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5
귀환 마교관
615화
쉬아아아아!
강호 명숙들이 모여 있는 자리 주변에서 갑자기 거센 돌풍이 일어났다.
무랑이 술법을 이용해서 자신과 구윤, 조신량을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세 사람은 이미 그 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단순히 날아가기만 하면 다행이리라.
온몸이 분쇄되어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수십 명의 강호 명숙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모든 기를 하나의 기기에 쏟아 붓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구오오오오오오…!
기공압입기에서는 오색찬란한 빛이 연신 터져 나왔고, 이따금씩 강렬한 기운을 버티기 힘들다는 듯 진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우우우우웅…!
마침내 기공압입기가 떨기 시작했다.
기공압입기 가득 오색찬란한 기운이 영롱하게 맺혔고, 쏟아지는 공력도 서서히 감소하고 있었다.
슈우우우우우…!
마침내 기공압입기를 향해 흘러가는 내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같은 내공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운공은 동시에 시작해서 동시에 끝나도록 되어 있었다.
무랑이 만든 그 구결은 무공이 아니다.
오로지 내공을 이전하는 것에만 중점을 둔 술법에 가깝다.
때문에 그들은 생전 처음 경험하는 이 심법이 생소하면서도 놀라웠다.
그리고 마침내.
슈우우우욱!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솜처럼, 기공압입기는 마지막으로 흘러드는 내공까지 남김없이 흡수했다.
우우우우웅!
기공압입기가 한 차례 떠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구윤의 눈동자가 커졌다.
‘드디어 이것이…!’
무랑이 술법을 거두자, 조신량이 저벅저벅 걸어가서 기공압입기를 들어올렸다.
“아아…!”
그는 기공압입기에 담긴 기운을 확인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사방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연강백이 탁한 음성으로 말했다.
“절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소. 어서 사 궁주에게 그것을….”
“그렇소. 우리 모두 한마음 한뜻이지 않았소?”
뒤이어 말을 꺼낸 단리추의 목소리도 탁해져 있었다.
한때 강호를 호령하던 명숙들의 목소리가 이젠 일반 늙은이와 진배없어졌다.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선천지기를 제외하고는 모든 내공을 기공압입기에 쏟아 부은 상태.
조신량은 엎드린 채 굵은 눈물을 흘렸다.
“오래전, 나는 강호인들을 원망하며 보낸 적이 있었소. 하지만 여러분들은 진정한 이 시대의 영웅들이오. 나의 편협한 사고가 얼마나 옹졸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소. 모두들 고맙고, 고맙소.”
“허허, 우리가 고마워해야 할 일이오. 조 각주.”
너털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바로 은기륭이었다.
늘 형형한 기운을 뿜고 있던 은기륭은 이제 머리가 하얗게 새고 세월의 흔적을 얼굴 가득 주름으로 짊어진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무랑 역시 모두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인 후 조신량에게 다가갔다.
“이제 이걸 사 궁주에게 주사해야 하오.”
조신량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랑에게 기공압입기를 전해주었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다 끝났다.
최선을 다했으니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마침 그들이 있는 곳으로 비령과 함께 단리정이 내려섰다.
“찾으셨습니까?”
단리정이 한쪽 무릎을 꿇고는 예를 갖추자, 구윤이 얼른 다가갔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거추장스러운 예를 보이진 말게.”
“알겠습니다.”
단리정이 얼른 일어났다.
마침 그의 시선이 무랑이 들고 있는 기공압입기로 향했다.
‘저건…?’
척 보기에도 예사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어마어마한 기운.
그 기운은 강렬한 유혹을 몰고 왔다.
저 안의 기운을 모두 취할 수만 있다면 지상 최강의 인간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이 들었다.
저건 위험하다.
무척 강렬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것을 취하려 하다가는 틀림없이 주화입마에 빠져들고 말리라.
단리정의 시선을 느낀 구윤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자네도 짐작하겠지만 저 기기에 담긴 공력은 현 시대 최고 고수들의 정기를 온전히 쓸어 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네. 이제부터 자네는 저걸 사비강 궁주님의 몸에 주입해야 하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단리정의 질문에 무랑이 나서서 대답했다.
“간단하네. 자네가 조준해야 할 것은 사비강 궁주의 심장일세. 단전을 직접 노리다가 혹여나 단전이 파쇄 될 수 있으니 심장을 노리는 걸세.”
“하지만 중단전인 심장을 노리면 운기를 하기가….”
“사비강 궁주는 이미 마나를 다뤘던 자일세. 심장에 주입된 내공을 다스리는 것에 무리가 없는 몸이란 뜻이지.”
“그럼, 저는 그냥 심장을 노리고 쏘기만 하면 되는지요?”
“그렇네.”
무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신량이 다가와 기다란 철시를 내밀었다.
철시 끝은 연결 고리가 있었는데, 기공압입기와 정확히 결합하게 되어 있었다.
조신량이 설명을 이었다.
“자네가 쏜 화살은 사비강 궁주의 몸에 맞는 순간, 관성에 의해 이 철시가 기공압입기에 압력을 가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용물이 사비강 궁주의 심장에 주사되는 것일세.”
단리정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떨렸다.
그가 잠깐 망설이던 끝에 질문을 던졌다.
“이런 방식… 혹시 성공한 적이 있는지요?”
무랑이 단리정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일세. 성공 여부는 확신할 수 없네.”
짐작은 했지만, 막상 직접 들으니 조금 충격적이었다.
단리정이 시선을 돌렸다.
천하를 호령하던 강호 명숙들이 이젠 힘없는 늙은이가 되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어딘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들은 무엇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것일까? 이 강호가 이럴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사비강 궁주님은 무엇을 위해서 저렇게 애쓰시는 것일까?’
너무 힘들기 때문일까?
아까부터 자꾸만 쓸데없는 질문이 되뇌어진다.
태산 같았던 명숙들이 이제 자신의 손짓 한 번에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씁쓸한 현실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단리정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뚝 멈췄다.
‘아버지…?’
머리가 하얗게 샌 단리추가 단리정을 자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
단리정이 나서려는데, 단리추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단리정은 아버지가 무슨 뜻으로 그런 표현을 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내 신념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 너는 이런 나를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아버지의 두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비단 아버지뿐만 아니었다.
이곳의 모든 강호인들이 같은 눈빛이었다.
그리고 단리추의 두 눈은 이렇게도 말하고 있었다.
‘내겐 훌륭한 아들이 있다!’
그렇다.
이곳의 명숙들은 그저 대의명분을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힘을 모아서 후손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나선 것이다.
당장 가까운 자들, 그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해보겠습니다. 아니,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좋아.”
무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리정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때 비령이 나서며 말했다.
“그전에 먼저 저 막을 뚫을 수 있을지 확인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에 모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이 만들어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반투명한 막.
용암으로 둘러싸인 섬 지대는 반투명한 막으로 완전히 덮여 있었다.
단리정이 화살을 쏘았을 때 저 막을 뚫어내지 못한다면 무소용이리라.
“가능하겠는가?”
구윤이 묻자, 단리정이 미간을 좁히고는 대답했다.
“우선 두 자루의 화살을 시간차를 두고 쏘는 겁니다.”
그렇다고 시위를 두 번 당긴다는 것이 아니다.
화살 두 자루를 동시에 시위에 걸고 쏘는데, 이때 시위를 잡는 방법에 따라서 약간의 시간차를 둘 수 있다.
그럼 먼저 날아간 화살이 저 방어막을 뚫어낼 것이고, 두 번째로 날아간 화살이 사비강의 심장에 박힐 수 있으리라.
“그럼 당장 시도해 보세.”
“알겠습니다!”
단리정이 얼른 활을 꺼내 시위를 잡아당겼다.
조신량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
“잠깐. 이걸로 해보게. 평범한 것으로는 뚫리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니.”
그가 내민 것은 만년한철로 만든 화살이었다.
혹시 몰라 신수각에서 딱 세 자루를 만들어 온 것이다.
만년한철을 연공해서 화살을 만들었다고 하면 모두가 미쳤다고 하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라도 미쳐야 한다.
저 무지막지한 마족을 막아내기 위해서라면.
만년한철은 세 자루지만, 무림 초고수들의 정기가 담긴 기공압입기는 딱 하나다.
기회는 한 번 밖에 없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저 만년한철 화살을 쏘아서 방어막을 뚫을 수 있는지만 보는 것이다.
단리정이 만년한철로 만든 화살을 시위에 걸고 뻑뻑하게 잡아당겼다.
그는 시위를 살짝 비틀었다.
화살이 회전하면서 날아가도록.
그리고 마침내.
패애애앵!
쒸에에에에에엑!
화살이 긴 울음을 토해내면서 섬광을 이끌고 날아갔다.
구윤이 얼른 천리경을 들어 보았다.
용암이 흐르는 지대를 건너서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마왕이 펼친 방어막에 작렬했다.
꽈자아아앙!
천둥 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강호 명숙들이 한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되었소?”
그들의 눈빛에 간절함이 읽혔다.
하지만 천리경을 내린 구윤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그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실패했습니다.”
“만년한철시로도!”
“꿈쩍도 하지 않는군요.”
용안을 가진 단리정 역시 방어막을 뚫지 못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래도 만년한철에 강기까지 입혀서 날리면 뚫리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뜻밖의 실패 소식에 호요범이 나서서 물었다.
“폭렬단을 매달아 날리면 어떤가?”
그는 오래 전 폭렬궁 단구기 때문에 폭렬단의 위력에 대해 몸소 느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단리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 역시 어렵습니다. 폭렬단으로 방어막을 깰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 폭발력에 뒤이어 날아간 화살이 표적을 잃을 겁니다. 폭발에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시간차를 두게 되면… 마왕이 다시 깨진 방어막을 복구시켜 버릴 가능성도 있고요.”
강호 명숙들의 깊은 탄식이 이어졌다.
기껏 평생 쌓은 진기를 모아서 하나의 그릇에 담았는데, 그걸 전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허참, 답답한지고! 이대로 사비강 궁주가 저 마왕의 손에 죽는 꼴을 볼 수밖에 없단 말인가!”
“사비강 궁주가 죽게 되면 이 강호에도 재앙이 시작될 거요.”
“어찌 다른 방법이 없겠소?”
명숙들의 시선이 다시 구윤과 무랑에게 향했다.
하지만 두 사람도 착잡한 심정은 마찬가지.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는 수많은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 계획은 늘 빗나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군사의 재능은 대응의 영역이다.
한데 그 대응조차도 모두 빗나가고 있다.
마왕이 싸우는 도중 저런 방어막을 펼쳐 놓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위험하군요….”
단리정이 저만치 방어막 안쪽을 보며 말했다.
용안을 가진 그는 사비강과 마왕의 싸움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사비강은 이제 거의 두 다리로 서 있는 것이 기적에 가까울 정도였다.
“모든 것이… 끝났구나.”
누군가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모든 기력을 쏟아 부은 그들은 이제 나서서 싸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
“아직… 끝나지 않았소! 헉, 헉, 헉…!”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나타난 한 남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전신에 피를 흠뻑 뒤집어 쓴 채 나타난 사내를 가장 먼저 알아본 자는 바로 은기륭이었다.
“자네는…?”
“오랜만에 뵙습니다, 관주님.”
“등 교관….”
은기륭이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랬다.
전장의 혈귀가 되어서 그들 앞에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등부형이었다.
그가 손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그 기공압입기. 내게 맡겨 주시겠소?”
“……!”
“아까부터 이 녀석이 저곳으로 가자고 하도 지랄을 해서 말이지.”
등부형이 손에 든 귀혼도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귀혼도는 연신 웅웅거리며 떨어댔다.
그리고 그 칼끝은 분명히 용암으로 둘러싸인 섬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비강과 마왕이 싸우고 있는 장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