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656화 (656/670)

# 656

귀환 마교관

656화(외전 29)

화살촉이 사시나무 떨 듯 심하게 흔들렸다.

활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사람은 어린 시절의 단리혁이었다.

단리혁은 목석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랬다.

멀리서 대충 보면, 그는 굳어 버린 듯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서 자세히 보면 그가 몹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음이 중심을 잡지 못했다.

“혁, 혁아…!”

앳된 소녀가 한쪽 손을 뻗은 채 애처로운 표정으로 단리혁을 불렀다.

꿀꺽…!

잔뜩 긴장한 단리혁이 마른 침을 삼켰다.

여전히 화살촉이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예상치 못했다.

옥류향(玉柳香)이 혈루검(血淚劍)에게 사로잡힐 줄은.

물론, 상대는 무공을 익힌 성인이다.

그것도 목에 현상금이 붙은 악인이다.

하지만 자신과 옥류향은 일성궁문의 수제자였다.

아직 어리다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후기지수였다.

저잣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을 칭송했다.

단리혁은 아버지를 닮아서 강호제일신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했고, 옥류향은 총명한데다 발검이 좋아서 강호제일발검이 될 거라고 했다.

그런 찬사만 받으며 자란 탓일까?

이제 열여섯에 불과한 나이였지만, 강호가 만만하게 보인 것도 사실이었다.

모두가 우러러보니 기고만장했다는 표현이 딱 맞으리라.

그래, 겁이 없었다.

언젠가 단리혁은 옥류향에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네가 위기에 빠지면 반드시 내가 구해 줄게.”

“와, 든든한데? 강호에서 두 번째로 잘 나가는 궁사가 내 호위를 해준다니!”

옥류향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첫 번째로 잘 나가는 궁사는 당연히 아버지 단리정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녀는 웃는 얼굴도 귀엽고 예뻤다.

발검술 하나만 놓고 본다면, 그녀는 적어도 귀양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일성궁문은 전대 문주가 이뤄 놓은 가업 덕분에 발검과 궁술을 주로 가르쳤는데, 문 내에서도 그녀의 발검술을 따라갈 자는 드물었다.

사실, 단리추가 내공을 완전히 잃은 후에는 발검술이 거의 실전될 위기였지만, 유일하게 옥류향이 그 맥을 잇는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단리정은 특히 옥류향을 아꼈다.

그의 내심에는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온 발검술이 이대로 실전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단리혁과 옥류향은 문 내에서 그런 위치였다.

그리고 귀양에서도 이 두 사람을 모르는 자들이 없었다.

강호를 구한 영웅, 천멸대주 단리정의 제자들.

그 이름값만으로도 충분히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귀양의 외진 객점에서 두 사람은 혈루검을 만났다.

죽립을 깊이 눌러 쓰고 누더기 옷을 걸친 사내는 틀림없이 혈루검이었다.

그의 용모파기가 귀양 곳곳에 내걸려 있었다.

아녀자들을 겁간하고, 아이들마저 잔인하게 죽인 죄인이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워낙 얼굴이 지저분했고, 행색이 남루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용모파기에서는 위풍당당하고 눈빛이 부리부리했으니까.

하지만 눈썰미가 남다른 단리혁은 그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때부터 가슴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귀양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강호 영웅인데, 자신이 그 맥을 잇는 공을 세운다면 얼마나 명성을 높일 수 있을까?

아마 아버지는 자신을 칭찬할 것이고, 사람들은 더욱 찬사를 보내리라.

게다가 지금은 옥류향도 함께 있었다.

적어도 귀양에서는 ‘신룡일봉(神龍一鳳)’이라 불리는 자신들이지 않은가?

객점에서 국수를 사먹던 두 사람은 혈루검이 자리를 뜨는 것을 보고 천천히 미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인적이 드문 곳으로 접어들 때를 기다렸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받기에는 번화가가 좋겠지만, 혹여나 애꿎은 사람들이 휩쓸리게 되면 아버지가 달갑지 않게 여기실 터였다.

어차피 그를 사로잡거나 수급이라도 챙겨 가면 관아에서는 현상금을 내어 주고 입소문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혈루검의 뒤를 밟다가 막 인적이 드문 곳에 다다랐을 때였다.

단리혁과 옥류향은 기세 좋게 그의 앞을 막아섰다.

기습 따위는 없었다.

명문 정파 출신인 두 사람이었다.

비겁한 방법보다는 정당한 방법을 택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도 이길 수 있다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기에.

어쩌면 자신들이 누군지 이름만 듣고도 혈루검이 순순히 항복을 해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은 귀양의 신룡일봉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모든 예측이 빗나가고 말았다.

혈루검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을 보며 웃어보였고, 그 사악한 웃음을 마주한 순간 단리혁과 옥류향은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싸우기 전에는 ‘기세’라는 것이 있기 마련.

그 기세에서 두 사람은 단숨에 눌리고 말았다.

딱히 기도를 드러내서도 아니었다.

그건 그저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혈루검은 검기를 길게 끌면서 순식간에 옥류향에게 달려들었고, 단리정은 반사적으로 물러나며 활을 뽑아 들었다.

옥류향은 그녀의 특기인 발검을 구사했다.

하지만.

퍽, 철컥!

눈 깜빡할 사이에 코앞까지 다다른 혈루검이 발로 그대로 옥류향의 손잡이를 차 넣었다.

검집에서 검을 뽑아 내지 못한 옥류향이 당황하는 사이.

슈컥!

“아악!”

옥류향이 비명을 내지르며 왼팔을 쥐고는 물러났다.

왼팔이 길게 찢어져 피가 잔뜩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황한 단리혁이 얼른 시위를 놓았다.

패애앵!

허공을 가로지른 화살은 그대로 혈루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혈루검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단리혁을 보고는 예의 그 섬뜩한 미소를 씨익 그려 보이더니.

탁탁탁!

빠르게 옥류향의 몸을 점혈했다.

그러고는 팽이처럼 그녀의 몸을 회전시켜서 단리혁을 정면으로 보도록 앞세웠다.

척!

혈루검의 붉은 빛 검신이 옥류향의 목을 겨눴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단리혁은 시위를 잡아당긴 채 꿈쩍도 하지 못했고, 옥류향은 인질로 붙들린 채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자만했다.

부모님의 명성을 등에 업으니 온 세상이 만만하게 보였던 것이다.

부모의 위대함이 나의 위대함과는 다르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찬사가 결국 부모님을 향한 것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신룡일봉?

웃기는 소리.

기껏해야 현상금이 걸린 악인 한 명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는 주제가 아닌가?

절망감이 온 몸을 휘어 감았다.

두근두근…!

부들부들…!

심장은 뛰고 손끝은 흔들렸다.

혈루검이 옥류향의 목덜미를 끈적하게 핥았다.

“계집아이는 내 취향이 아닌데. 그래도 이렇게 ‘잡아 잡수세요.’ 하고 오면 거부할 수가 없잖아? 킬킬.”

옥류향은 치욕으로 치를 떨었다.

태어나서 처음 당하는 도발.

단리혁의 심리가 요동쳤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궁술은 심리가 칠이요, 기운이 삼이다.

심칠기삼(心七氣三).

그렇다. 기술의 ‘기’가 아니다.

기세와 기운이다.

한데 이미 기세가 꺾였고, 기운이 꺾였다.

심리가 꺾인 건 말할 것도 없다.

표적에 혼을 두고 있을 리가 없다.

그동안 연습하고 훈련했던 것은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진 지 오래였다.

빼애액…

단리혁이 손에 힘을 주어 시위를 더욱 당기자.

“쉬쉬. 성급하다고, 어린 친구. 그러다간 이 아이를 다음 생에서나 만나야 할 거야. 뭐, 별로 미련이 없는 아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스윽.

날카롭게 별러진 검신이 목에 닿자, 가느다란 선혈이 옥류향의 여린 살결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 단리혁은 심장이 터질 듯했다.

‘지켜 준다고 호언장담했는데… 내가 지켜 준다고…!’

그는 연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을 떠올려 보았다.

“혁아, 궁사에게 가장 자주 일어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인질극이다. 왜인지 아느냐?”

“왜죠?”

“궁사는 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싸우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아군이 사로잡혔을 때의 상황과 대척할 경우가 많지.”

“그럼,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해요?”

“우선은 침착해야 한다. 한 호흡 느리게 생각해라. 적은 인질을 쉽게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라. 조급함을 버리는 게 우선이다. 그 다음에는 단 한 번으로 모든 상황을 끝내려고 하지 마라. 기회를 만든다고 생각해라. 검을 쓰는 자는 인질을 구할 기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지만, 궁사는 다르다.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요혈을 노리고 쏘면 될까요?”

“아니지. 인질을 전면에 내세운 적의 요혈을 노리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단 한 번으로 이기려고 하지 마라. 어디까지나 기회를 만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 기회를 어떻게 만들어요?”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의 손목을 노리는 것이다. 대게의 적들은 무기를 쥔 손이 전면에 드러난다.”

“손을 인질의 등 뒤에 둘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만, 대체로는 인질을 구속하기 위해서 뒤에서 끌어안듯이 손을 앞으로 내세우게 된다. 이를 테면 목에 검을 가져다 댄다든지. 이 또한 인질극을 벌이는 자들의 심리 상태인 거지.”

“아….”

“그러니 명심해라. 손목을 노리고 기회를 만들어라. 명중하지 않아도 된다. 상대가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움직임을 이어 가도록 만들어라. 그리고 끝을 보는 건 그 다음이다.”

“그 다음….”

“그 다음….”

단리혁은 나직이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심칠기삼!

그의 심리가 조금씩 안정되고 있었다.

기운도 조금씩 정돈되고 있었다.

흔들리던 나뭇가지 끝이 점차 고정되어 갔다.

그 나뭇가지 끝에는 인질로 잡힌 옹수령과 복면인이 있었다.

옹수령이 다부진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상관 말고 쏘세요.”

그녀의 표정이 워낙 단호했기에 오히려 단리혁의 마음을 잡아 주는 듯했다.

복면인 엄철이 단리혁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기어이 도박을 해보시겠다? 내가 너무 만만하게 보였나보군.”

다시 한 번 그의 검신이 옹수령의 목에 바짝 다가갔다.

피가 더욱 흘러내렸다.

백화단은 흠칫거리면서도 꿈쩍도 하지 못했다.

사비란 역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가 단리혁을 힐끔 돌아보았다.

여기서는 단리혁이 해주어야 한다.

자신이 아무리 빨라도 화살보다 빠를 수는 없다.

전음을 보내진 않았다.

지금은 그저 믿어야 한다.

단리혁의 눈빛에 떠올랐던 모종의 두려움은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다.

그가 주워든 나뭇가지는 정말이지 어지간한 화살보다 더욱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화살에 궁기가 입혀졌기 때문이다.

엄철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버럭 소리쳤다.

“뭘 망설이는가! 정녕 이년이 죽는 꼴을 보고 싶다는 건가!”

그 순간, 단리혁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가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정말… 궁이 싫어.”

마침내 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을 때.

패애애앵!

화살처럼 날카로운 기를 머금은 나뭇가지가 시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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