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9
귀환 마교관
629화(외전 02)
찢어진 옷,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 헝클어진 머리카락, 덜덜 떨리는 손.
만신창이가 된 여태범은 눈앞에 벌어진 참상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천일문이 자랑하는 수십 명의 고수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안마당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사비란은 정말이지 신들린 듯 싸웠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싸움이 길어질수록 여태범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렇다.
상대는 멸마궁의 단주다.
멸마궁이 어떤 곳인가?
중원 최고의 연맹 조직이다.
정사를 아우른 채 강호에 군림한지 벌써 삼십 여 년이 지났다.
자신이 아무리 잘나간다고 한들 합비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잠시 잊고 있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그간의 권세에 취해 무엇이든 자신의 뜻대로 되리라 착각했던 것이다.
‘제길…!’
여태범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마침 사비란은 뇌운검(雷雲劍) 두일포(杜一包)의 목을 검으로 그어 버리는 중이었다.
촤아악!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핏줄기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더니 두일포가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오늘 같은 날이 닥쳤을 때,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거액을 주고 고용한 초절정 고수였다.
한데 나이 지긋한 그가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려는 이십 대의 여인에게 손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한 채 당했다.
‘어찌 이런 일이…!’
두일포를 베어 버린 사비란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더 나올 사람 없어?”
하지만 장내는 고요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안마당에 쓰러져 있었지만, 장내에는 더 많은 무인들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다.
여태범은 뭔가 잘못됐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아마 천일문에 백화단이 들이닥친 것이리라.
어쩌면 지금쯤 외원에서 그들이 천일문의 무인들을 감시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끝났구나….’
여태범은 지그시 눈을 내려 감았다.
몇 년 전부터 백화단이 본격적으로 활동한다는 이야기는 소문으로 들었다.
하지만 방심했다.
합비에서 쌓은 권세에 너무 취해 있었던 것이다.
한데 이제 그 모든 것이 날아갔다.
자박자박…!
사비란이 천천히 다가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
털썩…!
여태범이 무릎을 꿇고는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귀인을 몰라 본 죄, 죽어 마땅합니다. 부디 용서를!”
사비란의 표정이 슬쩍 일그러졌다.
그녀의 눈치를 살핀 여태범이 연신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면서 어째서 목숨은 살려 줘야 하는 거지?”
사비란의 목소리가 더 없이 차갑게 식었다.
여태범이 그대로 얼음이 된 것처럼 굳었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사비란이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섰다.
“뭐, 이 정도면 충분한가? 어차피 남은 인생은 지옥이나 다름없을 테니.”
그 순간 여태범의 눈빛이 변했다.
어차피 그는 모든 걸 잃었다.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감옥에 갇혀 평생을 썩느니, 차라리 속 시원하게 화풀이라도 하는 게 나으리라.
‘건방진 계집…! 감히 내 앞에서 등을 보이다니!’
제아무리 고수라지만 이렇게 지척의 거리에서 무방비 상태로 등을 보이는 것은 명백한 실수가 아닌가?
확실히 아직 어려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이리라.
어찌 이런 년이 백화단주가 되었을까?
만약 시간이 있었다면 그 이유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겠지만, 여태범은 당장 눈앞의 원수 같은 여인을 죽이고 싶다는 살의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사비란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탓!
그가 빛살처럼 몸을 날렸다.
“내 지옥에 너를 끌고 가…! 컥!”
찰나지간 빛줄기가 하늘에서 떨어지는가 싶더니 여태범의 목이 싹둑 잘려 나갔다.
그의 머리가 바닥에 툭 떨어지더니 한참을 굴러가다가 멈췄다.
여태범은 자신의 머리가 왜 몸에서 분리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누군가 나타나 잘려 나간 머리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여태범의 목을 친 사람은 검은 무복을 갖춰 입은 사내였는데, 반듯한 외모에 유난히 눈빛이 날카로운 자였다.
우웅… 우웅…!
그의 손에 들린 칼이 잔잔한 진동을 일으켰다.
그것을 본 사비란이 피식 웃었다.
“모처럼 피맛을 보니 귀혼도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야.”
“그게 아니라 갑자기 공력을 끌어올려서 경고를 보내오는 겁니다.”
다소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을 뱉은 그는 바로 백화단의 부단주 등가휘(鄧家輝)였다.
그가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일부러 그러셨죠?”
“뭘?”
“방금 이 녀석에게 등을 보인 것.”
“글쎄?”
“그러지 마십시오. 그런 위험한 방법이 아니어도 이런 자를 시험해 볼 길은 많습니다. 죽이고 싶었다면 차라리 그냥 죽이십시오. 보고서는 제가 알아서 잘 작성하겠습니다.”
그러자 사비란의 표정에 은근한 장난기가 서렸다.
“왜 저자를 시험했다고 생각하지?”
“그럼….”
“부단주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시험해 본 걸 수도 있잖아? 부단주의 첫째 임무는 단주를 호위하는 것. 잊은 건 아닐 테지?”
등가휘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말로는 당할 수 없는 사람이다.
대신 그는 주변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여기저기 부상 입은 자와 죽은 자들이 아무렇게나 뒤엉켜서 널브러져 있었다.
그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화려하게도 해치우셨군요.”
“어쩔 수 없었어. 날 죽일 듯 달려드는데 어떡해?”
“일부러 유도하신 건 아니고요?”
“그럼 어때? 누군가 보고서는 알아서 잘 작성해 줄 텐데.”
결국 등가휘는 다시 한 번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말을 말아야지.
그가 세 번째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 갔다.
“현재 천일문은 외원에서부터 압수 수색을 진행 중입니다. 우선 여기가 정리되는 대로 내원도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뭐 대충대충 해도 될 거야.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해도 열두 번은 더 죽어도 싸니까.”
“그래도 절차는 지켜야지요.”
“그래야지.”
“그리고 이곳이 정리되는 대로 잠시 바빠질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지?”
“궁에서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왜? 또 딸내미가 너무 보고 싶어서 못 기다리겠다고 하셔?”
등가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보다는 조금 복잡한 임무를 맡게 된 것 같습니다. 잠시 여행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서신을 내밀었다.
사비란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서신을 받아들었다.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의 표정이 잠깐씩 변했다.
마침내 마지막까지 다 읽었을 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백화단만으로 충분할 텐데.”
“궁주님의 뜻입니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등가휘의 말에 사비란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우리 아빠한테 어떤 깊은 뜻이 있다고?”
“뭐… 아니면 총관님의 뜻일 수도 있지요.”
“엄마라면… 그럴 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임무는 완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부터 가시겠습니까?”
“어디보자….”
사비란이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뜨고는 싱긋 웃었다.
“역시 전 천멸대주님부터 찾아뵙는 게 낫지 않을까? 그분의 궁술을 다시 한 번 견식할 수 있을 기회이기도 하니.”
“하지만 이번 임무를 같이 할 사람은 그분이 아니라….”
“알아. 그분의 아들이지. 아주 어릴 적에 만나본 기억이 있어.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네.”
“어릴 때라면….”
“다섯 살…?”
“너무 오래 전이군요.”
“어쨌거나 가보자고. 아마 그분의 아들인 만큼 훌륭하게 성장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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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망나니 같은 녀석! 이리 썩 나오지 못할까!”
귀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기루의 복도를 한 중년의 사내가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연신 붉으락푸르락 변했는데, 당장이라도 분을 삼키지 못해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좀 특이한 것이 있다면 등에 유난히 커다란 활을 매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고, 나리.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요! 고정하십시오!”
점소이가 그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며 사정했다.
“어허, 썩 비키지 못하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이곳엔 다른 손님들도 계십니다요. 제발 고정하십시오.”
하지만 중년의 사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리에 매달린 점소이를 끌고 가다시피 걸음을 옮기면서 문을 드르륵 열었다.
미닫이문이 열리자, 방안에서 알몸으로 나뒹굴던 남녀가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덮어썼다.
“뭐, 뭐요? 이게 무슨 짓이오?”
남자 손님이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치자, 중년의 사내는 콧방귀만 낀 채 거칠게 문을 닫았다.
그는 그렇게 문 하나하나를 열다가 마침내 마지막 방문 앞에 다다랐다.
이미 보고를 들은 바였다.
자신의 아들이 이 기루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하루가 멀다 하고 계집질을 하는 아들 녀석이었다.
이제 남은 방은 하나.
그가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이놈 단리혁(段里奕)! 내 당장 네놈을…!”
우렁차게 소리치던 중년의 사내가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나신으로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당기고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기녀, 이제 막 창 틀을 밟고 뛰어내리려는 젊은 사내.
“너, 너…!”
중년 사내가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며 가리키자, 젊은 사내가 뒤통수를 긁으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헤헤… 아버지, 오셨어요? 뭐, 이런 장소에서 인사 나누기에는 우리 사이가 조금 어색하네요.”
“뭐, 뭣이…? 이 미친…!”
“우왁! 아버지 그러지 마세요!”
하지만 이미 아버지라 불린 중년 사내는 등에 맨 활을 꺼내 들고 시위까지 당긴 상태!
패애애앵!
마침내 시위를 놓자 화살 한 자루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더니 창틀에 작렬했다.
꽈아아앙!
화살이 날아들었는데 폭음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객실은 아수라장이 되고 비명이 차올랐다.
점소이는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박살이 난 창틀과 벽만 바라볼 뿐이었다.
중년 사내가 씨근거리며 창가로 다가갔지만, 단리혁은 이미 저만치 아래로 뛰어내려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네 이놈! 당장 돌아오지 못할까? 지금 이대로 달아난다면 네놈을 호적에서 파 버리겠다!”
“아버지 손에 죽느니, 차라리 호적을 버리는 게 낫죠!”
“뭐, 뭣이? 이노오오오옴! 단리혀어억!”
그가 다시 활시위를 잡아당기려고 하자.
“아이고, 단리 문주님! 제발 고정하십시오!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습니다요!”
점소이가 다시 한 번 그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말렸다.
그러는 사이 단리혁은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씨근거리면서 돌아서는데, 마침 문을 열고 한 노인이 들어섰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듯 평범한 기운의 노인이었다.
그는 바로 일성검문주였던 단리추였다.
아무래도 기루의 주인이 급히 그를 이곳으로 부른 모양이었다.
“아버지….”
중년 사내, 단리정이 고개를 푹 숙이자, 단리추가 껄껄 웃었다.
“거참, 그 녀석 화려하게도 사고를 치는구나.”
“웃을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
“허허허. 너무 조급해 하지 마라. 어디 자식 일이 부모 뜻대로 된다더냐?”
“자식을 키우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습니다.”
단리정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단리추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힘들고 어려워도 때가 되면 다 좋아지더구나. 문제는 인내심일 뿐.”
단리정은 단리추의 말을 들으면서 아들이 사라진 길목을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못된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