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0
귀환 마교관
630화(외전 03)
“너, 너…!”
집으로 막 돌아온 단리정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손가락을 들어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아들인 단리혁이 한 중년 여인의 등 뒤에 태연히 서 있었다.
중년의 여인은 다소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굳이 화장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아름다웠을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조금은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인상이 상대로 하여금 다소 위축되게 만든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 여인의 뒤에는 단리혁이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마치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루에서 그 난동을 부린 적이 없었다는 사람처럼.
결국 단리정이 불같이 화를 냈다.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와!”
“아버지. 여긴 제가 나고 자란 집입니다. 정녕 제가 집을 나가길 바라시는 겁니까?”
단리혁이 눈썹을 팔자로 그리며 묻자, 단리정이 분을 눌러 참느라 두 주먹을 꾹 말아 쥐고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루에서 나뒹굴던 놈이….”
“소자가 어리석어 잠시 유흥을 즐겼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단리혁이 짐짓 진지한 척 허리까지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단리정은 이런 모습들이 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기에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가 붉으락푸르락 변한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용서? 네놈이 용서라는 말을 그리 쉽게 올릴 수 있다더냐! 당장 이리 오너라! 내 오늘 네놈의 버릇을 단단히…!”
그러자 단리혁 앞에 서 있던 중년 여인이 한 걸음 나서면서 차갑게 말했다.
“당신도 그만하세요.”
“부인…!”
“한창 혈기왕성한 아이가 기루 좀 다녔기로서니 이렇게까지 동네 시끄럽게 할 일인가요?”
“허어! 부인, 내가 저놈 나이 때는 감히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그야 당신이 숙맥처럼 답답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죠. 난 우리 아이가 당신처럼 우둔하게 크길 바라지 않아요.”
“우, 우둔…?”
“설마 당신이 우리 낭군님처럼 총명하고 유쾌한 부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허어, 부인. 아무리 그래도 애 듣는 앞에서 궁주님께 낭군이라니요!”
“시끄러워요! 그건 제게 그저 의미 없는 애칭이나 다름없다고요. 몇 번을 말해야 해요? 그래요, 별호 같은 거예요. 낭군님은 나만의 별호 같은….”
“지금 얼굴 발개지셨소!”
“어머? 내가 그랬나? 아무튼 이제 우리 혁아는 그만 괴롭히세요.”
“부인, 내가 저 녀석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외다. 어디까지나 훈육을 하기 위해서….”
“그만하시라고요. 사내아이가 기루 좀 다닌 게 무슨 그리 큰 문제라고….”
“부인! 부인이 계속 그렇게 오냐오냐 하면서 키우니까 저 녀석이 망나니처럼 어긋나는 것 아니오!”
“뭐라고요? 그럼 지금 그게 다 나 때문이란 말인가요?”
“부정하진 않겠소! 자고로 아이를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다고 했소!”
“당신 정말…! 그럼 당신은 부모 아니에요?”
“그러니 내가 저 녀석을 훈육하려는 것 아니오!”
“호오, 그렇게 매일 같이 훈육하시는데 우리 아이는 왜 저리 됐을까아?”
“그야 당신이 오냐오냐….”
“또 결국 내 탓이다?”
“그렇소!”
“당신의 훈육이 잘못됐을 수도 있죠! 당신 같이 꽉 막힌 사람과 같이 살면 얼마나 답답할지 생각이나 해봤어요? 만약 우리 아빠가 당신 같았으면, 난 진작 집 나갔을 거야!”
“뭐, 뭐요?”
마침 둘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던 단리혁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단리정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갔다.
“노옴!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웃느냐!”
“괜히 애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지금 나랑 이야기 중이니까!”
“허어, 부인. 이야기는 우리끼리 있을 때 조용히 합시다.”
“싫어! 난 지금 당장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겠어요! 당신, 당신이 얼마나 답답한 사람인지 알아요? 마음속에 흠모하는 감정이 있으면서도 청혼을 하지 못해서 우물쭈물… 그래서 결국 먼저 청혼을 한 것도 나였잖아! 어휴,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던 내가 미쳤지!”
“여, 여기서 그런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오는 거요?”
단리정이 당황해서 소리치자, 여인이 코웃음을 치며 되받아쳤다.
“하아! 이제 다 지나간 일은 접어 두어라? 그래서 잘못한 게 전혀 없다? 내가 먼저 청혼한 건 당연한 거였다?”
“그, 그런 뜻이 아니지 않소. 나원, 참.”
결국 단리혁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동시에 단리정이 불같이 화를 내며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노오오옴! 네놈 때문에 지금 이 난리가 났는데 웃어?”
찰나,
촤라라라락!
여인의 손에서 가시 돋친 채찍이 늘어지더니 화염으로 이글거렸다.
“더 이상 저 아이를 건드리면 내가 가만있지 않겠어요!”
“허어, 부인! 엇? 이놈 거기 못 서겠느냐! 단리혁!”
하지만 이미 단리혁은 저만치 달려가 담장을 넘어 달아난 후였다.
아들이 사라진 것을 본 여인이 그제야 채찍을 거두고는 싸늘한 표정으로 단리정을 보았다.
“앞으로 다시는 그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마세요.”
“부인도 부디 내가 그러지 않도록 협조 좀 해주시오.”
“이보다 어떻게 더 할까요?”
단리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을 말자. 말을 말아.
그러고는 아련한 눈빛으로 여인을 보았다.
동시에 매일 같이 떠올리던 생각을 다시금 떠올렸다.
‘내가 왜…, 왜 이 여자랑 혼인한 거지? 미쳤지, 미쳤어.’
분명 그녀는 아름다웠다.
보기 드문 은빛 머리카락도 매력적이었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것처럼 보여도, 언제나 당당하고 제 할 말을 똑 부러지게 하는 게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분명 그녀는 여자였지만 남자가 봐도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파 출신이라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마족대전 이후로 정사의 구분이 무의미한 시기였다.
그래, 거기까지만 보면 모든 것이 좋았다.
한데….
“너 미쳤구나? 제대로 미쳤네. 얼마나 후회하려고 저런 미친년을 좋아해?”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이야기했을 때, 목단화가 했던 말이다.
그때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
“쟤가 평소에 멀쩡한 척을 해도 거의 정상이 아니야. 반면에 넌 너무 정상이야. 정상 이상의 정상이지. 둘은 절대 상극이라고.”
단리정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다름이 있기에 더욱 어울릴 것이라고 했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각자가 가진 다른 장점 때문에 서로가 더욱 완벽해질 거라고 했다.
“친구? 그래 뭐, 어떻게 보면 쟤와 난 친구라고도 할 수 있지. 절친?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저 미친년과 절친이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아무튼 넌 분명히 내 충고를 듣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거야. 친구로서는 몰라도 인생의 동반자로서는 매우 피곤한 상대일 테니까. 여자는 여자를 잘 알 거든.”
그래도 자신이 더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
이제 단리정은 목단화보다 훨씬 더 자신의 아내, 설서린에 대해서 잘 알게 됐다.
하지만….
‘결국, 네 말이 맞았구나.’
단리정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까지는 아니더라도 절대 상극이라던 말은 부정할 수 없겠다.
그때,
“당신! 왜 내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는 거죠? 지금 속으로 ‘왜 내가 저런 년이랑 결혼했을까!’ 생각한 거지?”
“아, 아니오! 무슨 그, 그런 말을.”
눈을 가늘게 뜨던 설서린이 단리정을 흉내냈다.
“아, 아니오. 무슨 그, 그런 말을. 말도 이렇게 막 더듬고 말이야.”
“어허, 아니라니까.”
“당연히 아니어야지. 당신은 나한테 감사하게 생각해야죠. 나처럼 예쁜 여자가 당신이랑 살아 주니까! 내가 아니었으면 누가 당신처럼 답답한 인간과 혼인을 하겠어요? 그나마 나나 되니까 참고 살지.”
“이래봬도 난 ‘신궁’이라는 별호를 듣고 있소.”
“후유, 우리 낭군님은 지금쯤 잘 지내실까?”
“거 적당히 합시다. 아무리 그래도 날 눈앞에 두고 궁주님을 아직도 낭군이라니!”
“시끄러워요! 내 얼굴 보면서 한숨이나 쉰 주제에!”
“정말 이럴 거요?”
“왜? 나랑 한 번 붙어 보시겠어요?”
설서린이 고리눈을 치뜨고는 소리쳤다.
그때였다.
갑자기 문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곧 시종 하나가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저어, 자양문주(自陽門主)께서 문주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자양문주가…?”
단리정이 설서린과 잠시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모셔라.
자양문은 귀양에서 가장 큰 문파였는데, 마족과 대전이 치러질 때, 귀양을 버리고 달아났던 문파 중 한 군데였다.
때문에 단리정은 자양문을 그리 곱게 보지만은 않았다.
곧 시종이 물러가더니 자양문주 노철(盧哲)이 저벅저벅 들어왔다.
한데 그 뒤로 자양문의 제자들 한 무리가 뒤따라 온 게 아닌가?
이는 굉장히 무례한 경우였지만, 이들이 워낙 귀양에서 큰 문파인데다 기세가 대단하다 보니 문지기도 미처 말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랜만이오. 단리 문주!”
“어서 오시오. 노 문주.”
“허허, 설 부인은 여전히 아름다우시구려.”
“호호, 감사합니다.”
설서린은 진심으로 기분 좋은 듯 속없는 사람처럼 활짝 웃었다.
단리정이 노철과 그 제자들을 가만히 보았다.
시선을 느낀 노철이 말을 이었다.
“아, 내가 이곳에 온 용건은… 다들 바쁜 분들이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소.”
“무엇이오?”
“유감스럽게도 단리 문주께서 본문이 관리하는 기루에서 난동을 부리셨다 들었소.”
“그 문제라면 기루 주인장과 충분히 대화를 나눴소만.”
“아아, 그 이야기는 들었소. 부서진 벽과 창을 수리해 주겠다고.”
“그렇소.”
“한데 그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오.”
“무엇이 문제요?”
“단리 문주께서 워낙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그곳에 있던 손님들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오. 이는 소문에도 영향을 미칠 터이고… 사정이 그렇다 보니 이에 대한 피해 보상까지 하지 않으면 곤란하게 됐소.”
한 마디로 영업을 방해했으니 피해보상도 하라는 말이다.
그 손님들이 정말로 그 문제를 따지고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자양문으로서는 좋은 건수를 잡은 것이다.
그들은 늘 일성궁문(一星弓門)을 달갑지 않게 여겼기에.
몇 년 전까지 단리정이 천멸대주로 있을 때만 해도 그들은 몸을 사려야 했다.
백화단 대신 천멸대가 과거 청산에 앞장 서는 조직이었기에.
하지만 천멸대가 해산하면서 귀향한 단리정은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었다.
마족대전의 후유증으로 일성검문의 맥이 끊어진지 오래였고, 단리정이 돌아와 뒤늦게 일성궁문을 세웠지만 이미 귀양은 자양문이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노철에게는 단리정이 여전히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요즘 일성궁문이 조금씩 커진다고 하더니… 과연 다시 기세를 펴려고 하는군. 이럴 때에 확실히 기선 제압을 하지 않으면 곤란하겠지.’
노철은 내심 코웃음을 치면서 입을 열었다.
“해서 말인데… 그 피해 보상금이 상당하오.”
“얼마나 되오?”
“만 냥이오.”
“뭐, 뭣이?”
단리정이 두 눈을 부릅떴다.
말이 만 냥이지.
평범한 사람은 평생을 벌어도 절반에도 다다르지 못할 금액이었다.
놀란 표정을 즐기듯 잠시 뜸을 들이던 노철이 말을 이었다.
“사실 한 번 소문이 나빠지면 그걸 되돌리기가 무척 어려운 법이라서 말이오. 이 사람 저 사람 달래주고, 이래저래 홍보도 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간다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단리 문주가 저지른 일이니 내가 특별히 다른 방법을 제안할까 하는데….”
“무엇이오?”
단리정이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물었다.
노철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간단하다오. 나와 대련을 통해서 우리 제자들에게 단리 문주님의 궁술을 견식할 기회를 주면 좋겠소.”
“단지 그것만으로…?”
“그렇소.”
고개를 끄덕인 노철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마침 내가 제자들에게 궁사를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치는 중이었다오.”
그 말이 가지는 의미는 남 다른 것이었다.
한 마디로 승부 조작.
대련에서 적당히 패해서 자신의 위신을 세워 준다면 피해 보상은 없던 일로 해주겠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