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653화 (653/670)

# 653

귀환 마교관

653화(외전 26)

나뭇가지 위에서 죽립을 푹 눌러 쓰고는 사비란을 지켜보는 중년인.

그는 바로 멸마궁주 사비강이었다.

삼십 년 전과 비교하면 조금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여전히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일만큼 동안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무공 수위를 생각한다면 그보다 어리게 보이는 것도 가능하리라.

사비강 곁에는 홍염이 반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다행히 화해의 물꼬가 트였군요.”

홍염의 말에 사비강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날 닮아서 현명하게 잘 대처하는군.”

그러자 홍염이 이맛살을 슬쩍 구기며 돌아보았다.

“에이, 설마요. 궁주님 방식하고는 좀 다르죠.”

“내 방식이 어떻기에?”

“그야 뭐… ‘그냥 닥치고 둘 다 데려간다. 좋은 말 할 때 자식들 내놔라.’ 이런 식이죠.”

“난 뭐 위아래도 없는 인간으로 보이나?”

“아… 있었…습니까? 위아래…?”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홍염은 순간 위기를 인지했다.

그 웃음에서 익숙한 느낌이 났기에.

아니나 다를까 사비강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위아래가 얼마나 분명한지 오늘 자네한테 가르쳐 줘야겠어.”

“하하… 하… 전 그저… 농, 농담이었습니다.”

“사양하지 말라고. 내가 얼마나 꽉 막힌 꼴통인지 알려 줄 테니까.”

“엇! 그러고 보니 저도 다음 임무를 수행해야 해서…! 그럼!”

말을 마치자마자 홍염이 거짓말처럼 기척을 감췄다.

사비강이 피식 웃어 버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저만치 먼 곳에서 정말이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덩달아 사비강의 입가에도 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

사비란과 네 명의 사부는 다시 객점으로 돌아와 마주 앉았다.

대략적인 상황을 들은 연우경이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흐음. 내 딸을 납치한 것들이 마공석을 모으고 있었다는 거군. 그리고 강호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네, 지금까지 파악된 바로는 그렇습니다.”

사비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꾸했다.

그녀는 끝까지 연설연과 석검영을 납치한 게 자신이라는 걸 밝히지 않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때론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한 법 아니겠나?

물론, 언젠가는 밝혀질 진실이다.

하지만 그때는 오히려 자신에게 고마워할 수도 있지 않을까?

‘뭐, 아니면 말고.’

확실히 이렇게 넘어갈 때 보면 아빠를 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잘 짜여 진 각본 덕분에 네 사람은 더욱 열을 올리면서 백화단을 지지하는 발언을 이어 갔다.

“이놈들이 마공석으로 힘을 비축할 작정인가? 아무튼 그런 정보가 들어왔다면 확실히 처리해야겠구나. 거기에 감히 마공석을 얻으려고 내 딸을 납치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그놈들이 우리를 아주 쉽게 본 모양이군.”

석탄강도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분을 삼켰다.

목단화가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놈들을 놓치고 말았으니.”

“실은 그들을 일부러 놓아 주었습니다.”

“뭐라고?”

네 사람이 동시에 사비란을 돌아보았다.

때마침 등가휘가 옹수령을 데리고 곁으로 다가왔다.

사비란이 그녀를 소개했다.

“옹 사부님과 능 사모님의 딸, 옹수령입니다.”

옹수령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옹수령이라고 합니다.”

“그래, 네가 수령이구나. 이야기 들었단다.”

“몸은 좀 어떠냐?”

“괜찮습니다.”

옹수령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지금 완전히 괜찮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계곡에서 정령술을 쓰면서 그녀의 몸에 다시 한 번 무리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고향을 떠나기 전에 구강룡이 준 마공석이 있어서 빠른 처치가 가능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앓아누웠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옹수령을 본 네 명의 사부는 대략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그녀를 보기 전부터 그 물줄기가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데 이렇게 옹기승과 능소소의 딸을 직접 보게 되니 뭔가 느낌이 새로웠다.

“소소는 잘 지내니?”

목단화와 유송령이 동시에 물었다.

옹수령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지내십니다.”

“네 엄마는 정말이지 얌전하고 순한 친구였는데. 너도 비슷하구나.”

목단화가 빙긋 웃으며 하는 말에 옹수령은 그저 웃음만 지었다.

사실 그녀는 내심 동의할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어머니는 조금 강단이 있고, 억척스럽다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렸다.

아버지가 오히려 순하다면 순할까?

한데 어머니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어머니가 조용하고 순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조금 죄송스러운 마음도 든다.

병약한 자신을 키우면서 어머니는 얼마나 변해 가셨던 걸까?

때론 독해져야 했을 테고, 때론 포기하는 삶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옹수령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이, 연우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면 그 수룡은 이 아이가 부린 것이겠구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실수가 아니란 말이지?”

“네.”

사비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애초에 물고기를 지금 낚을 생각은 없었거든요. 미끼만 빼먹고 달아나게 둘 작정이었죠.”

“이유는?”

“사부님들도 너무 오래돼서 잊으셨나 봅니다. 그 마공석에는 좀 특별한 게 묻어 있다는 것을.”

“특별한 것?”

네 사람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비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말해 봐라. 특별한 게 무엇이냐?”

석탄강의 말에 사비란이 대답했다.

“체액입니다.”

“체액…?”

네 사람이 반문하다가, 역시 동시에 뭔가 스쳐 가는 생각이 있는 듯 짤막한 탄성을 흘렸다.

“아…!”

생각났다.

멸마궁에서 하사한 마공석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도난과 분실에 대비해서 모종의 조치를 취해 둔다.

일전에 담진우가 얘기한 ‘특별함’이라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랬군. 그래서 일부러 놈들이 달아나도록 내버려 둔 것이로구나.”

“네, 마치 우리가 놓친 것처럼 꾸며야 했죠. 그래야 그들도 별 의심 없이 그 마공석을 사용할 테니까요.”

“하긴. 그 아이의 체액이라면 인간이 느끼지 못할 테지.”

“네, 절대 느낄 수 없죠.”

“그럼, 이제 다음 행선지는 정해진 셈이구나.”

유송령의 말에 사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차피 마지막으로 들러야 할 곳이기도 하고요. 그곳에 모두 모여 있으니까.”

“천신무관(天新武館).”

“네. 천신무관.”

사비란이 빙긋 웃었다.

천신무관은 천멸대의 ‘천’과 신생조의 ‘신’을 따서 이름 지은 곳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천멸대와 신생조 출신 무인들이 모여서 만든 무관이다.

규모가 매우 컸는데, 과거 용천관의 명성을 뛰어 넘은지는 이미 오래였다.

유송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그곳에 그 체액을 묻힌 녀석도 있지.”

“네. 그 아이는 추량 사부님을 가장 잘 따르니까요.”

“그러고 보니 보고 싶네. 그 아이가 커졌을 때, 배를 배게 삼아 잠든 적이 있었는데. 참 편했지.”

그러자 석탄강이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말도 마. 난 그 녀석이 갑자기 커지는 걸 처음 봤을 땐 기겁하는 줄 알았어.”

연우경이 탁자를 탁 치며 말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군! 그때 곡보옥 그 녀석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비명까지 질렀잖아?”

“하하! 그랬지. ‘우아아악!’ 하면서 말이야.”

“맞아, 맞아. 그래서 내가 보름은 놀렸을 거야.”

목단화도 끼어들면서 깔깔 웃었다.

어느새 서로 추억을 꺼내며 어울리던 네 사람은 다시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자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주 잠깐의 화목이었다.

하지만 사비란은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불신의 벽을 무너뜨려 가는 거다.

그리고 다시 쌓으면 된다.

우정과 신뢰를.

연우경이 그리움이 담긴 눈길로 창밖을 응시했다.

“그 녀석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잘 지내겠지. 다들 적어도….”

석탄강이 하려던 말을 갈무리해 버렸다.

그가 하려던 말은.

‘…우리처럼 원수지진 않았을 거야.’였다.

문득 지나온 세월이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그때의 추억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무엇이 아쉬워서 그렇게 서로 으르렁거렸을까?

결국 오해가 쌓이고 쌓여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서 소통하지 않은 채 결론을 내고, 상대를 비방했다.

처음에는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해서 굳이 따지지 않은 것들이, 나중에는 불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정말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하려면 불만도 생기지 않았어야 하건만.

결국 어떻게든 상대가 먼저 반응을 보이길 바란 건지도 모른다.

각자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것을 무시한 채.

‘나이를 헛먹었나 보군.’

석탄강이 피식,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마침 연우경이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그 천신무관에 다녀온 적이 있었지. 그때 이름이 유독 특이했던 녀석을 본 기억이 나는군. 그게 누구 아들이었더라?”

“그러게요. 나도 기억나요. 옷차림도 유별났었죠. 어디에서도 눈에 띄는 아이였죠.”

목단화가 말을 받자, 석탄강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요상한 녀석을 본 기억이 나는군.”

“나도. 엄청 화려한 옷차림을 하는 아이였지, 아마?”

유송령의 말을 끝으로 연우경이 다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녀석이 누구 아들이었는지는 도통 기억이 안 나는군. 아무튼 다들 만나거든 안부나 전해 주려무나.”

“알겠습니다. 사부님들이 극적으로 화해를 하고 서로 협력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야죠.”

“뭐야?”

석탄강이 목소리를 높이자, 사비란이 배시시 웃었다.

결국 석탄강도 더는 뭐라 하지 못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다른 사부들 역시 툴툴 웃어 넘겼다.

그렇게 한 바탕 사건이 일어났던 송백현의 하루가 또다시 저물어 가고 있었다.

**

“아버지, 이건 정말 아니라고요.”

“어허! 이 녀석아, 그러다가 너도 무시당하고 싶냐?”

“이러면 더 무시당할 것 같단 말이에요. 다들 비웃어 버릴 걸요?”

“차라리 비웃음을 당하는 게 낫다. 네가 지금까지 진정한 무시를 당하지 않은 것은 다 이 아비의 한 맺힌 노력 때문이다.”

“아버지는 너무 피해망상에 젖어 계시는 거예요.”

“그게 아니래도!”

콧수염이 팔자로 자란 중년의 사내, 그는 바로 언제나 존재감이 희미했던 등자경이었다.

어느새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등자경이 아들, 등등등(鄧騰騰)을 보면서 말했다.

“내가 너만은 절대로 무시당하지 않게 키울 거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혼도 하시고, 이렇게 잘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때였다.

문이 열리면서 등등등의 어머니 백미령이 들어왔다.

그녀가 등등등을 빤히 보면서 물었다.

“등아, 네 아버지 어디 계시니?”

등등등의 어깨를 잡고 있던 등자경이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나 여기 있소만.”

“어머, 왜 당신은 숨어 있다가 나오세요?”

“처음부터 계속 여기 있었소만.”

“그랬어요? 아무튼 좋은 소식이 있어요. 비란이 이곳으로 온다는군요. 백화단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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