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32.
제5장 타구봉법
오극전갈과 당가의 소동은 표영에게 이르러 재앙이 복으로 바뀌었다. 뜻하지 않게 독존의 경지에 이르게 된 표영은 엽지혼의 닦달에 의해 다시 무공 연마에 힘을 다했다. 우선적으로 독을 발출하고 거둠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다.
“독을 사용함은 진정한 무의 길이라고 할 수 없다. 무공 중 가장 악랄한 것이 바로 독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가나 오독문 같은 무리들은 비열한 집단인 셈이지. 하지만 그런 그들을 꺾기 위해서는 독에 대해 잘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보다 독을 더 잘 사용한다면 좋겠지. 넌 이제 독에 관한 한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다. 부디 독으로 악을 제압하고 선함으로 인도하는 데 쓰도록 해라. 내 너에게 독을 어떻게 시전할지를 알려주마. 어려울 것은 없다. 전에 익힌 지법인 식탐지를 이용해 기 대신 몸 안에 내재된 독을 발출하면 되는 것이다. 식탐지로 기의 양을 조절하여 발출하듯 독도 마찬가지의 섭리를 따르면 된다.”
표영은 이미 식탐지에 대해서도 5할 정도의 성취를 보이고 있었기에 사부의 이어지는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지나 어느덧 겨울이 되었다. 그동안 표영은 독공의 시전과 음공인 천음조화에 대해 수련했다. 거의 늦겨울 정도가 되었을까. 엽지혼은 이제 마지막 가르침을 베풀어야 할 때가 왔음을 인식했다.
“오늘은 네게 가장 가르쳐 주고 싶었던 타구봉법을 전수해 주도록 하겠다. 구결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만성지체를 타고난 표영이 아니던가. 금제가 아니면 천하제일의 기재인 것이다. 이제 만성지체의 금제를 8할 정도 벗어난 표영의 머리가 구결을 잊을 리가 없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좋다. 내 너에게 타구봉법을 시전해 보이마. 봉을 빌려다오.”
봉을 건네받은 엽지혼은 동굴 밖으로 나가 자세를 잡았다.
“형태를 보지 말고 흐름과 이치를 보도록 해라.”
엽지혼의 손이 움직였다. 그의 몸은 내공이 소실되어 빠른 동작이나 기운찬 움직임은 없었지만 과거 최절정 고수로서의 기도는 녹슬지 않았다. 그는 한 손 한 발을 움직이며 크게 외쳤다.
일봉을 뻗으니 산악이 쪼개지며 바다가 나뉘는구나.
산천이 내게 말하길 멈추라 하나 나는 그칠 수가 없다.
오로지 가르고 갈라 세상에 악인들을 다 멸한다면
그날이면 아마 나의 손은 쉼을 얻을 수 있을까.
세상에 모든 위선을 감고 얽어 잡아두리라.
선하다고 말하는 자 중에 선한 자를 찾기 어렵고
의롭다고 말하는 자 중에 의로운 자를 찾기 어려우니
나의 봉은 그들을 얽어 잡아두리라.
세상을 굽어보는 이들 중에 약한 자를 업신여기는 자 있는가.
나의 봉이 그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그가 세상을 휘어잡으려 하는가.
내 봉이 그를 휘고 끌어 업신여겨 주리라.
교만한 이들 중에는 개만도 못한 자 많으니
내 그들을 막대기로 봉하리라.
한번 가두면 벗어날 수 없고
그 안에서 혼란을 겪듯 돌고 돌 뿐이리라.
엽지혼은 음률에 맞추어 타구봉을 시전했다. 이것은 타구봉의 8개의 핵심구결을 노래한 것이었다.
8개의 핵심구결이란 반(拌:쪼개고), 벽(劈:가르고), 전(纏:얽어매고), 착(捉:잡으며), 도(挑:휘고), 인(引:끌며), 봉(封:봉하여), 전(轉:회전시킨다)이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응용되어 쪼개짐이 얽힘과 어우러지고 거기에 끄는 힘을 부여하면 전혀 새로운 힘을 탄생시키게 된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가히 공간의 전 방위를 제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힘의 배합에 따라 적은 힘으로 큰 힘을 제어할 수 있으며 태산같이 누르기도 하고 그 가벼움이 깃털과 같이 표홀하기도 했다.
표영은 사부의 움직임과 그 노랫소리에서 타구봉법과 개방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진정 강호의 의로운 막대기가 되어라.’
표영은 겨울이 다 지나기까지 타구봉법을 익히는 데 전력을 기울었다.
6장 이별의 아픔
타구봉법을 전수한 뒤 엽지혼의 몸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낮 시간에조차 급작스럽게 혼절하곤 했다. 또한 밤에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시간도 매우 짧아졌다. 엽지혼은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말이 있다. 이는 죽음에 이르기 직전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태운다는 뜻이다. 언뜻 정상으로 돌아온 듯 보이나 그것은 오히려 죽음을 알리는 신호인 것이다. 넓은 의미로 보면 엽지혼이 표영을 만나 자아를 찾은 것은 회광반조와 같았다. 표영을 만나기 전까지는 낮이든 밤이든(비록 밤에 흉포하게 변한다 할지라도) 자아를 잃고 얽매이지 않았다. 그러다 자신이 누구인 줄 알게 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해 주면서 그의 몸은 급격히 스러져 갔다.
그건 마치 촛불이 스스로를 태워 주위를 빛내다 스러져 가는 것과 같았다. 이제 엽지혼은 밤에 깨어나도 온전한 정신은 고작 일 다경(차 한 잔 마실 시간, 15분)뿐이었다. 엽지혼은 그 적은 시간을 제자에게 마지막 전할 말을 하는 데 사용했다.
“영아, 네게 개방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주겠다.”
힘없이 들리는 쉰 목소리. 퀭하니 들어간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흐릿했다. 또한 손은 수전증(手顫症)에 걸린 듯 불규칙적으로 연신 떨리고 있었다. 표영의 마음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엽지혼은 제자의 얼굴에 근심이 서린 것을 발견하고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녀석, 이 사부를 걱정하는 것이냐. 앞으로 10년은 더 살 수 있으니 그리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지 마라. 오히려 네놈이 그렇게 바라보니 내가 오래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것 같지 않느냐.”
그가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내가 거둔 두 제자에 대한 이야기니라. 첫째 제자의 이름은 장산후(張山嗅), 그리고 둘째는 너도 알고 있는 노위군(盧僞君)이다.”
엽지혼은 두 제자의 이름을 거론하자 감회가 새로운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표영은 어쩌면 사부가 이처럼 피폐해진 원인을 들을 수 있겠구나 싶어 정신을 집중했다.
“첫째 산후는 10여 세가 되었을 때 거둬들이게 되었다. 그 아이는 성정이 유순하고 착하기 그지없었다. 덕망과 인품을 갖추어 모름지기 개방을 이끌어갈 후개로서 적합했단다. 최고의 인재라고 하기엔 모자람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저 평범한 것은 아니었어. 둘째 위군은 가난하고 어려운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아이는 그런 삶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강호로 뛰어들게 되었지. 난 그 아이의 근골과 자질이 훌륭한 것을 보고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실제 자질로만 따지자면 둘째는 첫째보다 두 배 정도 뛰어났다. 위군은 처음에는 고분고분했지만 무공을 익히면서 그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아인 고집이 세고 남에게 뒤처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지. 힘을 지향하고 권력에 마음을 두고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거야. 그 사실을 안 후로 난 둘째에게 무공을 가르침에 있어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자칫 사형을 업신여기고 큰 마음을 품게 될까 두려웠던 게야. 지도자는 재능보다는 덕망의 높고 낮음이 중요하다. 여러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 그리고 인자함과 함께 적당한 무(武)를 겸비했을 때 비로소 훌륭한 지도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둘째 위군은 걸맞지 않는 녀석이었다.”
여기까지 말한 엽지혼은 숨이 가쁜지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난 첫째 산후가 잘 성장해 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 아이는 착하다는 것이 장점인 반면 약점이기도 했다. 마음이 너무 여렸지. 모름지기 앞에서 이끌어가려면 과감한 결단이 필요할 때 단호하게 행할 줄도 알아야하는 법. 그 아인 그저 모든 것을 좋게만 바라보며 살았어. 그렇게 되면 잘잘못을 가리기가 어려워진다. 이렇게 두 아이 모두 부족한 점이 있지만 나는 내 뒤는 첫째 산후가 이을 것이라 분명히 말해 두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너에게 처음에 개방의 옷차림을 듣고 첫째 산후가 방주 자리에 오르지 못했음을 직감했다. 너를 보내 개방을 알아보라 한 것은 그것을 확인한 것뿐이었다. 위군… 그 녀석이…….”
엽지혼은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
“개방의 본모습은 네가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네가 본 개방은 정의파로서의 개방이지. 그건 가짜다, 가짜고말고. 쿨럭쿨럭…….”
정의파라는 말을 하면서 엽지혼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진정한 개방은 오의파를 가리킨다. 오의파(汚衣派)는 기존에 개방이 추구해 왔던 길이다. 이들은 거지 생활을 중심에 두고 무림에 기여하고 깨달음을 얻어가는 사람들이다. 이 사부가 걸어온 길도 바로 오의파의 길이다. 반면 정의파란 네가 길에서 보았던 것처럼 철저히 무림인으로서의 개방의 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거지임을 부끄러워하는 무리들이지. 개방은 원래 파가 없었지만 500년 전 신천용이라는 방주 때로부터 정의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 후로 개방은 엎치락덮치락하며 오의파와 정의파가 한 번씩 승기를 잡고 개방을 주도해 나가게 되었단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부터 지금까지는 오의파의 길을 걸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젠 위군이 방주가 되고 정의파로 돌변하게 된 것이야. 허억, 쿨럭쿨럭.”
엽지혼은 온몸을 요동 치듯 기침을 해댄 후 울컥하고 피를 토해냈다.
“사부님, 이제 그만 말씀하세요.”
표영이 놀라 얼른 부축했다.
“시간이 없는…….”
엽지혼은 고통스럽게 얼굴을 찌푸리다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갔고 표영의 얼굴도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엽지혼은 낮 시간에도 예전의 활기 찬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겨울의 막바지라 몸을 부르르 떨며 오한에 시달렸다.
“형, 추워. 너무 추워.”
표영의 마음은 갈가리 찢기는 듯했다. 머지않아 이별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표영은 혼미한 사부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불을 피웠으니 조금만 참아. 이제 곧 나아질 거야.”
와들와들 떨며 엽지혼은 표영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형, 나 잘 동안 떠나면 안 돼. 알았지?”
“그래 난 항상 옆에 있을 거야. 아무 염려 하지 말고 푹 자둬.”
표영은 안타까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사부님, 힘내세요. 약해지시면 안 돼요. 저를 떠나지 말아주세요.”
다시 밤이 찾아왔다. 엽지혼은 홑이불을 둘러쓰고 오들오들 떨었다. 그에겐 마치 차가운 얼음 구덩이 속에 파묻혀 있는 것 같은 추위였다.
“영아! 네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다. 너는 들어줄 수 있겠니?”
“마지막이라뇨.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자꾸 그러시려면 부탁 같은 것은 아예 하지도 마세요.”
표영은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면 홀가분하게 세상을 떠나려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엽지혼은 최후의 순간이, 그리고 하늘의 사자가 아주 가까이 와 있음을 알았다.
“허허, 녀석……. 그래, 마지막 부탁이란 말은 취소하마. 이제는 들어줄 수 있겠지?”
표영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엽지혼이 말을 이었다.
“좋아, 사나이가 약속을 했으니 두말을 해서는 안 된다. 알겠지?”
“이 제자 성심껏 따르겠습니다.”
엽지혼은 추위에 떨면서도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
‘녀석.’
“앞으로 개방은 네가 지켜주렴.”
표영으로선 일순 정확한 뜻을 파악할 순 없었지만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개방을 위해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좋다. 앞으로는 네가 방주다.”
느닷없는 말에 표영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방주라뇨? 어떻게 제가…….”
“후후후……. 쿨럭쿨럭… 내가 네게 한 달 전부터 가르치기 시작한 타구봉법을 기억하느냐? 너는 그것을 다 기억하고 있겠지?”
표영이 그것을 잊을 리가 있겠는가. 다른 무공구결을 전수할 때와는 달리 얼마나 엄하게 가르치셨던가. 게다가 봉법의 변초는 얼마나 복잡다단했던가.
“제자 잊지 않았습니다.”
“너는 타구봉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다. 그건 유일하게 방주만이 익힐 수 있는 비전절기다. 원래 방주를 나타내는 신물은 타구봉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방주라고 할 수 없다. 타구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타구봉으로 시전하는 타구봉법을 익힌 자라야만 진정한 방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는 타구봉법을 익히지 않았느냐!”
비로소 표영은 사부가 타구봉법을 가르칠 때 왜 그리도 엄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제가 어떻게…….”
표영이 말할 때 엽지혼이 손을 내저었다.
“아까 네 녀석이 약속한 말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쿨럭, 쿨럭!”
그는 곧 숨이 넘어갈 만큼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이번 것은 실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 꾸민 것이었지만 표영의 안색은 걱정으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