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1
귀환 마교관
631화(외전 04)
아무리 우둔하다 해도 단리정이 그 시커먼 속내를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잘못도 명백하니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만 냥이나 되는 돈을 어디선가 구할 수도 없는 노릇.
누군가에게 빌리는 것 역시 그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어떻소? 나와 제자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는 것이.”
단리정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차라리 잠시 체면을 접어 두면 만사가 편해질 터.
그가 막 입을 열려는데.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이왕이면 약간의 제약을 두는 것도 좋겠어요.”
설서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나섰다.
단리정이 불안한 표정으로 설서린을 보았다.
그렇잖아도 서로 한바탕 하려던 차에 노철이 나타났다.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녀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설서린이 ‘흥!’ 하는 표정을 짓더니 노철에게 다가갔다.
노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제약이라면… 무슨 뜻이오?”
“궁수에게는 다양한 변수가 생길 수 있잖아요?”
“이를 테면…?”
“화살이 다 떨어졌다든지.”
“하긴. 그럴 수 있지.”
“그렇죠? 그러니 저이에게 화살이 다 떨어진 상황을 가정해서 대련하는 걸로 하죠. 위기의 상황에서 임기응변을 가르치는 거죠.”
노철이 다소 멍한 표정으로 설서린과 단리정을 바라보았다.
응당 단리정 편을 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대뜸 궁사에게 화살도 없이 대련을 하라고 하다니.
‘그러고 보니… 이 두 사람 최근 부부싸움이 잦다고 하던가…?’
노철이 내심 조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일은 더 쉽게 되지 않았나?
하지만 그렇다고 넙죽 제안을 받을 수는 없었다.
“허허, 아무리 그래도 궁사에게 화살도 없이 대련하라는 건….”
“어머나, 저래 봬도 저이는 ‘신궁’이라는 별호를 듣고 있다잖아요? 화살 따위 없어도 상관없을 거예요.”
“부인….”
듣다 못한 단리정이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불렀다.
분명 그녀는 조금 전 단리정이 했던 말을 꼬투리 잡는 것이리라.
하지만 설서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 갔다.
“활만 잘 쓴다고 진정한 무인이 아니라는 걸, 귀문의 제자들에게도 가르쳐 줄 기회이기도 하고요.”
“허어, 아무리 그래도 그것 참….”
노철이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심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궁이라 이름난 단리정이 화살이 없을 때, 과연 검술은 어느 정도일까?
적어도 그의 검술 실력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굳이 승부 조작을 할 것도 없이 자신의 압승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 부부는 걸핏하면 싸우는 데다 사이가 좋지 않으니, 보복 염려는 없으리라.
속셈이 끝난 노철이 은근한 눈빛으로 단리정을 보았다.
“확실히 설 부인의 말씀대로 궁사가 언제나 화살을 가지고 다니리란 보장이 없으니… 어떻소? 가능하시겠소?”
입은 묻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강요하고 있었다.
단리정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설서린을 한 번 바라보다가 한숨 쉬었다.
“알겠소.”
‘됐다!’
노철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승부 조작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리라.
검으로 싸운다면 이기지 못할 것도 없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련이 갑자기 이루어졌다.
장외 연무장으로 이동한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서 포권을 취한 후 서서히 기를 끌어올렸다.
이곳 장외 연무장은 원래 워낙 검소했던 일성검문의 장내가 비좁다 보니, 멸마궁에서 별도로 장외에 신설해 준 연무장이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설서린이 밝은 목소리로 응원했다.
“힘내세요! 노 문주님!”
“이것 참, 하하. 설 부인의 응원을 받으니 없던 힘도 생기는구려!”
반면 그 모습을 본 단리정은 점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부부 싸움을 했다지만,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를 응원하는 게 결코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노철이 서서히 기수식을 취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뭐하시오? 검은 안 챙기시오?”
단리정은 빈 활만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마 조금 전 설서린이 자신을 응원했기 때문인 듯했다.
단리정이 툭 던지듯 말했다.
“상관없잖소? 시작하시오. 궁사가 화살이 없을 때, 어떻게 싸우는지 보여드리지.”
말투가 바뀌었다.
목소리에 은근한 노기까지 묻어난다.
‘흥, 그래봐야… 허세일 터! 언젠간 네 마누라도 내 차지가 될 지도 모른다!’
내심 냉소를 지은 노철이 어느 순간 비호처럼 튀어 나갔다.
“그리 멍하니 서서는 아무것도…!”
패애애애앵!
순식간이었다.
노철이 바닥을 차고 튀어 나가는 순간, 단리정은 커다란 활을 들고 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다.
‘화살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파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기운이 노철의 전신을 덮쳐 왔다.
“크으윽!”
체면불고하고 그가 양팔을 교차하면서 비명을 터뜨렸다.
온몸이 찢어져 나갈 듯한 감각.
촤아아아악!
강렬한 태풍에 휩싸이면서 그의 전신에서 찢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후우우우웅!
한 차례 기풍이 지나가고 나자,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바위처럼 굳었던 노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대련을 지켜보던 그의 제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연무장 한쪽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지켜보던 설서린이 실망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쥐방울만하네.”
그제야 노철이 천천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장삼이 완전히 찢어지고 터져 나가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허억!”
그가 화들짝 놀라서 중요 부위를 얼른 가리며 몸을 오므렸다.
노철의 제자들도 이번만큼은 웃음을 참기 힘들었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단리정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더 하시겠소?”
“이, 이런… 짓을…!”
“이런 짓? 대련을 하자는 건 그쪽이었던 것 같은데?”
수치와 치욕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노철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단리 문주! 아무래도 피해 보상 문제는 다시 생각해…!”
그때였다.
슉! 슈슈슈슈슈슉!
연무장 주변을 에워싸면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이미 그들의 존재를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단리정과 설서린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다만 노철과 그 제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갑자기 나타난 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중 수장으로 보이는 여인이 한 걸음 나서더니 한쪽 무릎을 척 꿇으며 소리쳤다.
“백화단주, 사비란! 전 천멸대주님을 뵙습니다!”
“전 천멸대주님을 뵙습니다!”
연무장 가득 우렁찬 고함소리가 진동했다.
단리정이 모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구나, 란아.”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사비란이 고개를 들고 빙긋 웃었다.
한편 ‘백화단’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노철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천멸대의 뒤를 이은 과거 청산 조직.
만약 그들이 자양문을 표적으로 삼는다면 숨도 쉬기 어려우리라.
파면 팔수록 뭔가 계속 나올 테니.
알몸이 된 노철이 숨죽인 채 서 있는데,
“그런데 방금 그건 무슨 말이죠? 저 노출 변태가 피해 보상이 어쩌고저쩌고 하던데….”
“아, 그것이 내가 기루에서 실수를 좀 했단다.”
“기루에서요? 단리 문주님이 기루에 가실 분은 아닐 것 같은데, 무슨 영문인지…?”
“그게 실은 말이다. 내가….”
“하하하! 단리 문주! 내가 농을 한 것이었소! 그런 일은 신경도 쓰지 마시오! 어차피 본문은 기루의 치안을 도와주는 정도일 뿐! 내가 그저 실없이 던진 농담에 너무 의미를 두지 마시오! 오늘 비무는 참으로 즐거웠소! 그럼 이만!”
노철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휙 돌아서더니 총총 걸음을 옮겼다.
얼떨떨하게 서 있던 그의 제자들이 얼른 달려와 그에게 장삼을 둘러 주었다.
“잠깐.”
급히 발걸음을 돌리던 노철이 사비란의 목소리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무, 무슨 용무이신지…?”
“자양문주님이시지요? 명성은 익히 들었답니다. 귀문이 번창하시길 바랍니다. 관심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고, 고맙소. 내 오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길게 인사를 못 드리는 점은 양해 부탁드리겠소.”
그렇게 인사말을 남긴 노철이 도망치듯 돌아갔다.
그는 사비란의 말뜻을 분명히 알아들었으리라.
보통 관심 가지고 지켜본다는 말은 응원이나 격려에 해당하겠지만, 백화단이 말할 때는 다른 의미가 된다.
적당히 하지 않으면 곧바로 조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경고다.
아마 이 정도만 해줘도 자양문 정도는 알아서 정리를 하리라.
가까운 곳에 일성궁문도 있으니 말이다.
단리정이 빙그레 웃으며 사비란을 보았다.
“덕분에 곤경에서 벗어났구나.”
“별말씀을요. 저 아니어도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시면서. 그나저나 정말 멋있었어요. 역시 신궁이라는 별호가 아깝지 않으세요!”
“허허, 부끄럽다.”
사비란은 처음부터 이 대련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
“아, 실은 이런 일로….”
사비란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주었다.
서신을 찬찬히 읽은 단리정이 침음을 흘렸다.
“그렇군. 한데 아무래도 그 녀석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될 듯하다. 오히려 짐이 되겠지. 아니, 애초에 따라가려고 하지 않을 게다.”
“왜요?”
“그게… 아주 개망나니로 커 버렸거든.”
**
‘제길! 제길! 제길!’
길목을 따라 걷는 노철의 입에서 연신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이 기회에 기선 제압을 확실히 하고 귀양에서 세력을 굳건히 다지려고 했다.
한데 한순간에 이게 뭔가?
‘제기랄! 다 틀렸잖아!’
그때였다.
앞서 걷던 제자들이 주춤하면서 멈춰 섰다.
“뭔 일이냐?”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고개를 들던 노철은 앞을 가로 막고 선 여인을 보고는 흠칫거리다가 곧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설 부인.”
그녀는 바로 설서린이었다.
설서린이 자양문의 제자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그냥 가.”
제자들이 노철을 돌아보자, 그가 턱짓으로 허락했다.
제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자, 설서린이 노철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왔다.
그 순간 노철의 머릿속에 또 다른 복수심이 타올랐다.
‘그래, 차라리 이 기회에 놈의 마누라를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흐흐.’
“괜찮으신가요? 다치신 곳은 없나요?”
“커험, 괜찮소. 나야 손속에 항상 사정을 두고 대련에 임하는데, 단리 문주가 워낙 진지하게 나와서 조금 놀랐을 뿐이오.”
“지랄 똥을 싸네.”
“그렇지. 지랄 똥… 음? 뭐, 뭐요?”
흠칫 거린 노철이 설서린을 올려다보자, 그녀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촤라라라락!
“크헙!”
마칸의 꼬리가 순식간에 노철의 온몸을 친친 감아 올랐다.
채찍 끝자락이 마치 뱀 대가리처럼 움직이면서 금방이라도 노철의 요혈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손속에 사정을 둬? 그이가 진지하게 나와? 훗. 그이가 진지하게 대했다면, 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야. 알아?”
“……!”
노철은 그대로 얼음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파 출신이라더니 이렇게 밑도 끝도 없고, 예의도 없는…!’
설서린이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말했다.
“잘 들어. 그 누구라도 그이를 내 앞에서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간 뼈째 갈아 마실 줄 알아. 그이가 워낙 착해서 넌 오늘 살아서 돌아가는 줄 알아.”
‘뭐, 뭐야? 이년! 소문으로는 제 남편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더니…!’
“너도 봐서 알겠지. 그이가 활시위에 손가락을 거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지. 내가 오늘 널 살려 주는 건, 그 모습을 오랜만에 보게 해주었기 때문이야.”
말을 마친 설서린은 조금 전 단리정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얼굴을 붉게 상기시켰다.
한편 자신을 앞세워 두고 혼자 상상에 빠진 설서린을 보며 노철은 생각했다.
‘이건… 미친년이 분명하다!’
마침 설서린이 그를 돌아보고 섬뜩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면 썩 꺼져.”
촤아아아악!
마칸의 꼬리가 똬리를 풀자, 그의 전신을 덮고 있던 장삼자락이 다시 한 번 찢어지며 터져 나갔다.
알몸이 된 그를 두고 설서린이 유유자적 걸어갔다.
“얼른 달려가서 옷 챙겨 입어. 별로 자랑스러울 물건은 아니잖아? 호호!”
‘으아! 저 미친 녀어어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