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9
귀환 마교관
659화(외전 32)
어두컴컴한 밀실.
만신창이가 된 엄철이 금속 의자에 묶인 채 거친 호흡을 몰아쉬고 있었다.
일렁이는 횃불에 비친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아직까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
헝클어진 채로 피에 젖은 머리카락, 퉁퉁 부어오른 눈두덩, 뭉개진 코에 찢어진 입술, 거기에 몸 여기저기에는 베이고 데인 상처가 수두룩했다.
엄철 앞에는 뜨겁게 달궈진 인두를 든 고문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내둘렀다.
“진짜 지독한 놈입니다. 이렇게 끈질긴 놈은 처음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옆에 선 홍염이 대수롭지 않은 듯 턱수염을 슬쩍 쓸었다.
“뭐, 때론 이렇게 지조 있는 녀석도 있어야지. 수고했다. 나가 봐라.”
“단주님이 직접 하실 생각입니까?”
“아니. 궁주님이 이 녀석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
“아….”
고문관이 흠칫거리고는 엄철을 돌아보았다.
눈이 퉁퉁 부어오른 엄철은 그런 고문관을 마주보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이가 빠져 듬성듬성했지만, 그건 분명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엄철이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킬킬… 그러니까… 안 된다고 했잖아… 너희들만… 힘들 뿐이야… 킬킬킬.”
그가 이렇게 자신만만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무공 덕분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철을 보는 고문관의 표정은 어딘지 좀 달랐다.
지금까지는 약이 올라서 씨근거리는 표정이었다면, 이제 그가 짓는 표정은 뭔가 안쓰러움을 담았달까?
마치 곧 사라질 희생양을 보는 듯 불쌍하게 보는 시선이 담겨 있었다.
고문관이 한숨을 내쉬고는 혀를 찼다.
“에휴, 쯧… 그러게 진작 협조를 하면 좋았을 것을.”
그의 반응에 엄철은 모종의 불안을 느꼈지만, 마지막까지 객기를 부렸다.
“흥! 누가 오든… 내 입을 열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림도 없….”
“그 모습. 꼭 유지하길 바란다.”
홍염이 불쑥 나서며 말을 가로질렀다.
그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엄철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알았지? 제발 그런 모습 계속 유지해 주길 바란다. 나도 정말 보고 싶다. 궁주님의 그 고문을 열 단계까지 버텨내는 놈을 한 번이라도 보고 죽는 게 내 소원이다.”
“뭔 개소리를…!”
“예전에 마령교라고 알지? 그때 동면이었던가? 아무튼 그런 녀석이 궁주님의 고문 따위는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호언장담했지. 그런데 결국 삼 단계를 넘기지 못했거든. 난 사실 그 녀석에게 기대를 좀 했는데. 그러니 너만은 꼭 버텨내라. 알았지? 제발 힘내자!”
“뭐 이런 미친….”
그때였다.
끼이익…!
듣기 싫은 마찰음과 함께 철문이 열리면서 한 사내가 들어섰다.
엄철은 그의 존재감만으로도 상대가 멸마궁주 사비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홍염이 돌아서며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오셨습니까? 궁주님.”
“이 녀석인가?”
사비강이 엄철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예, 놈들을 이끌던 녀석입니다.”
“이 녀석이 내 딸에게 칼을 휘둘렀단 말이지?”
“예, 칼끝은 스치지도 못했습니다만.”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중요한 건 이 녀석이 내 딸에게 칼을 겨눴다는 사실이지.”
사비강의 전신에서 한기가 우러나왔다.
엄철은 절로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분위기를 감지한 홍염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천천히 즐기십시오.”
“즐기라니. 그러니까 내가 꼭 악마 같잖아. 흐흐흐.”
‘지금 그 모습이 딱 악마 같다고요.’
물론 그 생각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대신 그는 꾸벅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철문을 열고 나섰다.
왜일까?
그가 나가는 순간, 엄철은 나가지 말아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선 사비강의 기세에 눌려 꿈쩍도 하지 못했다.
반듯하게 생긴 중년의 사내.
고문이라는 끔찍한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런데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공포심이 든다.
‘이자는 대체….’
사비강이 가까이 다가가서는 히죽 웃었다.
“일흔두 단계.”
“예? 아니, 뭐?”
무심결에 존댓말이 나와서 얼른 고쳤다.
사비강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이걸 설명하게 되는군. 마계에서 고문을 할 때 사용하는 기술 말이다. 그게 총 일흔두 단계지. 그 중에서 인간은 열 단계까지 버틴다고 하더군. 아직 나는 못 봤다. 어쨌거나 열 단계를 넘은 자는 없다더군.”
“흥! 그, 그딴 헛소리에 내가 쫄 것 같은….”
“그렇지. 역시 그렇게 나와야지. 그런 반응도 오랜만이다. 어쨌든 설명을 계속하자면, 하급 마족의 경우에는 스무 단계까지 버틴다고 하더군. 그리고 중급은 서른 단계, 상급은 마흔 단계, 최상급은 쉰 단계다.”
“개소리도 작작….”
“좋아, 좋아. 그런 기세라면 기대해보겠다. 참고로 마왕조차도 일흔두 단계를 모두 버티지 못한다더군. 진실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니 힘내라. 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 마침 네가 그렇게 독하다고 하니, 이왕이면 마지막… 아니, 열 단계까지는 꼭 버텨 주길 바란다.”
“웃, 웃기지 마라! 나는 이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공을 익힌….”
“그럼 시작한다.”
사비강이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뭔 사람 눈이…!’
엄철은 숨도 쉬지 않았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공포심이 엄습해왔다.
마침내 사비강이 그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자, 그럼 첫 단계다.”
“잠, 잠깐…!”
“왜?”
“후읍, 후읍! 좋, 좋다. 이제 됐다! 와라!”
“준비 됐나?”
“그래, 와라!”
엄철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자신은 고통을 느끼지 않을 진데.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미친 듯이 긴장이 됐다.
“이런 식으로 해보는 건 또 처음이군. 그럼….”
잠시 후.
“끄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밀실 가득 차올랐다.
**
등등등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그는 코앞에서 자신을 요리조리 뜯어보고 살피는 단리혁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까지… 그럴 거요? 심히 불편하오만.”
단리혁이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 미안 미안. 근데 봐도 봐도 신기해서 말이지. 너 지금 화장한 거지? 얼굴이 완전 하얗게 뜬 거 알고 있어? 마치 보름달처럼 말이야. 남자가 왜 분칠을 한 거야? 눈썹도 그렸네. 어? 이것 봐. 여기 광대에 박힌 점도 가짜였어. 대박!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이러고 다니는 거야? 아, 정말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그러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줘.”
하지만 등등등은 이미 충분히 기분이 나쁜 듯했다.
사실 등등등의 외모는 단리혁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호기심을 가질 만한 모습이긴 했다.
온갖 원색으로 휘황찬란한 장삼을 입은 데다 얼굴은 화장이 짙었고, 머리에는 화려한 투구가 씌워져 있었다.
게다가 그가 들고 있는 장창은 금빛으로 번쩍였는데, 청룡과 주작, 봉황이 서로 뒤엉키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백호가 솟아오르듯 아가리를 벌렸고, 그 아가리에서 창날이 길게 튀어나온 모습이었다.
오죽하면 단리혁이 그 창을 처음 보고 든 생각이 ‘저 창으로 시선을 잡아끌고 기습하기 위해서인가?’ 하는 생각을 할 정도일까?
“이 옷은 만든 거야? 직접 산 거야? 이런 옷을 파는 곳이 있긴 있어? 만든 거면 직접 만든 거야? 혹시 자수가 취미니?”
끝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등등등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는 진작부터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는 중이었다.
손님을 잘 마중하라는 관주님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벌써 창부림이 일어났으리라.
역시 이런 관심은 늘 겪어도 적응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사비란이 나섰다.
“그만 좀 해. 실례잖아.”
“실례인가? 그런데 이 정도로 하고 다닐 정도면 오히려 좋아할 것 같은데. 관종일 테니까 당연히 이 정도 반응은 예상할 거고.”
등등등이 단리혁을 힐끔 보며 물었다.
“관종…? 그게 뭐요?”
“관심 받고 싶어서 환장한 종자.”
“뭐, 뭐요? 난 그런 종자가 아니오!”
등등등이 결국 폭발하면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가 울분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나라고…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줄 아시오? 내가 얼마나 이 치욕을…!”
이제 등등등은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그가 거의 울먹이는 수준이 되어 말을 이어 가려는데, 마침 그의 등 뒤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하시지. 초면에 실례군.”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깔끔한 흑의가 잘 어울리는 청년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 저 사람은….’
사비란은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오래전 그를 만나 본 적이 있었기에.
적무린과 서래향의 아들.
적비(翟飛)였다.
그는 부모님의 재능을 잘 이어 받아 독공과 검술의 조화를 이룬 자였다.
벌써 별호까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신묘독검(神妙毒劍)’이라고 불렀다.
적비가 단리혁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가정교육을 못 받은 건가? 기본적인 예의가 없군.”
“흐음.”
단리혁이 침음을 흘리고는 등등등과 적비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친구인가? 그래도 친구는 멀쩡한 편이네.”
“그만 하시오! 나는 그저 아버지 때문에 이런 꼴을 하고 있을 뿐… 내가 원한 게 아니란 말이오! 그저 아버지의 원을 들어드리기 위한 것일 뿐….”
말을 꺼내던 등등등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런 말을 한들 남이 이해나 하겠는가?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타인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을 터.
마침 지켜만 보던 등가휘도 나서서 말렸다.
“그래. 그만해라. 도가 지나쳤다.”
하지만 단리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버지 때문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아버지가 이렇게 하고 다니길 원한다는 건가?”
“그, 그렇소.”
“왜?”
등등등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까지 말하고 싶진 않소.”
“뭐,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아…!”
순간 단리혁이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등가휘와 등등등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결국 해서는 안 될 말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등 씨네. 등 씨들 아버지는 다 특이점이 있나 보구나.”
마침내 등등등과 등가휘가 동시에 폭발하고 말았다.
“이익, 도저히 못 참겠군! 아버지를 모욕하다니!”
“죽어라, 이놈아!”
쒸아앙! 쑤아아앙!
등등등의 창이 허공을 갈랐고, 등가휘의 검이 단리혁의 그림자를 베었다.
“우아앗! 다들 진정 좀 하자고!”
단리혁이 연신 경공을 펼쳐 가며 창검을 피했다.
사비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미안해요.”
“내게 사과할 일은 아니오.”
적비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