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654화 (654/670)

# 654

귀환 마교관

654화(외전 27)

찌르륵. 찌르륵.

풀벌레 우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단리혁은 바위에 앉아서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만치 백화단이 머무는 객점이 보였다.

이제 내일이면 천신무관에 도착할 터였다.

‘그곳에 가면… 아버지의 옛 동료들이 잔뜩 있겠군.’

보나마나 자신을 보면 친한 척 말을 걸어 오리라.

그리고 궁술을 보여 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무림제일신궁 단리정의 아들이니, 그 솜씨가 특별하리라 생각할 테지.

“하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뿜어지듯 나왔다.

고개를 꺾어 드니 초승달이 단리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완만하게 굽은 모양이 활과 꼭 닮았다.

“칫, 기분 나쁘게 닮았네.”

단리혁이 혀를 차고는 뒤통수에 깍지를 끼더니 벌러덩 누웠다.

마침 초승달을 지나면서 별똥별이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이 꼭 시위를 떠난 화살을 보는 듯했다.

하늘이 그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보아라. 너는 활을 잡아야 한다. 그것이 네 운명이다. 그러니 거부하지 마라.’

하지만 단리혁은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난 활을 쥐지 않을 거요!’

그렇게 한참 동안 돌아누워 있던 그가 천천히 눈을 뜨고는 자신의 오른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검지와 중지의 끝마디가 굳은살이 박힌 듯 딱딱했다.

활을 놓은 지 벌써 수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그곳만은 남들과 다른 감촉이었다.

‘오랜만이었지… 그 느낌….’

며칠 전 그는 정말 오랜만에 활을 쏘아 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그토록 거부했던 활이었는데, 그 순간의 기분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화살에 혼을 실어라.”

아버지는 늘 입이 닳도록 말씀하시곤 했다.

시위를 놓는 순간,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것은 단지 화살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나 자신을 어딘가로 쏘아 보내는 것인 만큼 신중하고 확실해야 한다고.

그래서일까?

화살이 숲속을 가로지르면서 날아가던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그렇게 날아가는 듯했다.

그리고 그 화살이 연우경과 석탄강의 손에 잡혔을 때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묘한 기분이었다.

그들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그들의 손에 어렵지 않게 잡혔다는 것이 분하기도 한.

오른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그래,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자신은 활을 잡지 않을 텐데.

단리혁이 밤하늘에 뜬 초승달을 보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난 안 쥘 거요.”

“뭘?”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단리혁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돌아섰다.

그제야 그는 사비란이 바위 뒤에 다가와 있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뭐야? 깜짝 놀랐잖아.”

“왜? 귀신이라도 나올까 봐?”

“귀신은 무슨….”

단리혁이 실없는 농담을 받아넘기면서 내심 고개를 저었다.

‘뭔 사람이 기척도 없이 나타나는 거지?’

궁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다른 누구보다도 기감이 예민하기 마련이다.

언제나 먼 거리의 적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단리혁은 궁을 잡지 않은지 꽤 되긴 했지만, 그래도 일반 무인에 비하면 기감이 월등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한데도 사비란의 기척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그런 속내를 눈치 채기라도 한 건지 사비란이 핀잔을 주었다.

“그러게 왜 궁술을 게을리 한 거야? 그렇게 훌륭한 아버지를 두고서.”

“남의 사정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지.”

“글쎄, 함부로 말한 것 같진 않은데.”

“커험, 어쨌거나 내 덕에 그분들을 화해시켰잖아?”

“그러기엔 기여도가 좀 미미하긴 하지.”

“와아, 우리 백화단주님 뒷간에 갈 때와 나올 때가 이렇게 다른 사람이었나?”

“그게 같은 사람도 있어?”

“어쨌든 내 궁술이 도움은 됐잖아!”

“그래, 인정할게. 그런 의미에서 자, 받아.”

사비란이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보통의 활보다는 조금 큰 대궁이었다.

단리혁이 뭐냐는 듯 바라보자, 사비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말했지? 난 뛰어난 궁사가 필요하다고. 마족대전에서 지대한 공을 세우신 네 아버지처럼.”

“그래서 나한테 이걸 쓰라고?”

“그래. 폭렬궁만큼 대단한 건 아니지만, 급하게 구한 것치고는 나름 쓸 만할 거야.”

“허어, 과연 멸마궁주님의 따님이시다, 이건가?”

“그게 무슨 뜻이지?”

사비란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바라보자, 단리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 궁. 혈천뇌궁(血天雷弓)이잖아.”

만약 누군가 이 이름을 들었다면, 입을 딱 벌리고 다물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사비란은 별로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그래서?’ 하는 표정으로 단리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단리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혈천뇌궁은 마족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무림 오대 기보였을 텐데.”

“맞아.”

“그런데 그걸 마치 오다 주웠다는 식으로 말하다니. 있는 집 자식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그럼, 안 돼?”

사비란의 말에 단리혁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그가 짐짓 근엄한 척 말했다.

“그래도 말이야, 사람이 좀 겸손하고….”

“내가 교만하게 군 적 있었나?”

“끄음. 그건 아니지만.”

“물론 부모님 덕을 보고 사는 내가 그러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핍박한다면 문제가 되겠지. 하지만 그 사실에 감사하고 십분 활용하는 건 다른 문제 아닌가?”

“뭐… 그렇긴 하다만….”

“이상한 부분에 얽매이지 마. 단리 사부님이 천멸대주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네가 숨 막히는 삶을 살아간다? 다 배부른 소리고, 핑계일 뿐이지. 사람들이 기대하는 시선 때문에 숨 막혀서 일탈을 일삼는다? 그것이야말로 타고난 놈의 교만한 언행이 아닐까?”

“그런 이유만은 아니다.”

어느새 단리혁의 표정이 제법 진중해져 있었다.

사비란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이제 너도 네 인생을 책임질 나이가 되었잖아? 더 이상 환경 탓은 그만할 때가 됐어. 자, 받아. 적어도 백화단과 함께 가겠다면 너는 활을 써야 해.”

단리혁이 주춤거리자, 사비란이 미간을 슬쩍 좁혔다.

“뭐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바쁜 몸이야.”

그제야 단리혁이 말없이 활을 받아들었다.

사비란이 몸을 돌리고는 말했다.

“내일이면 천신무관에 도착할 거야. 그곳에는 너처럼 온갖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도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많은 친구들이 있어. 그들은 어떤 인생을 살아가는지 한 번 봐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머릿속이 복잡하면 계곡에서 찬물에 목욕이라도 하던가?”

사비란이 그렇게 걸어가 버리자, 단리혁은 싸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홀로 서 있었다.

“쳇, 뭘 안다고….”

그가 시큰둥하게 중얼거리고는 숲속을 향해 하릴없이 걸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그냥 걷고 또 걸었다.

문득 이대로 걸어서 집까지 돌아가 버릴까도 생각했다.

갑자기 모든 게 부질없고 지겨워졌다.

강호의 위기?

알 게 뭔가?

중원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강호에 피바람이 불든, 혈겁이 일어나든 신경도 쓰지 않는다.

마족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런 일이 있었던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냥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면 될 일이 아닌가?

위기가 나타나면 언제나처럼 누군가 나타나서 희생하거나 구하겠지.

‘왜 그 희생을 내가 해야 하는 거지? 왜 그 누군가를 구하는 게 내가 되어야 하지? 그러다가 잘못되면? 모든 게 내 책임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역시 생각해 볼수록 부질없는 짓이다.

그렇게 머릿속이 복잡해진 단리혁은 정처 없이 걷다가 문득 기척을 느끼고는 걸음을 멈췄다.

수풀 너머로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거기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가 정말 목욕이라도 하는 건가?’

순간 사비란의 모습을 떠올린 단리혁이 어딘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수풀을 헤집으며 휘적휘적 걸어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계곡가 바위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한데 사비란은 아니었다.

“옹수령…?”

그녀를 알아본 단리혁이 피식 웃었다.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여기도 있었군.”

옹수령을 향해 다가가려던 그는 어느 순간 다시 흠칫거리고는 수풀 사이에 얼른 몸을 숨겼다.

마침 맞은편 수풀에서 뭔가 묘한 움직임이 느껴진 것이다.

옹수령은 아직 그 기척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여전히 흐르는 물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따금씩 물을 보며 뭐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이 이 모습을 본다면 필시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단리혁은 그녀가 물의 정령을 다스린다는 걸 알기에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저것들은 뭐지?’

처음에는 백화단 무인들인 줄 알았다.

한데 미미한 적의가 느껴진다.

단리혁은 저도 모르게 천천히 혈천뇌궁을 왼손으로 그러쥐었다.

오래된 습관처럼 어깨너머로 오른손을 가져가던 그는 등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화살통이 없다.

‘쳇…!’

그가 나직이 혀를 차고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맞은편의 기척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보다 못한 단리혁이 막 수풀을 헤집고 나서려는데.

[아직 움직이지 마.]

그의 귓가에 사비란의 전음이 닿았다.

그가 움찔거리고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은신술이 귀신같군.’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도 알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여러 명의 사부를 두지 않았던가?

은신술의 귀재였던 ‘흑귀’라는 선배에게서도 분명 뭔가를 배웠으리라.

비록 지금은 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지만,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가능할 테니까.

‘그나저나 설마 이것도…?’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사비란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찌가 흔들린다고 너무 빨리 낚아채면 물고기가 놀라서 도망가지. 때를 기다리자고.]

[설마 아까 바쁘다고 한 건….]

[그래, 맞아. 송백현을 떠나올 때부터 꼬리가 붙은 걸 느꼈거든. 그리고 놈들의 목적이 뭔지도 대충 파악했지.]

[그럼 역시….]

[그래, 옹수령이 가진 마공석.]

[잠깐. 그럼 나보고 찬물로 목욕이라도 하라는 건 설마 이런 식으로 써먹으려고….]

[쉿. 온다!]

사비란의 전음에 단리혁이 입을 다물고는 기척을 최대한 숨겼다.

그녀의 말대로 수풀 반대편에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마침내.

타다다다닷!

맞은편 수풀 사이에서 십여 명의 복면인들이 한꺼번에 튀어 나왔다.

사비란이 전음으로 외쳤다.

[지금!]

밑도 끝도 없는 전음이었지만, 단리혁은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화살이 없다는 건 사비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화살이 없을 때는 어찌 해야 하는지 역시 사비란은 알고 있으리라.

그녀 역시 아버지로부터 궁술을 배웠을 테니.

파앗!

단리혁이 반사적으로 수풀에서 튀어 나갔다.

“엎드렷!”

그가 소리치자, 옹수령이 기다렸다는 듯 바닥에 몸을 던지면서 바짝 엎드렸다.

한편, 옹수령을 덮치려던 복면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방해꾼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찰나의 틈을 타서 단리혁이 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슈우우우우…!

화살도 걸려 있지 않은 시위였는데, 붉은 기운이 소용돌이치듯 궁으로 모여들었다.

다음 순간.

패애애애앵!

뀌이아아아앙!

고막을 찢어발길 듯한 괴성과 함께 기풍이 줄기줄기 날아갔다.

파파파파파파!

주변의 나무와 풀잎들이 뿌리째 뽑혀 날아갈 듯 일렁였다.

크으읏!

귀곡혈광시(鬼哭血光矢).

단리정의 독문무공 중 하나였다.

“크아악!”

복면인들의 비명이 허공으로 차올랐다.

동시에 사비란의 신형이 그들을 향해 빛살처럼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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