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19.
제15장 낮에는 형, 밤에는 제자
근 한 달 동안 표영은 편안히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사실 아무 걱정 없이 잠을 잘라 치면 낮 시간에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떠나버리면 아무 근심할 것이 없을 테지만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만 보이는 노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선뜻 떠나지 못하고 이렇게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이날도 표영은 미리 저녁부터 동굴 밖에서 잠을 청한 까닭에 얻어터질 고민을 하지 않고 꿀처럼 단잠에 빠졌다. 얼마쯤 잤을까. 표영은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마구 흔들어대는 느낌에 아련히 잠에서 깨어났다. 간신히 눈을 떠서 앞을 바라보던 표영은 경악성을 터뜨렸다.
“허억∼!”
어떤 물체가 눈에 바짝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시금털털한 냄새를 동반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어떤 사람이건 간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사람의 얼굴을 동공 가득 담게 된다면 무서울 것이다. 표영은 두 팔로 밀어젖히며 허겁지겁 뒤쪽으로 몸을 주르르 젖힌 후 나타난 이를 살폈다.
“어, 어떻게……?”
놀랍게도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거지 노인이었다. 표영은 이해할 수가 없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동굴과 노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분명 노인은 발작을 일으키면 동굴 밖으로 절대 나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아니,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지금 현재 눈앞에는 노인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제길…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젠 또 맞아야 하는 건가.’
하지만 표영이 머리를 복잡하게 굴리고 있을 때 그와 반대로 노인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고 잔잔히 내려다보았다.
“이씨, 너, 또 때리려고 그러지?”
노인의 표정이 발작할 때와는 뭔가 달라도 상당히 달랐지만 그래도 미심쩍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 움츠러든 목소리로 물었다.
“허허… 녀석, 말투가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때리다니, 누가 누구를 때린단 말이냐?”
노인의 얼굴과 말투는 약간의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어쨌든 이제까지 봐왔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 분명했다. 반말로 지껄이는 것을 구별해 내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낮처럼 바보 같지도 않고 밤 시간의 발작 때처럼 눈알이 번들거리며 폭력적인 미치광이의 모습도 아니었다.
눈빛은 웃음기가 가득했고 한쪽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모습은 친근감마저 느껴졌다. 그건 흔히 이웃에서 볼 수 있는 할아버지와 같은 느낌이랄 수 있었다.
“너는 나를 알고 있느냐? 너는 왜 여기서 잠자고 있는 거지?”
그 말을 하고 있는 노인의 눈빛 저편에는 공허가 가득했다. 이런 모습은 표영으로서는 처음 대하는 것이었다.
‘혹시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 오호라, 그런 것이로군. 그 어느 때와도 표정이나 말투가 다르지 않은가 말이야.’
달빛이 비스듬하게 동굴 안을 비추는 가운데 둘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표영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저 모르시겠어요?”
“음… 너는 나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너는 나와 얼마 동안 함께 있었지? 그동안 나의 삶은 어떠했는지 듣고 싶구나.”
노인의 말에 표영은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와 낮 시간의 행동과 밤 시간에 폭력적으로 변하던 것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하지만 낮 시간에 자신을 부를 때 형이라고 한다는 말과 어린아이처럼 군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이미 그 말이 아니더라도 노인의 표정은 붉어지는가 하면 하얗게 창백해지기도 하고 다시 쓴웃음을 짓는가 하면 인상을 찌푸리며 고통스러워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사실까지 다 말한다면 너무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일 테니 말이다.
표영의 설명이 다 끝났을 때 노인은 길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랬었군, 그랬어. 허허허…….”
노인은 다시 공허로운 웃음을 날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표영은 노인의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기운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허전함과 슬픔임을 알고 드디어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이라 여겼다.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감동이 밀려들며 눈물까지 나오려 했다.
‘이제까지 얻어터진 것이 결코 헛되지만은 않았던 거야. 내 이 한 몸 희생해 한 사람을 구제하지 않았느냐. 이것이 바로 뿌듯함이라고 하는 것인가 보구나. 오! 기쁘다.’
감동 속에서 문득 표영은 이 노인이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야만 왜 미치게 되었는지, 미쳐도 곱게 미칠 것이지 왜 밤마다 폭력적으로 변하게 되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럼 할아버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던 분이셨죠?”
“음… 나는… 누구…….”
노인은 누구라는 질문 앞에 눈빛이 몽롱해졌다.
“나는… 나는… 누구였지?”
노인은 ‘나는… 나는’을 계속 반복하더니 급기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눈빛이 차츰 벌겋게 변해가며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으으으. 우워어… 나는……!”
그는 괴로운 듯 갑자기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마구 흔들었다. 표영은 끔찍한 광경에 입으로 손을 가져갔다.
“뭐, 뭐야… 아직 다 기억을 회복한 것이 아니었었나?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거지 노인은 아직 온전한 정신 상태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비록 자아를 찾아 돌아오긴 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그나마 이 정도까지 온 것도 기적 같은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라도 호전된 것은 그동안 혼자 지내던 거지 노인에게 표영이 곁에 있어줌으로 인해 은연중 마음이 편안해진 데다가 밤마다 쌓였던 분노를 표영을 두들겨 패는 것으로 풀게 됨으로써 맺힌 것이 풀어지며 정신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된 것이었다.
“으윽… 나는… 나는… 누구지……. 나는… 나는… 으하하하… 알았다. 나는 바로…….”
“누, 누군데요?”
표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클클클… 나는 저승사자다, 이놈아. 으케케케.”
노인은 순식간에 발작 상태로 돌입해 미치광이로 변해 버렸다.
“허걱∼ 이게 아닌데, 저승사자라니…….”
표영은 경악성을 터뜨리고 빨리 동굴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몸을 퉁겨냈다. 하지만 어느새 노인의 주먹은 표영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퍽-!
“으억…….”
표영은 충격에 의해 바닥으로 쓰러졌고 노인은 광소를 터뜨리며 무참하게 표영을 짓밟아갔다.
“날 죽이려고 온 것이더냐. 그렇게 호락호락 죽어줄 것 같으냐. 죽어라, 이놈아. 죽어∼!”
표영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점점 의식의 끈을 놓쳐 갔다.
‘으윽… 이게 뭐야 대체. 정말이지 내일은 떠난다. 안 떠나면 내가 고자다. 난 가고야 말겠어. 제길… 아프긴 왜 이리 아픈 거야. 끙.’
내일 떠난다고 다짐을 했지만 표영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떠나지 못했다. 떠나지 못했을 정도가 아니라 다시금 계속해서 폭력의 희생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표영이 떠나지 못하고 자꾸만 미련을 갖게 된 것은 늘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듯 아슬아슬해 보이는 모습 때문이었다. 오기가 있지 이대로 그냥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떠나 버리자니 그동안의 고생이 어떤 재물보다 아깝게 느껴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만 맞닥뜨리면 늘 머리를 쥐어뜯고 심한 발작을 일으키니 말이다.
이렇게 표영이 죽도록 맞는 일이 계속되었지만 그렇다고 늘 손해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낮 시간 동안에는 적절하게 보복하는 것으로 화를 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낮에는 상황이 역전돼 거지 노인이 곤욕을 치르며 울고불고 난리가 아니었다.
“형, 그만 때려. 왜 때리는 거야.”
“형, 미워. 왜 내 밥 다 먹은 거야.”
“형, 떠나지 마. 앞으로 말 잘 들을게. 그러니 간다는 말만 하지 마.”
이렇게 낮에는 표영이 괴롭히고 밤에는 거지 노인이 괴롭히는 시간들은 계속 흘렸다.
보름이 지나고 표영은 이날도 맞을 각오를 하고 노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할아버지는 누구시죠?”
표영의 질문은 여전히 똑같은 내용으로 던져졌다. 이제 곧 머리를 쥐어뜯으며 ‘나는… 나는…’을 외치다가 주먹을 날릴 것이다.
표영은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어제 맞은 가슴 쪽이 아직도 아려오는데 오늘은 엉덩이 쪽을 맞았으면 좋겠다.’
표영은 정이 많았다. 게다가 이제까지 얻어터진 것이 아까워서라도 끝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엉덩이를 맞았으면…’이라는 자그마한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던 표영의 예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험악한 주먹 대신 노인의 기백이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나는 개방 방주 천상신개 엽지혼(葉之魂)이다. 하하하……!”
“허걱, 드, 드디어… 드디어… 정신을 차리신 거로군요?”
“그래, 나는 엽지혼이다.”
거지 노인은 드디어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놀랍게도 그의 정체는 전대 개방 방주인 천상신개 엽지혼이었던 것이다.
엽지혼은 동굴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 위에 앉아 자신이 걸어왔던 길에 대해 깊은 상념에 잠겼다.
‘도대체 나는 얼마나 이렇게 지냈던 것일까? 1년? 아니면 10년? 그리고 지금 개방에는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일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눈을 뜨고 숲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면의 사물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덧 기억저편에서 빛이 비산하며 좌우 대칭으로 사방에서 스치고 지나갔다. 그 빛무리를 뚫고 핏빛 그림자가 번쩍거렸다. 살을 에는 듯한 통증이 가슴을 파고들고 복면을 한 살수들의 빠른 몸놀림이 좌우상하에서 어른거리며 무수한 검 날이 짓쳐들었다.
“헉헉… 이대로 죽을 수 없어.”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오십여 명의 복면 살수들. 그들은 전문적인 살수 집단의 인물들임이 확실했다. 절제된 몸동작, 오직 살인만을 위해 수련한 듯한 철저한 살검들, 오로지 죽음을 선사하는 저승사자로 키워지고 훈련된 자들이 분명했다.
“으윽…….”
그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챙- 챙- 쉬익!
삼십여 명을 물리쳤다. 하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엽지혼 자신의 몸에도 수십 개의 칼 구멍이 생겨난 것이다.
“너희들은 누구냐?”
그렇게 다시 엽지혼이 십여 명을 더 쓰러뜨렸을 때는 이미 몸은 어느 것 하나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절벽, 천지가 빙글빙글 돌며 깊은 흑암의 구렁텅이로 한없이 빠져들었다.
“으아악……!”
그는 비명 소리와 함께 어둠의 깊은 공간을 지나 현실 세계로 복귀했다.
“헉, 헉, 헉…….”
그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는데 이마에서 턱선을 따라 비처럼 바닥으로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과연 누가 보낸 자들이란 말인가, 왜 나를? 살수들은 고도로 훈련된 청부 조직원임이 틀림이 없을 터. 그렇다면 누군가 고용자가 있을 것이다. 그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는 잃어버렸던 지난날을 찾았지만 밀려드는 의문에 여전히 사로 잡혀 어디에서부터 과거를 회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모든 내공은 사라지고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인지라 더욱 마음이 답답했다. 그때 뒷덜미에서부터 은은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통증은 삽시간에 머리 전체로 빠르게 번져 갔다.
“으으윽…….”
엽지혼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아득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는 비록 기억을 찾긴 했지만 그렇다고 몸까지 온전해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당한 극심한 상처로 인해 고작 밤 시간(그것도 일정치 않은) 중에 반 시진(약 1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만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된 것뿐이었다.
엽지혼이 혼절한 후 멀지 않은 곳에서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표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를 들쳐 업고 동굴로 향했다.
“가슴에 맺힌 게 많은 노인이야. 근데 정말 개방 방주였을까? 개방도 생각보다 피곤한 곳인가 보군. 쩝, 개방에 드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