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2
귀환 마교관
612화
“이런… 광경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구윤이 참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랑은 슬며시 고개를 돌려 구윤을 바라보았다.
맑은 구윤의 눈동자에는 연신 이글거리는 땅덩어리가 비치고 있었다.
무랑이 다시 저 멀리 언덕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열이 끓어 수증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른 상태.
그 수증기에는 피비린내가 진득하니 섞여 있다.
너른 땅 곳곳에 용암이 흘렀고, 땅이 갈라졌으며, 그 사이사이를 수십 만 명의 무인들이 종횡무진하며 싸우고 있었다.
고함 소리, 비명 소리,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괴물의 울부짖음.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구윤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옥도 이보다 나을 듯합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희망이라는 것에 괴롭힘을 당하진 않을 테니까요.”
“그래도 그 희망이 있기에 버틸 수 있는 게지.”
“하지만 희망이라는 건 근거가 없지 않습니까?”
“왜 없는가? 모든 희망에는 근거가 있어.”
“무슨 근거입니까?”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다는 근거.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야말로 근거 없는 희망이겠지만. 자네와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
“…….”
구윤이 미간을 좁히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자신은 정말 최선을 다한 것일까?
지금도 저 땅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어떤 이는 괴수들을 피해서 달아나다가 들끓는 용암 줄기에 빠져서 순식간에 뼈까지 녹아 버렸고, 어떤 이는 땅에서 피어오르는 유황 연무에 취해 주화입마에 걸린 사람처럼 넋을 놓고 있다가 짓밟혀 죽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괴물들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고, 어떤 이는 동료의 죽음에 절규하다가 어이없게 죽기도 했다.
한데 자신은 지금 이 언덕 위에서 그 죽음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지 않은가?
참담한 심정이 가슴을 파고드는데, 무랑의 목소리가 담담히 들려왔다.
“뭐든 지나치게 생각하면 비약이 생기기 마련일세. 그런 경험을 해본 적 없는가? 하나의 단어를 자꾸만 곱씹다 보면, 그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애매해질 때가 있다네. 모든 생각이 그와 같지.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지 말게. 지금은 그보단 넓은 안목이 필요할 때야.”
“알겠습니다.”
“저들에게는 ‘자네’라는 존재가 희망일세. 사비강 궁주와 마찬가지로 자네도 중요하지.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 마지막 한 수가 남아 있지 않은가? 통할지 안 통할지 알 수 없지만, 어떤 경우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아야 뭐든 시도하는 것 아니겠나?”
“명심하겠습니다.”
구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장을 다시 보았다.
그야말로 아귀지옥 같은 광경.
보기에도 끔찍한 대마괴 여러 마리가 무인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있었다.
그나마 괴수들에게 익숙한 헬무트가 기사단을 이끌고 대마괴를 상대하고 있었기에 조금이나마 버티는 중이었다.
하지만 역시 일방적으로 밀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사비강과 마왕이 싸우는 곳.
그곳에서는 아까부터 연신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천리경으로 들여다볼 때마다 사비강의 싸움이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무공에 대해 잘 모르는 구윤이 볼 때도 사비강보다는 마왕이 압도적으로 강해 보였다.
‘역시 마지막 방법밖엔….’
어금니를 꾹 씹은 구윤이 무랑을 돌아보았다.
“몇 명이나 올까요?”
“글쎄, 쉬운 결정은 아니지.”
“그렇지요. 무인으로서의 생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하니까요.”
“그래도… 꽤 많이 올 거라고 생각하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강호인들이 무공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구윤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내심 무랑의 말에 기대를 걸면서도 혹여나 무랑이 괜한 기대를 하다가 실망할까 봐 걱정이 됐다.
하지만 무랑의 대답을 듣는 순간 구윤은 저도 모르게 조금은 납득할 수 있었다.
“사실 강호인들보다는 사비강 궁주를 믿기 때문일세. 그에게 영향을 받은 자들이라면… 분명 대단한 결심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거든.”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구윤이 빙그레 웃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부디 그러기를.
그때였다.
바람 한 줄기가 휙 부는가 싶더니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소.”
구윤이 돌아보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얼굴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말을 건네 온 사람은 섬검목가주인 목철우였다.
그리고 패검연가주 연강백을 비롯해 강호에 내로라는 쟁쟁한 문파의 수장들이 줄지어 도착했다.
뿐만 아니라, 멸마관 시절 무한에서 인연을 쌓았던 신월문주 남운평과 만검세가주 태고령도 있었다.
그 외에도 단리정의 아버지 단리추, 혜성문주 정규홍, 청천문주 호요범 등 조금이라도 사비강과 연이 닿았던 자들은 모두 모인 셈이었다.
심지어 한때는 악명이 높았던 사파의 수장들도 있었다.
구윤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구윤이 포권을 하며 사례하자, 하나 같이 손사래를 쳤다.
“우리 살자고 하는 짓이오. 군사가 감사할 일이 아니지.”
“그렇소, 인류의 위기가 아니겠소? 다 함께 살아야지. 무공 한 자락하는 게 뭐가 대수겠소?”
“이런 일을 대비해서 우리가 제자를 키우는 것 아니겠소?”
“옳은 말이오. 이제 세대 교체도 해야지. 껄껄.”
강호 명숙들이 너스레를 떨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가볍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구윤은 이들이 얼마나 큰 결단을 하고 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감동이 차오른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보다가 마침 구윤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용천관주님 아니십니까?”
구윤이 깜짝 놀라서 말하자, 용천관주 은기륭이 흰 수염을 쓸며 웃음 지었다.
“반갑소, 군사.”
“아니, 여긴 어쩐 일로….”
“모든 이에게 서신을 보냈으면서, 내게는 보내지 않아서 서운했소.”
“하지만….”
구윤이 말을 얼버무렸다.
은기륭의 말대로 그에게만은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사비강과 그의 관계를 고려해서다.
어디까지나 자율적인 참여 독려가 혹여나 부담으로 이어질까 봐.
한데 그는 서신을 받지도 않고 찾아온 것이다.
은기륭이 그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여기 상 교관이 내게 서신에 대한 걸 알려 주었소. 마침 인근 문파에 들렀다가 그곳 문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오.”
“그러셨군요.”
“상필지라고 합니다. 나 역시 사비강 궁주를 돕고 싶어 함께 왔습니다. 한데 이렇게 명망 높은 강호 선배님들이 많이 오실 줄 몰랐습니다.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리가요! 하지만… 서신의 내용을 확실히 알고 계시는지요?”
구윤이 넌지시 묻자, 은기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사비강 궁주에게 우리의 모든 내공을 남김없이 전해주는 일이라는 것. 일반인으로서 살 수 있을 정도의 기본적인 선천지기만을 남기고 모든 걸 내주어야 한다는 것 말이오.”
은기륭의 말에 다른 강호 명숙들도 다시 한 번 다짐을 굳히는 듯 굳은 표정을 지었다.
구윤이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괜찮으시겠습니까? 선천지기까지 전수하는 겁니다. 일반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정도만을 남겨 둔 채.”
“허어, 몇 번을 말하는 거요? 군사가 우리보다는 총명하시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리 기억력이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라오.”
연강백의 농담에 강호 명숙들이 웃었다.
구윤은 정말이지 이런 광경을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사실, 이렇게 많은 자들이 모일 줄은 정말이지 생각도 못했다.
구윤은 사비강이 만해경에 이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랑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최후의 수단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온 결론.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조신량과 진백도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했다.
사비강을 만해경에 이르게 하는 방법.
그러기 위해서는 강호 명숙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오로지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위해 헌신하는 것.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어쩌면 이 또한 하늘의 계시가 아니겠는가? 가장 인간다운 방법으로 마족에게 맞서라는….”
당시 무랑은 수염을 쓸며 그렇게 말했다.
이후 무랑은 곧바로 최후의 수단을 위해 부적을 제조하기 시작했고, 조신량은 마공석을 연공해서 기공압입기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구윤은 강호 명숙들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지시했다.
서신의 내용은 담우기가 직접 작성한 것인데, 그의 진심어린 글이 강호 명숙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그야말로 강호인들이 하나가 되어야만 이룰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을 최초로 생각한 사람은 구윤이었고, 기공압입기를 만드는 건 조신량, 압입기에 들어갈 수액을 제조하는 건 진백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 기공압입기에 어마어마한 공력을 모을 사람들은 강호 명숙들이었으며, 이 내공을 액화시키는 술법을 맡은 건 바로 무랑이었다.
“자, 이제 어지간히 모인 것 같으니, 서두릅시다. 강호 동도들이 희생당하는 꼴을 더 이상은 지켜보기 힘들구려.”
누군가 버럭 소리치자,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여들었다.
수십 명의 강호 명숙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기운을 뿜어대고 있으니, 구윤은 절로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 시행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죄송합니다만,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여러분들의 공력을 담을 기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신수각주님이 최선을 다하고 계시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허어, 이런. 그렇다면 당장 저곳으로 내려가서 우리도 힘을 보탭시다.”
“좋소! 내 악마들의 모가지부터 썰어 버려야 속이 시원하겠소!”
여기저기서 소리치는 목소리.
하지만 연강백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차분한 말투였지만, 내공이 실려 있었기에 모두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은 섣불리 움직일 게 아니라,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소. 만에 하나 몸을 다치게 되면 내공을 전수하지 못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러니 차라리 이 틈에 잠깐이라도 내공 수련을 해서 조금이라도 질 좋은 공력을 전수해 주는 것이 어떨까 싶소.”
“과연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만검세가주 태고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그러자 너도나도 동의의 뜻을 나타내며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맑은 기운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마침 은기륭이 다가와 무랑에게 넌지시 물었다.
“한데… 이들의 기운이 모두 제각각인데다 정파가 아닌 자들도 있는데, 그 공력을 전부 주입해도 괜찮겠소?”
무랑이 시선을 돌려 먼발치의 사비강을 보며 말했다.
“나도 확신할 수는 없소. 다만… 그는 천해경의 끝자락에 있으니, 그 모든 공력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기대를 걸 수밖에. 그리고 그게 아니면 당장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말이오.”
“그렇군. 잘 알겠소.”
말을 마친 은기륭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내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구윤이 무랑의 시선을 쫓아 사비강을 보았다.
‘궁주님. 보이십니까? 여기에 궁주님을 돕기 위해 많은 분들이 모였습니다. 각자 저마다의 인생을 걸고! 그러니… 부디 힘내 주십시오!’
구윤은 어금니를 가만히 씹었다.
이런 최후의 수단을 생각해 두었다는 건 사비강에게 따로 말하지 않았다.
혹여나 그가 반대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수십에 이르는 강호 명숙들이 공력을 나눠 주기 위해서 무인의 인생을 포기한다고 하면…?
사비강이 거부할지도 모른다.
해서, 그가 모르게 준비해 둔 최후의 수단이었다.
게다가 통할지 안 통할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지 않던가?
이제는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으니, 하늘에 맡겨야 한다.
‘신수각주님, 이제 모두 모였습니다! 여긴 준비가 끝났습니다! 서둘러주십시오!’
그때.
꽈자아앙!
짜르르르르릉!
사비강과 마왕이 싸우는 장소에서 유난히 큰 천둥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