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18.
표영은 목소리가 왠지 낯익은 듯싶었지만 지금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러다간 머리가 깨지든 목이 부러지든 할 테니까 말이다.
“누굴 죽이러 왔다는 거야, 어서 놀지 못해. 나중에 너 후회하지 말고 좋게 말할 때 놔라. 그리고 이곳에 있던 거지 노인은 어떻게 한 거야. 너, 그 노인 건드렸다면 인생 다 산 줄 알아라. 얼른 놓지 못해!”
이 와중에도 거지 노인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이렇게 있다가는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노인은 더욱 위험해질 것이 분명했다. 아니, 이미 해를 당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클클클… 입만 살았구나…….”
괴인의 괴이쩍은 웃음소리를 듣고 표영은 말로 해서 될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온몸에 담겨진 ‘구혈잠혈’의 살기를 거세게 내뿜었다. 그러자 동굴 안은 순식간에 살기로 가득 찼고 살기는 회오리가 되어 괴인의 몸을 휘감았다.
괴인은 갑작스런 살기에 흠칫 놀랐다. 별것도 아닌 녀석이라 여겼는데 이런 살기를 내뿜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가 멈칫하는 사이 표영은 발목에 힘을 주고 손에서 벗어났다. 떨어지는 상태에서 잽싸게 몸을 굴려 허리춤에 있던 견왕봉을 빼 들었다.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는 모르지만 여태껏 개들을 패며 나날이 몽둥이 솜씨가 늘어가는 표영인지라 두려움 따윈 없었다. 살기 어린 몽둥이질은 꼭 개들만 타격을 주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사람도 살과 피로 이루어진 것이니 맞으면 개나 다를 바가 없이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네놈, 잠자는 호랑이를 건드리는 것은 별일 아니겠지만 잠자는 거지를 깨우는 일이 얼마나 큰 화를 자초하는지 보여주겠다.”
표영은 괴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현재 괴인이 서 있는 위치가 동굴의 입구에서 안을 바라보고 있는 형세라 달빛이 비춰주었으나 역광으로 인해 겉 테두리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거지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서둘러 처리하고 어서 찾아보아야겠다.’
“잠자는 거지는 그저 거지일 뿐이지. 클클클…….”
“몽둥이에 맞고도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보겠다.”
표영은 타구일일을 시전하며 견왕봉을 휘둘렸다. 뭇 개들과 흉악한 짐승들을 복종시킨 매서운 몽둥이질이다. 일직선으로 뻗으며 괴인의 머리를 쳐나갔다. 빠르기 그지없었으나 표영의 손은 그저 허공만을 가로질렸다. 어느 샌가 괴인이 몸을 틀어 피했고 그사이 주먹이 표영의 복부를 강타했다.
퍽-
“으읍.”
실 끊어진 연처럼 이 장여를 붕 떠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표영의 맷집과 깡다구는 이 정도로 무너질 것이 아니었다.
“이놈을 그냥!”
다시 벌떡 일어나 사방팔방으로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가히 ‘물 샐 틈도 없이’란 표현은 이런 때 사용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괴인은 그 세밀한 틈 사이를 바람처럼 뚫고 다가섰다. 표영이 그 움직임에 놀라 경악성을 터뜨릴 새도 없이 괴인의 주먹이 다시 명치에 꽂혔다.
퍽-
“으윽…….”
이번에 충격은 처음 것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온몸에 맥이 풀리고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꺼억… 꺼억…….”
입을 크게 벌리고 간신히 꺽꺽대며 숨을 조금씩 들이쉴 뿐이었다. 그리고 앞에 선 괴인의 옷자락을 스치듯 매만지며 서서히 허물어졌다.
‘이렇게 쓰러지면 안 되는데… 견딜 수가 없구나. 으음… 거지 노인은 어떻게 됐을까.’
거지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불쌍한 노인에게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옆으로 모로 누워 간신히 숨을 깔딱대던 표영은 흐릿해진 시선으로 괴인을 바라보았다. 그때 괴인이 옆으로 몸을 틀었다. 달빛을 그의 얼굴을 비춰주었다.
‘으으… 이럴 수가! 당신은…….’
도저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괴인의 정체는… 바로 낮에 보았던 그 미친 거지 노인이었던 것이다. 표영은 황당함에 파묻혀 아득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세상엔 믿을 놈이 없다’는 대대로 내려오는 진리를 생각하면서.
“형, 어서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누군가가 몸을 흔드는 것을 느리고 표영은 눈을 떴다.
“으어억……!”
표영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어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렸던 거지 노인이 다소곳이 앉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형, 왜 그래. 무서운 꿈 꾼 거야?”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말과 행동에 표영은 정말 자신이 꿈을 꾼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곧 꿈이 아님을 알았다. 어제 맞은 명치끝이 찌릇찌릇 아려왔기 때문이다.
“흥, 알고 보니 사람을 가지고 논 것이로군. 노인이 불쌍하게 보여 인정을 베푼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놀려도 되는 것이란 말인가! 난 가겠어.”
표영은 견왕봉을 빼 들었다. 혹시나 노인장이 기습적으로 공격해 올 것을 대비한 것이다.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보라고. 난 이제 간다. 흥, 어제 늑대에게 곤경을 당한 것도 사실은 모두 연극에 불과한 것이겠지?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버려진 노인네인 줄 알고 동정심을 품었으니… 내가 바보지.”
서서히 동굴을 빠져나가며 하는 말에 거지 노인은 두 손을 마구 저으며 따라 나왔다.
“아니야, 아니라고. 난 늑대가 정말 무서워. 형, 가지 마… 난 어떻게 살아가라고 그러는 거야. 왜 갑자기 그러는 거야. 어엉엉…….”
노인이 울든 말든 표영은 동굴을 벗어나자마자 있는 힘껏 달렸다. 괜히 잡히면 어제처럼 곤욕을 당할지도 모른다.
역시나 노인은 맹렬히 쫓아왔다. 하지만 노인의 목소리는 가슴을 울리는 울음소리로 범벅인 채었다.
“가지 마… 엉엉… 형, 가지 마…….”
“따라오지 말란 말이야! 저리 꺼지라고!”
한참 앞서 달리던 표영은 뒤돌아보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노인은 어린아이가 엄마를 부르듯 가슴 절절이 울부짖으며,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면서 계속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해진 표영은 정말 어제는 꿈을 꾼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제길, 어떻게 된 거야.’
도무지 꾸며낸 행동으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럼 어제 꿈을 꾼 것이었나? 내가 잠꼬대하다가 명치를 어딘가에 부딪친 게 분명해. 설마 저 노인네가 저렇게까지 하면서 날 속일 리가 있겠어? 그동안 혼자 외롭게 있다가 오랜만에 사람을 봐서 더 마음이 아픈가 봐. 그래, 어젠 꿈이었어, 꿈.’
표영은 자기의 마음에 최면을 걸었다. 꿈이야, 꿈.
미친 노인은 여전히 울면서 뛰어왔다.
“어엉… 형,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는데? 왜 갈려고 그래. 나 혼자 두고 떠나지 마. 무섭단 말이야. 가지 마. 알았지?”
표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왜 미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애절한 한(恨) 같은 것이 느껴진 것이다.
“알았어, 가지 않을게. 그러니 이제 그만 울어.”
다가온 노인의 등을 표영은 진정 동생을 대하듯 토닥거려 주었다.
‘오늘 밤이 되면 정확히 알 수 있겠지.’
다시 밤이 찾아왔다. 표영은 어떻게든 잠들지 않고 지켜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나 만성지체가 온전히 풀리지 않은 그가 잠을 이겨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표영이 얼마나 잤을까?
퍼억-
등판이 바스러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표영의 몸이 떼구르르 굴렀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할 정도로 충격은 컸다.
“그만 일어나는 게 어때?”
“누구냐?”
벌떡 일어나 등판을 어루만지며 발길질을 가한 놈을 찾았다.
“헉!”
표영의 동공이 크게 확대됐다. 혹시나 했었건만 역시나 였다. 발길질을 가한 이는 거지 노인이었던 것이다.
“노인장,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왜 그러는 거야 대체?!”
표영은 말하면서 동시에 얼른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아얏……?”
아팠다. 역시 꿈이 아닌 것이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도 이제 아무리 꿈이라고 믿어보려 해도 현실이 분명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이란 말인가. 자세히 보니 노인의 얼굴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은 낮에 보았을 때와는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눈은 타는 듯 이글거리고 얼굴은 두려움과 살기가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 노인이 낮게 말했다.
“너는 누구냐? 누가 보내서 온 거지? 나를 죽이려고 찾아온 것이렷다.”
어제와 비슷한 내용의 말이었다.
“이봐, 제발 좀 정신 차려. 나 모르겠어? 표영이라구. 우리 아까까지만 해도 시시덕거리며 재밌게 놀았잖아. 생각 안 나?”
“흐흐흐… 엉뚱한 소리로 노부의 마음을 바꾸어 볼 셈이냐. 이곳에 온 이상 그냥 보내줄 순 없지.”
“흥, 어제처럼 내가 당할 성 싶으냐.”
표영은 견왕봉을 빼 들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상대가 빠른지라 오늘은 공격하기 보다는 수비를 하면서 그 틈을 노릴 생각이었다. 거지 노인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손을 쭉 뻗었다. 얼른 견왕봉을 들어 가로막는데 노인의 손이 기이하게 꺾이며 표영의 목을 움켜쥐었다.
“캐액∼ 캑∼!”
어찌나 세게 누르는지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클클… 다시는 헛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노부의 무서움을 보여주마.”
거지 노인은 손을 뿌려 바닥으로 내동댕이친 후 밟아갔다.
퍼퍼퍼퍽- 퍽퍽-!
“으어어… 으악……!”
속수무책이었다. 맷집이 좋다고 자부하던 표영이었다. 사부에게 삼 일간을 맞으면서 버텼던 몸이며 개 이빨에 단련된 몸이지 않던가. 하지만 주먹과 발길질이 얼마나 강한지 뼈속까지 아려왔다.
퍼퍽- 퍼퍼퍼퍼퍽-!
“어거걱… 사람 살려……!”
표영은 지렁이가 소금에 절여져 요동치 듯 꿈틀거렸다. 얼마나 맞았을까. 거의 기절 직전까지 다다른 표영이 고함지르는 것도 포기한 채 맞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났다.
“으어억∼!”
희미한 눈으로 둘러보니 거지 노인이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쭈, 이젠 아주 별 희한한 짓을 다하는구먼.’
거지 노인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괴성을 지르다 철퍼덕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표영은 다행이다 싶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워낙에 돌출 행동이 많은지라 이것도 속임수가 아닐까 의심이 든 것이다. 하지만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날 때까지도 노인은 일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음… 저 노인이 왜 저렇게 된 거지. 어쨌든 여길 벗어나야 해. 계속 있다간 제 명에 못 살지… 끙.’
끙 소리를 내며 팔을 짚고 일어나 보려 하는데 아까 맞은 등골에서 통증이 한꺼번에 머리로 몰려왔다.
“이런… 으윽…….”
표영은 팔을 펴지 못하고 푹 고꾸라져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일어나기엔 너무나 많이 얻어맞은 것이다.
표영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그 앞에는 거지 노인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빌고 있는 중이었다.
“새벽에는 그렇게 두들겨 패놓고 이제 와서 기억이 안 난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난 모르는 일이야, 형. 화내지 마. 무서워.”
노인은 이제 급기야 몸을 부르르 떨면서 온갖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몰라∼”
표영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지금의 모습과 간밤의 모습은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거짓으로 꾸미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간밤에 보았던 그 흉악한 모습 또한 결코 억지로 꾸민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 노인이 미친 것만은 확실한 것 같은데 밤에는 왜 그리 난폭하게 변하는 것일까? 그것이 원래 모습일까? 아니야, 아마도 낮의 모습과 밤의 모습의 중간 정도가 정상이랄 수 있을 거야.’
표영은 밤에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던 일을 떠올렸다.
“누가 보내서 온 거지? 또 나를 죽이려고 찾아온 것이렷다.”
‘언제 누가 이 노인을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헛소리를 하는 것일까. 에잇, 모르겠다. 어쨌든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으니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하자. 이렇게 맞아놓고 왜 맞았는지도 모른 채 도망친다면 너무나 큰 손해지. 암, 근데 이거 매일 밤 얻어맞는다면 내 몸이 버텨낼 수 있을까.’
표영은 일단 마음을 정했다.
“좋아, 가지 않을 테니 어서 일어나.”
노인은 그 말에 온 세상을 다 얻은 사람처럼 기뻐하며 표영을 끌어안았다.
“형, 고마워.”
“휴우∼”
표영은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었고 그렇게 이틀의 시간은 흘러갔다.
그 후로 표영은 밤이면 얻어터지고 날이 새면 상황이 역전되어 꾸짖는 생활을 반복했다. 이젠 맞는 것도 이골이 났고 더불어 밤에 잠자는 것은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한 달 정도가 지나면서 표영은 기막힌 것을 발견했다. 얻어맞지 않을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그건 사실 아주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특이하게도 거지 노인은 포악하게 변하게 되면 절대로 동굴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건 마치 투명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아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빼내지 못했다.
표영으로서는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로부터 동굴 밖에서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고 거지 노인은 동굴 안에서 온갖 욕설을 퍼부어 대다가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욕을 듣는다는 것이 사람에게는 불면증에 시달릴 수 있는 것이겠으나 이제까지 고생해 가며 밤마다 시달린 표영에게는 그저 따사로운 자장가로 들려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