울 뿐이었다. 모든 것이 결국 그 생명이 다하고 죽음에 이를 것이다. 단지 누가 빨리, 혹은 늦게 죽느냐의 시간 차가 있을 뿐이다.

‘인생은 그저 죽음이라는 표적을 향해 날 때부터 맹렬히 달려가는 화살인가.’

한없이 걷다 보니 이곳이 어디쯤인지도 몰랐다. 단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표영에게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표영은 낮이든 밤이든 그저 걷기만 했다. 문득문득 풀숲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면 당장에라도 사부가 뛰쳐나와 ‘형. 어디 가는 거야’라고 말할 것 같아 잠깐 멈추어 설 뿐이었다. 그때마다 토끼나 노루를 보고 다시 눈물을 흘렸다.

열흘하고도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하물며 물 한 방울조차도……. 눈은 흐려지고 다리는 기력을 잃었다. 며칠이 지났는지조차 몰랐다. 사람이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생명을 유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예로부터 남칠여구(男七女九)라 했다. 남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칠 일 동안을 버틸 수 있고 여자는 구 일까지 버틸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 쓰러져 죽었을 기간이었지만 천년하수오와 묵각혈망의 내단의 잠재된 힘과 내공 덕분에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힘과 내공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사람에게 있어 몸의 균형을 깨뜨리고 병을 생기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은 얽히고 설킨 감정이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게 되면 오히려 내공을 가진 자가 더욱 위험해지는 것이다.

표영은 한참을 휘청거리며 걷다가 가슴이 큰 바위에 눌린 듯 답답해졌다. 주화입마가 닥친 것이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빙글빙글 돌았다. 이어 표영의 몸은 한줄기 아지랑이마냥 스멀거리더니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극도로 쇠약해진 몸과 마음으로 심마(心魔)에 빠진 표영은 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깨어날 줄을 몰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