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21.
“개방은 어엿한 무림의 대방파일 뿐 거지들의 집단이 아니건만 네 까짓 놈이 뭔데 감히 시비를 거는 것이냐?”
“흥, 우리가 시비를 걸었다고? 단지 눈으로 쳐다본 것도 죄가 된단 말이더냐. 괜한 자격지심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겠지.”
흑의 무복을 입은 자는 호경 땅에서는 그래도 협의를 행한다는 흑룡편(黑龍鞭) 종무명이었고, 그와 함께 술을 마신 자는 인절검(人絶劍) 진자량이었다.
“십 년 전에 천상신개 엽 방주께서 계실 때는 개방이 이렇게 무뢰배가 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무영신개 노위군이 방주가 된 후에는 점점 그 맑은 기운을 잃어가는군. 도대체 싸움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이냐.”
한쪽에서 싸움 구경을 하며 유심히 대화를 듣고 있던 표영의 귀가 번쩍 뜨였다.
‘음… 천상신개 엽 방주라… 그 할아버지잖아. 진짜 방주였었구나. 근데 지금의 방주는 무영신개 노위군이라 이거로군. 근데 십 년이나 지났다니… 그럼 동굴에서 10년을 지냈다는 말인가. 쩝…….’
싸움판의 두 개방 제자는 흑룡편 종무명의 말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흥, 감히 방주님을 능멸하다니. 죽고 싶은 게로구나. 더 이상 긴 말할 필요 없다. 너희들 같이 외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녀석들은 몸에 상처를 입어봐야 정신을 차리겠지.”
말을 한 이는 철심개라고 불리는 개방의 사결제자 이진구(李眞拘)였고 그 옆에는 삼결제자 만운경(蔓雲境)이었다. 만운경의 용모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얼굴이었지만 이진구의 용모는 턱이 길고 눈꼬리가 올라간 것이 꼭 뱀을 보는 것같이 인상이 좋지 못했다.
개방에서는 서열을 나눔에 있어서 매듭의 수로 나타낸다. 뒤에 매는 포대 자루를 두르는 가슴 선으로 이어지는 줄에 매듭을 매게 되는데 많을수록 서열이 높음을 의미한다. 그중 방주는 아홉 개의 매듭으로 표시한다. 개방의 사결제자라는 것은 네 개의 조를 통솔하는 단장의 지위로서 상당한 실력을 갖춘 자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종무명은 결코 상대들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알았다. 개방의 사결제자는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 상태로 물러난다는 것은 무림인으로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자신들같이 어느 문파나 방에 속해 있지 않는 자들로서 이런 거대 방파를 건드린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칼을 맞고 죽는 게 낫다고 여겼다. 그는 그의 애병기인 흑룡편을 공중에 한 바퀴 회전시키며 쏘아붙였다.
“흥, 내 회초리로 너의 종아리를 때려 못된 버릇을 고쳐 주도록 하마. 방의 세력만 믿고 날뛰는 너희 같은 무리를 이 어르신이 아니면 누가 잡아주겠느냐.”
“잘도 지껄이는구나. 쓸데없이 나불대는 입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마.”
분노한 철심개 이진구는 맹렬한 기세로 신형을 날려 파옥장(破玉掌)을 전개했다. 그것을 계기로 네 사람은 한데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다. 치고 빠지는 가운데 뿌옇게 먼지가 일었다. 네 사람의 거친 숨소리도 사방으로 퍼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싸움은 종무명과 진자량에게 불리해져만 갔다.
종무명과 진자량은 둘 다 회초리와 검을 들고 싸우고 있었고 두 개방 제자는 맨손으로 겨루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무명 쪽이 어려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두 개방 제자의 신형의 빠름이 거의 두 배 정도 뛰어나다 보니 무기의 유익함이 크게 발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흑룡편이 용의 꿈틀거림처럼 휘둘러졌으나 이진구는 회초리의 여세 속에 파고들며 바람처럼 장력을 날렸다.
퍽-
이진구의 파옥장이 정확히 왼쪽 가슴에 적중했다.
“으윽…….”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종무명은 비틀비틀 물러나며 쓰러진 후 ‘우웩’ 하고 한 모금의 피를 토해냈다. 종무명을 쓰러뜨린 후 이진구는 몸을 돌려 격전을 벌이고 있는 만운경과 진자량 사이로 파고들었다. 인절검 진자량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라 이진구의 합세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펑! 소리와 함께 이진구의 장력에 어깨를 강타당한 그는 몸이 붕 떠지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결투는 1대 1의 대결이라 볼 수 있었기에 이런 마무리는 비열한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진구는 자신이 끼어든 것에 대해 적절히 합리화시키는 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간교한 무리에겐 정당한 방법을 쓸 필요는 없는 법이다.”
솔직히 간교한 것은 이진구 당사자였으나 행동과 어우러진 말 한마디의 효과가 어떤 것인지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진구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두 사람을 향해 비웃음을 던졌다.
“흥, 입만 살아 있는 놈들이었군. 고작 그런 실력으로 개방에 도전하겠다는 거냐? 가소로운 녀석들.”
“멋대로 해보 거라. 이 빌어먹을 거지보다 못한 놈들아. 우리가 네놈들에게 무엇을… 우욱!”
종무명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이진구의 발길질이 복부를 가격해 버린 것이다.
“무공만 형편없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수준 또한 형편없구나. 네놈들의 헛소리를 토해내는 입을 내가 똑바로 맞춰주마.”
분노한 발길질이 연거푸 날았다. 두둑 하는 소리가 들리며 두 사람의 턱이 바스러졌다.
“으아악…….”
“으으억…….”
끔찍스런 비명 소리는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간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다시 한 번 지껄여 보지 그래? 응, 지껄여 보란 말이다!”
이진구는 승자의 이기죽거림을 보였다. 이제는 이 상황에 대한 소문을 왜곡시키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개방은 거지들이 모여 만들어진 곳이다. 하지만 우리를 한낱 거지 나부랭이처럼 무시하고 천대하는 너희 같은 무리들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까지 대의에 충실하고 무림의 평안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 왔다. 너희 같은 무리들은 그 수고로움을 모르고 개방을 천시하니 어찌 훈육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오늘은 이 정도로 그치지만 다음에 또 시비를 걸어온다면 그땐 살수를 펼쳐 목숨을 빼앗을 테니 원망하지 마라.”
철심개 이진구의 시선은 종무명과 진자량에게 두었지만 말은 주위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말한 내용은 진정 소동이 일어난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그가 마지막으로 종무명과 진자량의 턱을 날려 버린 것은 그들이 행여나 진실을 말할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사실 싸우게 된 동기로 보자면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고 종무명, 진자량 이 두 사람이 그렇게 무시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굳이 턱을 바스러뜨리는 일까지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는데 너무나 잔인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표영도 모든 걸 지켜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견왕봉을 빼 들고 타구일일로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해 혼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까 두 사람의 실력을 직접 보았던 터라 괜히 나섰다가는 자신의 턱도 돌아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 손만 만지작거렸다.
‘나쁜 놈들 같으니… 개방은 그리 좋은 곳이 못 되는구나.’
“형. 어디 갔다 온 거야? 왜 아무 말도 없이 떠나버렸어.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돌아온 표영을 보고 엽지혼은 꼭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표영이 돌아오지 않자 많이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떠난 지 7일 만에 돌아온 것이니 그동안 엽지혼은 내내 울었던 것이다.
“이 바보야, 네가 나한테 갔다 오라고 한 거야. 아이고∼ 힘들다.”
“칫, 그게 무슨 소리야. 얼른 나하고 약속해. 이제 앞으로 나만 두고 떠나지 않겠다고. 빨리 하란 말이야.”
“알았어. 알았다고. 떠나지 않을게. 됐지?”
“응… 헤헤헤.”
그날 밤.
“음… 십 년… 노위군…….”
엽지혼은 표영이 들려준 이야기를 다 들은 후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제일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개방이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방주가 노위군이라는 말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노위군은 둘째 제자로 재주는 많지만 세속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개방 방주로서는 자격이 합당치 않다 여겨온 제자였다.
엽지혼은 눈을 들어 멀리 달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고 그의 주름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렇게 며칠이나 지났을까. 한동안 엽지혼은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표영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엽지혼의 표정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고 오 일이 지난 날 표영에게 물었다.
“영아. 너는 나쁜 거지들을 혼내주고 싶지 않느냐?”
“음… 그야 물론 혼내주고 싶지요.”
“내가 혼내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까?”
“어떻게요?”
“녀석아, 내가 바로 개방 방주가 아니더냐.”
“음… 그럼 저도 개방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가요? 사실 전 이제 개방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어요. 그런 못된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지 않거든요.”
실제로 표영은 그때 그 싸움을 본 후 정나미가 뚝 떨어졌고 주동에게 찾아가 따지는 문제도 시들해져 버린 상태였다.
엽지혼이 개의치 않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라 할 수 있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네가 모든 것을 원상태로 돌려놓으면 되지 않느냐.”
어느새 엽지혼은 웃으면서 주먹을 매만지고 있었다.
표영은 과거 개 사부 원구협에게 배우지 않겠다고 했다가 삼 일간 얻어터진 일을 기억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또다시 그 일이 재현되지 않으리란 법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어째서 주먹을 매만지고 계시는 거냐고∼ 어째 가르치려는 사람들은 모두 후려 패는 것을 좋아할까, 젠장.’
표영은 맞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엽 노인의 말도 일리가 있다 생각했다. 이제까지 집을 떠나온 이유며, 개 비법을 배우느라 고생한 것(비록 그것이 개방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주동을 찾으러 길을 헤맨 것들을 생각해 보면 꼭 고집만 부릴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개방에 가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대로는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요. 만약에 제가 개방에 들어가 못된 거지들을 바르게 인도할 수만 있다면 한번 배워볼게요. 개 비법도 배운 처지에 이까짓 못 배우겠어요? 어차피 저도 이왕 집을 나왔으니 개방 제자가 되면 부모님도 좋아하실 테니까요.”
엽지혼은 개 비법을 배웠다는 말에 궁금증이 일었다.
“개 비법이라는 것도 있단 말이냐? 처음 들어보는데…….”
표영은 머리를 긁적이며 처음에 개방 제자들을 만나 개 비법을 배우게 된 동기와 그동안에 어떤 과정을 통해 수련했는지를 차근히 말했다.
“…뭐 이 정도죠.”
엽지혼은 배꼽을 움켜쥐고 웃겨 죽겠다는 듯 킬킬거렸다.
“으하하하하… 그러니까… 네 녀석이 바로 개들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냐? 으하하하!”
그가 이제껏 정신이 든 후 가장 기분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표영도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기뻐했다.
“하하하…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라니, 너야말로 앞으로 개방을 이끌어갈 인재로구나. 인재야, 하하하…….”
견왕지로의 7단계까지의 길을 걸어간 것이라면 거지 생활 정도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쉽게 행할 것이다.
‘개방의 무공을 익히기엔 세상에 이 아이보다 더 적합한 인물을 찾긴 힘들 것이다.’
엽지혼은 자신이 표영을 제자로 받아들이려 한 것은 너무나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표영은 엽지혼을 사부로 모시는 구배지례를 올렸다. 표영으로서는 개 사부에 이어 두 번째 사부를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사부가 된 엽지혼은 감회에 사로잡혔다. 자신에게 있어서는 세 번째 제자인 셈이다.
‘이번에는 후회 없는 가르침을 베풀리라.’
그는 각오를 다진 후 표영에게 그동안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묻고자 했다.
“영아!”
“네, 사부님.”
하지만 막상 불러놓고도 말을 꺼내려니 망설여졌다.
“음…….”
“말씀하시라니까요.”
재촉하는 말에 엽지혼이 결심을 굳혔는지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고 물었다.
“사실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다.”
“뭐든지 물어보세요.”
“그러니까 말이다. 음… 그러니까… 내가 정신을 차리기 전 시간들에 대한 것인데… 음…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너를 어떻게 대했는지 궁금하구나.”
표영은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라고 생각하며 당황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엽지혼은 제자가 말을 더듬자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미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다. 어서 말해 보거라.”
“너무 충격 받지 마세요.”
다짐을 받아둘 필요가 있었다.
“추, 충격! 아, 알았다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엽지혼은 가슴이 콩닥콩닥 거렸다.
‘충격을 받아야 할 정도였나? 되게 긴장되네.’
“그게 말이죠. 저한테 형이라고 부르면서 눈이 반쯤 풀려 지내신답니다.”
엽지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각오를 했지만 큰 충격이었다.
“정말이냐?”
표영은 혹시나 해코지를 하면 어떡하나 하고 얼른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저는 자꾸 형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글쎄 자꾸 사부님께서 땡깡을 놓으시며 형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하기에 저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 제가 형처럼 안 하면 얼마나 서러워하는지 아세요……?”
표영은 어찌 나올지 몰라 말꼬리를 점점 흐렸다. 엽지혼은 가슴을 어루만지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음… 너는 그런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지?”
“저는 아주∼ 친절하게 대하고 있어요.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사실이겠지?”
꿀꺽.
표영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럼요.”
엽지혼이 덥석 힘주어 표영의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았다.
“영아, 앞으로도 계속 잘해주어야 한다.”
표영도 마주 보며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엽지혼은 표영의 손을 뜨겁게 잡으며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