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8
귀환 마교관
658화(외전 31)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심장이 뛸 때마다 화살촉은 커다란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격심하게 흔들렸다.
단리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켜 줘야 한다. 지켜야 한다. 내가 약속했으니까. 나는 귀양의 신룡이니까. 나는 신궁의 아들이니까…!’
그렇게 수없이 자신에게 되뇌는 사이, 혈루검이 서늘한 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어이, 애송아. 네가 들고 있는 건 장난감이 아니란다. 아주 위험한 물건이야. 다치기 전에 고분고분 내려놓는 게 어떠냐?”
단리혁이 두려움에 찬 눈길로 옥류향을 보았다.
옥류향은 조금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나름의 용기를 낸 것인지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때.
“내 말이 안 들리느냐! 꼬맹아!”
혈루검이 버럭 소리쳤다.
그 박력에 단리혁이 흠칫거리는데, 마침 혈루검의 요혈이 순간적으로 드러났다.
‘쏴야 한다!’
찰나지간이었지만 단리혁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 순간이 아니면 영영 기회는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옥류향이 금방이라도 목숨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기적처럼 찾아온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 단리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기합성이 터져 나오면서 몸이 반응했다.
“으아아아아아!”
패애애앵!
시위를 떠난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화살이 날아가는 동안 억겁의 시간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단리혁은 보았다.
그 순간 혈루검이 입매를 말아 올리는 모습을.
그리고 깨달았다.
뭔가 잘못됐음을.
그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혈루검은 반사적으로 옥류향을 밀쳐냈고, 바람처럼 날아간 화살은 그녀의 가슴에 거침없이 틀어박혔다.
푸욱!
“컥!”
옥류향이 신음을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향, 향아!”
단리혁이 깜짝 놀라서 달려갔다.
가슴에 화살이 박힌 옥류향은 거의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다.
문득 웃음소리가 들렸다.
“크하하하! 멍청한 놈! 꼴좋구나! 그년은 네가 죽인 거다! 그러게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든 건 장난감이 아니라고. 위험한 물건은 조심히 다뤄야 하는 법이다. 알겠느냐? 하하하!”
“이익…!”
옥류향을 품에 안고 절규하던 단리혁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일어났다.
그는 눈이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죽여…버리겠어…!”
단리혁이 이번에는 거침없이 시위를 다시 잡아당겼다.
“흥! 화살도 없이 뭘 하겠다는 거냐? 애송아. 이젠 화살을 거는 것도 잊어버리….”
파아아아앙!
단리혁이 시위를 놓자, 궁기 수십 줄기가 마구 뒤엉키며 날아갔다.
쏴아아아아아!
“헉!”
촤촤촤촤촤촤촤악!
“크아아아악!”
한 차례 혈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혈루검이 눈을 퀭하게 뜬 채로 서 있었다.
“이건 뭔…?”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마치 도검에 난자당한 듯 그의 전신에 선혈이 마구 생겨나더니.
촤아아아아!
온몸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크윽! 쿠웨에엑!”
내상까지 입은 그가 그대로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철퍼덕 쓰러졌다.
그 소란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맙소사, 저건 뭐지?”
“엇! 단리 공자잖아?”
“이봐! 저길 좀 보라고! 저건 혈루검이야! 틀림없어!”
“맞다! 혈루검이다! 저 나쁜 놈이 왜 여기에?”
“설마 단리 공자가 저놈을 잡은 건가?”
“그런 모양이야. 가만, 저기 쓰러져 있는 소녀는 누구지?”
“엇? 저 소녀는 귀양일봉이잖아!”
“이런!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리며 떠들어댔다.
하지만 옥류향을 지키지 못한 단리혁의 귀에는 그저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 혈루검이 귀양일봉에게 몹쓸 짓을 하려는 걸 단리 공자가 막아 준 모양일세!”
“과연 그렇군! 그런데 가슴에 꽂힌 화살은….”
“이 사람아, 그것도 혈루검이 쏜 거겠지. 활은 뭐 단리 공자만 사용하는 물건인가?”
“하긴. 와아, 귀양의 신룡이 혈루검을 잡았다!”
“오오! 단리 공자 만세! 귀양신룡 만세!”
사람들이 칭송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옥류향의 가슴에 꽂힌 화살에 대해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역시 신궁의 아들이다!”
사람들의 칭송을 멍하니 듣고 있던 단리혁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돌아섰다.
“향아! 향아!”
그가 얼른 옥류향에게 달려가 그녀를 안고 흔들었다.
“향아! 어어… 대답 좀 해봐… 향아…!”
덜컥 겁이 났다.
지금까지는 반쯤 혼백이 나가 있었는데, 이제야 상황의 심각성이 현실적으로 와 닿았다.
단리혁이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아무라도 좀 도와주시오! 누가 좀 도와주시오!”
이쯤 되자 칭송하던 사람들도 걱정 서린 표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일봉의 상태가 심각한 모양이군.”
“그러게 말일세. 큰 부상이 아니어야 할 텐데.”
하지만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서지는 못했다.
의술에 문외한인 자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어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그래, 화살부터 뽑자.’
그가 막 화살대를 잡으려는데.
“멈춰라!”
문득 귀에 익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단리혁이 휙 돌아보니, 단리정이 심각한 표정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아버지를 보자 울컥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아, 아버지…!”
“이게 어찌 된 것이냐?”
“그것이… 그것이….”
단리혁이 어쩔 줄 모르며 중얼거리는 사이, 단리정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혈루검을 보았다.
혈루검은 비척거리면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단리정까지 나타나자, 곧바로 경공을 펼쳐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몇 걸음을 채 옮기기도 전에.
쉬이이이잇! 철컥!
한 줄기 빛이 지나치면서 그의 목을 그어버리고 말았다.
툭, 데굴데굴…!
츄아아아아!
머리를 잃은 혈루검이 그대로 쓰러지면서 육중한 소리가 났다.
그 자리에서 검을 갈무리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호법 성철이었다.
한편 단리정은 심각한 표정으로 옥류향을 내려다보았다.
상태가 위중해 보였다.
“지금 화살을 뽑으면 상처가 덧난다. 의원으로 데려가야겠다.”
말을 마친 그가 옥류향을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단리정이 그 자리를 떠난 후에도 단리혁은 한참이나 무릎을 꿇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를 칭송하던 사람들도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구르릉.
하늘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나직한 울음을 터뜨리더니 곧 비를 쏟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그렇게 얼마나 비를 맞으며 텅 빈 거리에 앉아 있었을까?
어느 순간 빗물이 닿지 않았다.
돌아서 고개를 드니, 설서린이 말없이 우산을 씌워 주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 아는 눈을 하고 계셨다.
어머니가 말했다.
“가자꾸나. 늦었다.”
“어머니…!”
결국 단리혁은 울음을 터뜨리며 설서린의 품에 안겼다.
**
“그렇게 나는 어머니 품에 안겨서 아이처럼 울었다. 내 울음소리는 빗소리에 묻혔고, 내 눈물은 빗물에 감춰졌지. 아마 어머니는 모든 걸 눈치 채고 계셨겠지만, 끝까지 모른 척을 하셨고.”
단리혁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들려왔다.
사비란은 옥류향이 그 후로 어찌 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궁금했지만 굳이 단리혁의 아픈 부분을 헤집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그런데 단리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지금 멸마궁에서 진백 당주님께 치료를 받는 중이지. 완치가 된다고 해도… 앞으로는 평생 무공을 사용할 수 없다더군.”
“……!”
“귀양의 일봉이었는데 말이야. 아니, 그녀의 발검술이었다면 강호일봉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런데… 내가 날린 화살이 그녀의 꿈도 날려 버린 거지. 나는 그날 그녀의 꿈을 시위에 걸어 날려 버린 거야.”
“…….”
사비란은 말이 없었다.
그녀는 담담히 듣기만 했다.
지금은 뭔가 말을 건네야 할 때가 아님을 알았다.
이제 동녘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단리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아버지는 그날 이후로 내게 호위를 붙이셨지. 아마 아버지는 나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려고 그랬을 거야. 하지만 나는 다르게 받아들였어. 나를 지키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나를 감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그때부터 나는 성철 호법과 술래잡기를 벌였어. 나는 끝까지 도망치고, 성철 호법은 끝까지 나를 찾아다녔고.”
단리혁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웃긴 건 뭔지 알아?”
“……?”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영웅으로 칭송하더란 거야. 내가 혈루검을 사로잡고 귀양일봉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라며. 신궁의 아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며.”
그랬다.
오히려 그의 명성은 전보다 더 높아졌다.
차라리 욕을 하길 바랐다.
알고 보니 별 것 아니었다며 무시하길 바랐다.
그게 아니면, 아버지가 나서서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길 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언제나 대쪽 같은 아버지였다.
그런데도 자식이 거짓된 명예를 얻는 것을 보고도 전혀 나설 기색이 없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어. 타인의 시선이 그렇게 부담스러운 건 처음이었지. 단지 그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단리혁이 손에 들린 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궁이 정말… 싫어.”
이야기가 끝났다.
두 사람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동녘에서 떠오른 해가 두 사람의 그림자를 부지런히 줄여 갔다.
사비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해서도 아니었고, 가슴이 답답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단리혁과 교감하는 중이었기에.
그렇게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을까?
마침내 사비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단리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네. 궁을 들 수밖에 없겠어.”
단리혁이 미간을 슬쩍 찌푸리고는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내 말을 듣긴 한 거야?”
“들었지. 네가 두 사람을 구한 이야기를.”
“뭐? 내가 분명….”
“그날 넌 몹쓸 짓을 당하고 죽을 수도 있었던 생명을 구했고, 오늘 넌 우리의 소중한 동료를 구했지.”
“……!”
“무슨 말이 더 필요해? 이번 임무를 맡은 백화단주로서 명령이야.”
사비란이 진중한 표정으로 단리혁을 보았다.
“단리혁. 궁을 들어.”
단리혁은 말을 마치고 휙 돌아서 걷는 사비란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문득 사비란이 멈춰 서면서 힐끔 돌아보았다.
“아, 혹시 옥류향이라는 그 친구는 그 후로 만나 본 적 있어?”
“아니.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사비란이 어깨를 으쓱였다.
“거봐. 그게 문제네. 가끔은 도망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 봐. 그럼 보이지 않던 진실도 보게 되겠지. 만약 그녀가 널 원망한다고 해도, 그걸 피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잖아. 그리고….”
잠깐 생각에 잠긴 사비란이 곧 말을 이었다.
“단리 사부님이 사람들에게 나서서 설명하지 않으셨던 이유… 아마 그 모든 게 네 문제였기 때문이 아닐까?”
“……!”
“적어도 내가 아는 단리 사부님이시라면, 그런 걸로 대신 나서실 분이 아니거든.”
말을 마친 사비란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홀로 남은 단리혁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날은 완전히 밝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