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614화 (614/670)

# 614

귀환 마교관

614화

“그건….”

구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조신량을 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조신량의 손에 들린 요상한 모양의 기기를 보았다.

구윤의 시선을 느낀 조신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이게 바로 기공압입기일세.”

“마침내 완성이 됐군요.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나보단 저들이 더하겠지.”

조신량의 시선이 먼발치 전장으로 향했다.

정말이지 자신이 신수각에서 상상했던 전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도 마족과 무인들이 뒤섞여 호각지세를 이루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이건 뭔가?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지 않나?

그나마 헬무트 기사단이 최악의 상황을 막아 주곤 있다지만, 역시나 대마괴의 일방적인 학살은 두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아비규환. 지옥. 아수라.

그 어떤 표현으로도 지금의 참담한 광경을 오롯이 대신하진 못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저만치 먹구름이 잔뜩 몰려든 곳.

마치 하늘이 지상을 찍어 누르려는 것만 같은 광경이 펼쳐지는 곳에서는 연신 빛이 번쩍거렸다.

조신량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곳이구나!’

아마 저곳에서 사비강이 마왕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리라.

“상황은 좀 어떤가?”

조신량이 구윤을 보며 묻자, 구윤이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썩 좋지 않습니다.”

많이 순화한 표현이다.

속 심정을 그대로 전하자면, ‘이제 끝났습니다.’라고 해야 했다.

하지만 조신량이 왔다.

아직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강호 명숙들이 조신량에게 우르르 몰려왔다.

“그 물건이 우리의 희망이란 말이오?”

“과연 기물처럼 보이는군.”

“이런 것을 어찌 만드셨소? 참으로 대단하오.”

조신량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건 그저 한낱 물건일 뿐이오. 진정한 희망은 여러분의 숭고한 결단에 있는 것 아니겠소?”

연강백을 비롯한 강호 명숙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결심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된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은기륭이 무랑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럼 이제부터 무랑전주께서 말씀해 주시오. 우리가 어찌 공력을 모으면 되겠소?”

“여러분은 지금부터 내가 일러 주는 구결대로 기를 운영해 주시오. 그리고 이 부적을 한 장씩 단전에 붙이시고.”

무랑이 품에서 부적을 꺼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부적을 단전에 붙인 강호 명숙들은 둥근 원을 그리듯 크게 둘러앉았다.

그리고 무랑은 그 한복판에 마공석을 연공해서 만든 투명한 기공압입기를 놓아 두었다.

그런 다음 기공압입기에 진백이 만든 약물을 부어 넣고, 또 다른 부적을 태워 재를 넣었다.

기공압입기의 절반을 채운 그 약물에는 공청석유를 비롯한 온갖 진귀한 약재가 섞여 있었다.

준비를 끝낸 무랑이 강호 명숙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해 주시오.”

강호 명숙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동시에 운기를 시작했다.

구오오오오…!

**

“히이익! 크아아악!”

대마괴의 촉수에 휘감긴 무인 한 명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사라졌다.

“치잇!”

맹가숙은 혀를 차고는 구절창을 사납게 휘둘렀다.

철컥철컥철컥!

따다다아앙!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촉수가 강기를 입은 구절창에 튕겨 날아갔다.

그러는 사이 웨어울프 세 마리가 그의 배후를 덮쳐 왔다.

“크르러렁!”

녀석들의 날카로운 발톱이 맹가숙의 등을 사선으로 할퀴려는 순간.

쒸쒸쒸에에엑!

푸푸푹!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 세 발이 웨어울프의 급소를 관통했다.

“크아악!”

“크러럭!”

웨어울프들이 저마다 비명을 내지르면서 튕겨 나가자 맹가숙이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돌아보았다.

“영감, 집중하시오.”

화살을 쏜 사람은 다름 아닌 단리정이었다.

그는 연신 화살을 뽑아 들고 주변을 향해 마구잡이로 날렸다.

맹가숙이 픽 웃어 버렸다.

“내가 모르고 있었는 줄 알아? 네놈이 과연 의리를 지키는지 어쩌는지 보려고 놔둔 게야.”

맹가숙의 농에도 단리정은 웃지 않은 채 강호인들을 마구잡이로 흡수하고 죽여 가는 대마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마괴는 한 마디로 재앙이었다.

녀석은 적아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흡수하거나 죽여 나갔다.

근처에서 무인과 싸우던 오우거도 대마괴의 촉수에 휘감겨 흡수되었고, 고블린 수십 마리가 그대로 대마괴의 거대한 몸통에 깔려 뼈도 못 추리기도 했다.

단리정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저만치 언덕 위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곳에는 지금쯤 강호 명숙들이 모여서 군사가 고안한 최후의 수단을 준비 중이리라.

자세한 사정을 알진 못했지만, 이곳의 전투가 저곳까지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될 것이다.

게다가 언덕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기운은 이곳에서도 여실히 느껴질 정도.

수많은 무인들이 목숨을 버려 가면서도 악착같이 버티는 이유는 바로 저곳에 희망이 있으리란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 더욱 이 전선을 사수해야만 한다.

한편 뒤돌아 달려가던 맹가숙이 멈칫거리고는 단리정을 보았다.

“아니 거기서 멍청하니 서서 뭘 하고 있는 게야? 얼른 튀어!”

하지만 단리정은 대답 대신 천천히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화살 끝에는 폭렬단이 매달려 있었다.

맹가숙이 경공을 펼쳐 한 달음에 달려와 단리정의 팔을 붙들었다.

그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미쳤어? 여기서 그걸 날리면 다 뒈지는 거야. 적아 구분하지 않고! 그럼 저 대마괴와 다를 게 뭐야?”

단리정이 힐끔 돌아보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는 절대로 내가 시위를 당길 때 방해하지 마시오. 아무리 영감이라도 그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이런 미친…! 다 죽자는 게야?”

“그렇게 생각 없이 쏘진 않소.”

말을 마친 단리정이 별안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소!”

그러자 언제 달려온 것인지 능소소가 그의 곁으로 사뿐히 내려섰다.

마치 바람을 타고 선녀처럼 강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곧이어 그녀가 청의봉을 내밀며 소리쳤다.

“실피드! 저 괴물을 날려 버려!”

다음 순간.

쏴아아아아아앙!

무인들의 머리 위로 강풍이 불어 나갔다.

몇몇 무인들이 그 강풍에 휩쓸리면서 추풍낙엽처럼 날아가 버리기도 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맹가숙이 내공을 실어 소리쳤다.

“제길! 다들 엎드렷!”

저마다 칼부림을 하던 무인들이 맹가숙의 목소리에 몸을 바짝 숙이며 엎드렸다.

쒸아아아아아앙!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구구구구구우웅!

대마괴가 강풍에 떠밀리면서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워낙 덩치가 컸기 때문에 녀석은 정면으로 마주쳐 오는 바람을 쉽게 이겨내지 못했다.

능소소의 눈에는 푸른빛으로 휘감긴 실피드가 힘으로 대마괴를 떠미는 모습이 보였다.

대마괴는 그 특유의 끈적이는 촉수를 마구 휘둘러댔지만, 실체가 보이지 않는 실피드에게는 무소용이었다.

그그그그그그…!

대마괴가 계속해서 떠밀렸다.

전장에 있던 수많은 무인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버텼다.

천근추의 수법으로 무게를 짓눌러 버티는 자들도 있었고, 바닥에 양손을 깊숙이 박아 넣고 버티는 자들도 있었다.

강풍은 그들의 머리 위로 불고 있었지만, 이따금씩 휩쓸려 날아가는 무인도 더러 있었다.

듬성듬성 보이는 커다란 나무들은 뿌리째 날아가 버렸다.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천멸대원들은 그래비티 마법을 이용해서 본인과 주변 동료들을 바닥으로 가라앉혔다.

그렇게 얼마나 버텼을까?

마침내 대마괴가 백여 장 정도 밀려났을 때였다.

능소소의 눈에 실피드가 조금씩 지쳐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버럭 소리쳤다.

“더 이상은 힘들어!”

“됐어! 그 정도면.”

말을 마친 단리정이 그래비티를 펼친 상태에서 우뚝 일어섰다.

바람이 어찌나 강한지 그래비티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중임에도 몸이 앞으로 자꾸만 쏠렸다.

만약 실피드가 조금만 더 낮게 날았어도 그래비티 마법이 통하지 않았으리라.

단리정은 천천히 시위를 잡아당겼다.

화살촉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집중해야 한다…!’

그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뛰는 가슴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 꾸우어어엉!

여전히 바람에 떠밀리는 대마괴는 분노에 찬 포효를 터뜨리고 있었다.

단리정은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토이산 인근에서 특목반 동료들을 구했을 때의 일을.

처음으로 실전에서 활을 쏘았을 때의 그 감각을 되새기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초심이 떠오르는 순간.

패애애앵!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쒸에에에에엑!

푸른 빛줄기를 품은 화살이 긴 꼬리를 이끌면서 대마괴를 향해 유성처럼 날아갔다.

이윽고, 대마괴의 입이 쩌억 벌어지면서 날아드는 화살을 꿀꺽 삼켰다.

“……!”

모든 무인들이 그 과정을 보고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후.

그그그그그응…!

기묘한 소리와 함께 대마괴의 몸집이 크게 부풀기 시작했다.

마침내 검붉게 변해 버린 대마괴!

곧이어.

꽈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대마괴의 전신이 터져 나갔다.

폭발이 일어났음에도 강풍은 멈추지 않았다.

‘실피드! 마지막까지 부탁해!’

청의봉을 뻗은 능소소는 어금니를 꽉 씹었다.

실피드는 강렬한 폭발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그대로 날아갔다.

후아아아아앙!

폭기를 머금은 바람은 그대로 대마괴를 지나쳐 뒤에서 달려오던 마물들과 마족들을 휩쓸어 버렸다.

“쿠아아악!”

“크아아악!”

전신에 화상을 입은 마족과 마물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고 쓰러졌다.

후아아아앙!

마침내 협곡까지 치밀어 올라간 실피드는 이내 스르르 허공으로 흩어지며 사라지고 말았다.

대마괴가 서 있던 자리에서 협곡까지 커다란 죽음의 길이 생성됐다.

폭발이 휩쓸고 간 흔적이었다.

털썩!

그제야 능소소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맹가숙이 얼른 달려가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괜찮으냐?”

“아… 괜찮아요.”

능소소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편 바닥에 엎드려 있던 무인들은 드디어 대마괴가 죽은 것을 보고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 저놈을 죽였다!”

“저 무지막지한 놈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어!”

단리정이 능소소에게 다가갔다.

“고생했어. 덕분에 고비를 넘겼어.”

물론 이걸로 완전히 전세를 역전시킨 것은 아니다.

능소소가 다시 기력을 회복하고 실피드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터였다.

그때까지는 또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지금은 계속해서 밀리던 전선을 조금 끌어올렸다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게다가 이제 겨우 대마괴 한 마리를 처리했을 뿐이었다.

아직도 전장에는 곳곳에서 대마괴가 설치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한 걸음을 뗐다.

패색이 짙은 전장에서 희망을 보았다.

“이제 남은 건….”

단리정의 시선이 다시 저만치 언덕 위를 향했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과 기운은 아까보다 훨씬 강렬해져 있었다.

오색찬란한 빛.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수많은 강호 명숙들이 모여 만들어낸 기운.

아름답고 강해 보였다.

그때, 그림자 하나가 빠른 속도로 이곳으로 날아오는 게 보였다.

마침내 그림자는 단리정 앞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착지했다.

“단리 대주.”

낭랑한 목소리로 부른 상대는 바로 총군사의 호신위인 비령이었다.

그녀가 단리정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군사님이 찾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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