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20.
다음 날 밤 엽지혼이 표영에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구나.”
“네, 말씀하세요.”
“너는 개방 제자들을 만나보았다고 했지?”
엽지혼은 표영이 대략 여기까지 온 경위를 들었던 터였다.
“음, 감숙성에서 처음 만나보았었죠.”
“그들의 옷차림은 어떠하더냐?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느냐, 아니면 그런대로 깔끔한 옷을 입고 있었느냐?”
“음… 다들 깔끔하던걸요. 처음에 저는 그들이 거지인 줄도 몰랐을 정도니까요. 단지 억지로 기운 듯한 시늉을 냈을 뿐이더라고요.”
표영의 말에 엽지혼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고 눈은 암울한 기운을 띠었다.
“설마 그렇게 된 것은 아니겠지. 설마…….”
그는 아주 작게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더니 눈을 감고 회상에 잠겼다.
개방은 이제껏 진정한 거지의 길을 가는 오의파(汚衣派)와 세속적인 성격을 지닌 정의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오의파가 추구하는 외형은 순수한 거지의 모습이다. 더러운 옷을 입고 다니며 주로 구걸로써 생계를 유지한다. 즉, 거지의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무림에 기여하거나 강호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그에 반해 정의파는 깨끗한 옷을 입고 다닌다. 거지라기보다는 무림의 한 방파로서의 길을 가는 쪽이다. 가끔 정의파가 구걸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길일 뿐, 대부분은 철저히 무림 방파로서의 길만을 갈 뿐이다.
원래의 개방에 있어 정의파라는 것은 없었다. 즉, 오의파적인 성격으로 애초에 파가 구문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훗날 점점 변질되어 가면서 거지의 삶보다는 무림의 일원으로서의 성격을 추구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바로 정의파였다. 이런 흐름은 어떤 의식을 가진 방주냐에 따라 전체적인 개방의 방향이 뒤바뀌기도 했다.
근래 200여 년 가까이 오의파의 정신으로 개방은 이끌어졌고 엽지혼이 방주로 있을 때도 그런 길을 걸었었다. 그런데 표영의 말을 들어보니 지금의 개방은 정의파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건 필시 후계 체제에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의 개방은 정의파의 길을… 후우∼ 장산후…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아이,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마음은 의롭고 근골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르침을 어겨본 일이 없는 제자였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의 개방이 어떻게……. 장산후 그 아이가 현재 개방 방주라면 결코 정의파의 길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도 무사하지 못하다는 것.
가슴이 송곳으로 찔린 듯 아려왔다. 불현듯 그는 품속을 뒤져 보았다. 방주의 신물인 타구봉은 어디에도 없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잃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황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머리 뒤쪽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이 온 머리로 번져 가며 의식을 끊으려 했다.
“으으윽…….”
고통에 찬 신음 소리와 함께 엽지혼은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엽지혼은 며칠 밤을 아무런 말도 없이 심각하게 고민했다. 표영으로서는 너무나 분위기가 심각해 감히 한마디 말조차 건네 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5일 정도 지날 때였다.
“개방에 다녀와야겠다.”
심각한 표정으로 엽지혼이 말했다. 하지만 표영은 말도 안 된다고 여겼다.
“반 시진도 못 되어 정신을 잃을 텐데 어떻게 가시겠다는 거예요?”
그건 표영의 말이 옳았다. 분명 가다가 정신을 잃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일 터. 물론 엽지혼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동안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했던 것이다. 현재 엽지혼은 내공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그리고 살수들의 공격에 의해 요혈이 파괴된 후 제때 치료받지 못해 몸의 균형이 무너져 보통 사람보다도 오히려 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일반적인 달리기를 하는 것조차 무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지 마시고 여기 계세요. 제가 대신 다녀올게요.”
표영의 말에 엽지혼은 입 꼬리에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도 가봐야겠구나, 돌아오마.”
엽지혼은 말을 마치고 걸음을 옮겼다. 표영은 동굴 입구에서 멀어져 가는 엽지혼을 바라보았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 정말 사람 고생시키는 데는 도통한 것 같다니까.”
보지 않아도 결과는 뻔한 것이다. 표영은 쓰러지면 함께 돌아올 요량으로 뒤따라갔다.
엽지혼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 왔지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나름대로 계산이 서 있었다. 다시 정신을 잃게 되더라도 그곳에서 다시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또다시 걸음을 옮긴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로부터 반 시진 정도가 지났을 때 엽지혼은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끼고 비명을 내지르며 숲에 쓰러지고 말았다. 멀리 뒤따라오던 표영은 올 것이 왔구나 하며 비명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거기엔 엽지혼이 널브러져 있었다.
“에구, 이거 어떻게 하지? 아, 거참, 정말 피곤한 양반일세. 어쩔 수 없지. 끌고 가는 수밖에. 영차∼!”
표영은 쓰러진 노인을 등에 업고 오던 길로 꾸역꾸역 돌아갔다. 참으로 대단한 정성이 아닐 수 없었다.
“야, 이 나쁜 놈의 자식아! 왜 다시 날 이리로 데려온 거야?”
엽지혼은 밤이 되어 정신을 차리게 되자 기가 막혔다.
“어떻게 된 게 일체 도움이 안 되는 거냐? 죽어, 이 자식아. 죽어!”
그는 다시 동굴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표영을 후려 팼다.
“그만 때려요. 으아악, 사람 살려. 저는 그냥 잘해보려고 했을 뿐이라고요.”
표영이야 억울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은 그저 맞는 수밖에 없었다.
“내일 또다시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가는 뼈도 못 추릴 줄 알아. 이 청개구리 같은 놈아.”
엽지혼은 한참을 두들겨 팬 이후에 한숨을 내쉬었고 내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표영은 다음 날이 되어 정신 나간 엽지혼에게 이를 바드득 갈았다. 어제 일에 대한 복수를 감행코자 함이다.
“형을 그렇게 두들겨 팰 수 있는 거야? 엉? 똑바로 말해 봐!”
삿대질을 해대며 표영은 두들겨 패버렸다. 엽지혼은 눈물을 찔끔거리며 온몸을 뒤틀었다.
“형, 잘못했어. 그만 때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 거야.”
“죽어, 이 자식아, 죽어∼ 내가 청개구리냐? 나도 잘해보려고 그런 것뿐이라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했던가. 아니면 인과응보란 말인가. 엽지혼은 표영의 견왕봉에 의해 실컷 두들겨 맞았다. 물론 표영은 상처 자국이 남지 않도록 신경 써서 팬 것은 당연지사였다.
밤이 되어 엽지혼은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몸이 어제와 같지 않고 여기저기 쑤시는 것이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몸이 영 개운치 않구나. 낮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표영은 가슴이 뜨끔해졌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대꾸했다.
“네? 무슨 일은요… 험험…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음… 그런데 왜 이렇게 팔다리가 저려오는 거냐?”
“으음… 글쎄요, 비가 오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요.”
그러면서 바깥을 보면서 고개를 왔다 갔다 했다. 밤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소나기가 오려나. 험험…….”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그나저나 오늘은 나를 데리고 오는 멍청한 짓을 하면 가만 두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해라.”
“그럼요. 두 번씩이나 제가 그렇게 하려고요.”
엽지혼은 표영에게 여러 번 당부한 후 빠르게 걸음을 재촉해 산을 내려갔다. 표영은 기분이 상해 따라가지 않으려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염려스러워 슬금슬금 뒤를 밟았다. 아니나 다룰까, 멀리 뒤쫓아 가던 표영의 귀에 비명 소리가 들렸고 후닥닥 뛰어가 보니 엽지혼이 혼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음, 좋아. 나도 이젠 힘들게 데려가지 않을 거야. 나도 여기서 같이 자면서 내일 어떻게 될지 한번 지켜보도록 하자.”
표영은 쓰러진 엽지혼을 똑바로 눕히고 근처에서 풀을 뜯어 베개를 만들어준 후 옆에 누워 잠들었다.
“어어억… 여긴 어디지? 형, 여기 어디야? 어서 일어나. 우리 집이 어디로 가버린 거냐구.”
아침이 되어 엽 노인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표영을 깨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머리를 잡아 흔들며 한참을 깨우는 바람에 표영이 간신히 눈을 뜨고 일어났다.
“왜 이리 시끄러운 거야.”
“형, 어젯밤에 누가 우리 집을 가져가 버렸나봐. 빨리 찾으러 가자.”
엽 노인은 불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이, 귀찮아. 나 좀 더 자야 되니까. 조금 이따가 가자고.”
“안 돼. 집에 가야 된다니까. 빨리 일어나.”
표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올랐다.
“조용히 못해! 여기 있다가 밤에 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분명 밤이 되어 정상으로 돌아오면 또 개방을 가겠다고 할 것이 분명했다. 표영으로서는 어떻게든 이곳에서 버터 보려 했다. 하지만 엽 노인은 막무가내였다.
“형, 제발 그러지 좀 마. 집에 가고 싶단 말이야. 무서워.”
곧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자 표영의 마음이 약해졌다.
“휴우… 좋아. 집 찾으러 가자.”
엽 노인은 그 말에 싱글벙글해져서 표영의 손을 잡고 콧노래를 불러댔다.
“야, 신난다. 역시 형이 최고야. 야호∼!”
표영은 멍해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휴∼ 또 밤에는 간다고 할 텐데… 정말 피곤한 일이구나.”
엽지혼은 새벽에 다시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그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표영에게 들었던 터였다.
‘내가 가자고 보챘다니… 믿을 수 없구나…….”
또 다른 자신은 이 동굴에서 벗어나기를 죽기보다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 가지고서 개방을 살펴본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넋을 놓고 하루하루를 보낼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래도 하는 데까지 해보는 수밖에…….’
그는 다시 똑같은 상황을 일곱 번씩이나 재현했다. 그때마다 결과는 똑같았다. 비로소 그는 자신의 힘으로 이곳을 벗어날 길이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답답해진 엽지혼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들어 저 멀리 한 조각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후…….’
엽지혼은 차선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표영을 조용히 불러 물었다.
“영아, 어려운 부탁인 줄은 안다만 나로서는 이곳을 떠나기가 무척 어렵구나. 나대신 네가 개방 사람을 만나 현재 개방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알아봐 주면 좋겠구나.”
표영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 거참, 제가 진작 그렇게 하자고 했잖아요. 그동안 제가 얼마나 피곤했는지 아세요? 아, 요즘은 정말이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죽겠다니까요.”
“소란스럽지 않게 되도록 은밀하게 알아봐야 한다.”
“염려 붙들어 매세요.”
표영은 산을 내려갔다. 엽지혼의 가르침을 따라 옷조각을 찢어 나뭇가지에 일정한 간격으로 표식을 남겨두었다. 혹시라도 험한 산길을 되돌아오지 못할 것을 염려해 다시 길을 찾아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표영이 내려간 곳은 섬서성에 위치한 허운 지역이었다. 허운 지역은 섬서성에서는 서안 다음으로 큰 지역으로 그 인구 또한 결코 적지 않았다.
표영은 일단 거지들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마을을 배회하면서 개방 제자같이 보이는 사람들을 찾았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개방 사람들은 찾을 수가 없었다.
‘개방은 무림에서도 사람이 제일 많은 방파라고 하더니만 어떻게 된 게 찾으려고만 하면 보이질 않는 건지.’
그렇게 사오 일을 지났다. 표영은 이젠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체념한 채 주점 부근의 벽에 붙어 잠이나 자자는 심정으로 누워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조용히 잠을 청해보려 했건만 주점 안에서 다투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왔다.
“젠장, 자리를 잘못 잡았구나. 재수가 없으려니까.”
막 자리를 옮기려던 차였다.
와장창-!
주점의 창문이 박살나며 이 층에서 네 사람이 연달아 밖으로 뛰어내렸다. 싸움이 밖으로 이어진 것이다. 주점 안에 있던 사람들이며 주위를 지나던 사람들이 삽시간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돈 주고도 못할 구경에 은근히 기대된다는 눈빛이었다. 마치 ‘이게 웬 떡이냐!’라는 표정으로…….
표영도 어슬렁거리며 사람들 틈바구니를 뚫고 바라보았다. 두 사람씩 편이 갈려 마주 보고 있었는데 한쪽은 거지 차림이었고 두 사람은 흑의 무복을 입은 자들이었다. 왼쪽에 두 사람이 비록 거지 차림이라고는 해도 옷은 그저 기워 입은 시늉만을 한 것을 보니 개방 제자들이 분명했다.
‘찾으려고 해도 못 찾겠더니 여기서 보게 되는구나.’
흑의 무복을 입은 자 중 회초리를 뽑아 든 이가 말했다.
“흥, 거지면 거지답게 지낼 것이지. 개방도 이젠 썩을 대로 썩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