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1
귀환 마교관
611화
꾸르르릉. 꾸구웅…!
콰아아아…!
아스라이 들려오는 천둥소리.
그리고 마치 영혼의 울부짖음처럼 들리는 귀곡성.
하지만 진짜 구름이 부딪쳐 나는 천둥소리가 아니다.
공력과 마력이 부딪치는 소리.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
기와 기가 부딪치는 소리다.
그리고 귀곡성은 죽은 자들의 절규가 아니다.
실제로 살아 있는 자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사비강과 마왕은 용암으로 둘러싸인 섬 지대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고, 대마괴는 거침없이 인간들을 휩쓸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무랑은 먼발치에서 죽어가는 자들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비강은 자신이 표시한 영역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모든 일이 허사가 될 위기에 처했다.
그가 다른 자들보다 일찍 이곳 기련산으로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비강이 싸우기에 더 좋은 위치를 선별하기 위해.
그리고 그곳에 깃발 하나를 세워두었다.
이미 사비강과 말을 맞춰 놓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사비강은 그 깃발이 있는 곳까지 가지도 못했다.
아마 갈 수 없는 상황이었으리라.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비강은 자신이 언질해 두었던 장소에서 싸우려고 했을 것이다.
자신이 선별한 곳은 지형의 기운을 따졌을 때, 사비강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장소였건만.
하긴 마왕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등을 지고 그 장소를 찾아 헤매고 다닐 여유는 없었으리라.
어느 정도 감안은 한 부분이지만 역시 아쉬운 건 아쉬웠다.
만해경에 이르지 못한 그가 그나마 마왕과 싸워볼 만한 환경을 만들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은 건 또 있다.
백만 무인들이 싸우는 전장에 걸어 둔 술법이다.
실제로 협곡을 무너뜨리기 직전까지만 해도 인간들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가 걸어 둔 술법의 효과를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마괴가 나타난 이후로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말았다.
술법에 걸려들기에는 대마괴의 덩치와 그 기운이 너무 강맹했다.
거의 십 층짜리 전각 정도에 해당하는 커다란 덩치.
한데 그런 괴생명체가 인간들을 마구잡이로 흡수하면서 먹어치울 때마다 더욱 크게 부풀고 있었다.
이제는 어지간한 언덕보다도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참담한 상황이다.
백만에 이르는 무인들이 결집했지만, 이미 대마괴에게 당한 무인들만 수만 명에 이르는 상태였다.
이대로 조금만 지나면 사망자는 수십만이 될 것이고, 곧 전멸을 당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말세가 이렇게 도래하는 것인가?”
무랑은 착잡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마침 그가 선 언덕 위로 구윤이 비령과 함께 돌아왔다.
그의 얼굴이 수척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저만치 절벽 모퉁이를 돌아서 능운파에게 갔던 구윤이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그를 웃게 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한데 구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맹주님을… 보내드렸습니다.”
조금 젖은 목소리였다.
무랑이 가만히 구윤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잠시 생각하던 그가 내뱉은 건 결국 평범한 말이었다.
“잘 하셨네.”
구윤이 고개를 들었다.
두 눈동자가 잔뜩 젖어 있었다.
“지나간 일은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후회만 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가슴에 새기게. 그 후회의 흔적을 뼛속 깊이 새겨서 다시는 후회하지 않도록 할 수밖에. 평범한 대답이겠지만… 세상 만물의 이치가 평범함 속에 해답이 있는 것을.”
“인생의 선배로서 제게 뼈에 새길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간단하지 않은가? 지금도 자네는 후회할 일을 만들어 가고 있으니, 이를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새겨지지 않을까?”
무랑이 담담히 말을 뱉고는 몸을 돌려 저 멀리서 죽어 가는 자들을 보았다.
그의 시선을 쫓던 구윤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움찔거렸다.
그렇다.
지금도 자신의 작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래, 지금은 슬픔에 젖을 때가 아니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 현실을 직시하는 것. 그것이 뼛속까지 후회를 새기는 방법이리라.’
구윤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슬픔이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지만, 그것을 느끼는 것조차도 지금의 자신에게는 사치였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 그때 하염없이 울어 버리리라.
맹주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와의 추억을 기리면서 엉엉 울어 버리리라.
하지만 지금은 눈물을 머금고, 어금니 꽉 깨물고 버텨야 한다.
그리고 당장 앞에 놓인 과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그의 눈빛을 읽은 것일까?
무랑이 희미하게 웃었다.
“자네는 똑똑해서 금방 내 말을 알아들으리라 생각했지.”
“죄송합니다. 잠시 투정을 부렸습니다.”
“오히려 가끔은 인간다운 것도 좋지. 인간답지 않은 것들이 너무 설치는 시기가 아닌가?”
구윤이 먼발치로 시선을 던졌다.
“상황이 좋지 않군요.”
“좋지 않아. 준비했던 것들이 어긋나버렸네.”
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윤은 문득 오래 전 사부님이 자신에게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모든 작전은 성공할 수 없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상황은 대응이라는 영역이 있다. 군사의 진정한 재능은 바로 그 대응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최상과 차상 그리고 최악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구윤은 쓴 웃음을 지으면서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런 상황이 오길 바라진 않았지만, 결국 최악의 상황이 되고 말았군요.”
“그렇네. 결국 군사가 준비하라 했던 그 최악을 대비한 수를 이제 실시해야 할 차례지.”
무랑이 구윤을 돌아보았다.
구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 각주가 잘 해줘야겠지.”
무랑이 돌아서서 멸마궁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는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직 멸마궁에 남은 마지막 희망, 신수각주 조신량을.
**
멸마궁의 신수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조신량은 총총걸음을 옮기면서 제자들을 독촉했다.
“더! 더! 서둘러라! 이 정도로는 제대로 된 걸 만들 수 없다! 보통 돌덩어리가 아니다! 그걸 가공하려면 더 강한 열기가 필요하다!”
그러자 풀무질을 하다 지친 제자 한 명이 엉덩방아를 찧고 앉으며 투덜거렸다.
“각주님. 지금쯤이면 결판이 나지 않았을까요?”
“무슨 말이냐?”
조신량이 미간을 구기고는 제자를 바라보았다.
제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사실 궁주님은 엄청 강하시잖아요. 어쩌면 지금쯤 마왕을 무찌르고 금의환향 중일 수도 있는 거고….”
“이런 미친 새끼가!”
조신량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더니 저벅저벅 걸어가서는 제자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네놈은 군사님이 미쳤다고 우리에게 이런 버거운 일을 맡겼다고 생각하느냐? 이걸 만들기 위해서 무랑전주님도 최선을 다했다는 걸 모르느냐?”
“저, 저는 단지 괜히 우리가 헛고생을 하는 걸 수도 있으니… 그리고 또 각주님이 너무 초조해하시는 것 같아서….”
“이익…!”
조신량이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 올렸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제자를 씹어 삼킬 듯 노려보았다.
잠시 후, 그가 제자를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치더니 단검을 꺼내 들었다.
“각주님!”
화들짝 놀란 제자들이 나서서 말리려는 순간.
서걱!
신수각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딱 벌리고는 조신량을 보았다.
조신량이 스스로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잘라낸 것이다.
“각, 각주님!”
“네놈들을 이 따위로 가르친 내게 벌을 내린 거다!”
“각주님, 지, 지혈을!”
“필요 없다! 비켜라! 내가 직접 풀무질을 하겠다!”
조신량이 용광로로 다가가 직접 풀무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멱살이 잡혔던 제자가 털썩 무릎을 꿇고는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각주님!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조신량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늦으면 모든 게 끝이다. 늦지 않아야 한다. 부디…!”
그의 모습에 제자들이 너도나도 흩어져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던 제자 역시 입술을 꾹 깨물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집중하기 시작했다.
“모두 기공압입기(氣功壓入器)가 완성될 때까지 땀 닦을 생각도 마라!”
“존명!”
신수각의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이것들아, 너희들이 하는 이 단순한 일이 인류의 희망이 될 수도 있는 거다!’
조신량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휘이이이잉!
혈풍.
바람에는 피비린내가 실려 있었다.
저벅저벅…!
그 피비린내를 맡으며 언덕 위로 한 사내가 올라섰다.
저 먼발치에서 사투를 벌이는 무인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심호흡을 한 중년인이 수염을 매만지다가 나직이 말했다.
“저곳에… 화가 있겠구나.”
“가주님. 정녕 이렇게 하셔야만 하는지요?”
곁에서 죽립을 목 뒤에 걸고 있는 사내가 안타까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자 중년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자네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를 기억하는가?”
“사비강 궁주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기억하다마다요. 워낙 강렬한 인상이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나는 그를 오해했었지. 한데 그는 정말이지 놀라운 능력을 가진 자였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멸마궁주가 되어 전 강호인을 이끌고 있지. 그때 나는 그를 무시했었네. 가문의 명성만으로 그를 찍어 누르려고 했지.”
“오래전 일입니다.”
“오래전이지만… 그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네. 그 오래전의 실수를 깨우치게 했으니. 가문의 명망만 내세울 게 아니라, 이 강호를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이 진정 위대한 가문의 가주가 할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아가씨를 생각하셔서라도….”
“단화도 이런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테지.”
“…….”
“걱정 말게. 우리 가문은 건재할 걸세. 훌륭하게 성장한 단화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알겠습니다. 가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중년의 사내는 바로 목단화의 아버지인 목철우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목 가주님 아니시오?”
목철우가 돌아보자, 언젠가 본 듯한 얼굴이 서 있었다.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연 가주님이 아니시오?”
목철우를 부른 자는 다름 아닌 연우경의 아버지이자, 패검연가의 가주 연강백(延岡栢)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나눴다.
“하면 목 가주님도 그 서신을 받으시고…?”
“연 가주님도 받으셨소?”
“그랬소. 두 개의 서신 중 인장이 찍힌 서신 말이오.”
“그렇소. 나 역시 인장이 찍힌 서신을 말씀드린 거였소.”
그랬다.
강호에는 두 가지 서신이 퍼져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불특정 다수에게 뿌려진 인장이 찍히지 않은 서신.
그리고 다른 하나는 특정한 몇몇 문파에게 뿌려진 인장이 찍힌 서신.
인장이 찍힌 서신은 얼마 전 구윤이 멸마궁에 잠시 돌아왔을 때, 부군사인 담우기에게 말해 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담우기는 바로 유정에게 말했고, 그날 유정은 강호의 여러 문파를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서신을 발송했다.
그리고 이렇게 서신을 받은 자들이 이곳 기련산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 서신을 받은 자들 중 상당수가 마음의 결심을 굳힌 모양이오.”
말을 마친 연강백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을 쫓아 눈길을 던진 목철우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름만 대도 누구나 알만한 문파의 주인들이 줄 지어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하나 같이 인장이 찍힌 서신이 들려 있었다.
목철우의 눈자위가 눅눅하게 젖었다.
“모두들 감동이오. 큰 결심들을 하셨구려.”
“하하하. 그리 말씀하시는 목 가주님도 같은 입장이 아니오?”
“그렇소. 한데… 이렇게 많이 올 줄이야.”
“이게 다 사비강 궁주의 진정한 힘 아니겠소?”
연강백이 빙그레 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