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2
귀환 마교관
602화
멸마궁주 사비강이 사망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싸웠다.
멸마궁을 습격한 마족들은 전멸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불운이 따랐다.
적장이 최후의 수단으로 동귀어진을 시도했다.
사비강 궁주가 기력이 쇠해진 순간을 이용한 역습이었다.
강호인들이여!
우리는 희망을 잃었다.
강호를 떠받치고 있던 두 개의 기둥을 모두 잃었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이 강호에 발을 들인 이상, 우리는 불굴의 의지로 의협을 쫓지 않았던가?
정이 무엇이고, 사가 무엇인가?
우리 모두는 강호의 은원에 얽힌 관계.
하지만 이 강호는 이제 마족과 은원관계를 두고 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 가장 먼저 정리되어야 할 관계가 아니겠는가?
이제 우리는 강호를 지켜야 할 때다. 이것은 대의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발을 디딘 이 세상을 지키고자 함이다.
내가 사랑하는 배우자, 내가 사랑하는 자녀, 내가 사랑하는 부모를 지키기 위함이다.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지만, 이 뜻을 모아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마족과 대항하여 싸울 수 있다.
어차피 마족이 이 강호를 집어삼키게 되면 모든 것은 끝난다.
피비린내 나는 이 강호에 발을 들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질 수는 없지 않은가!
강호 동도들이여!
이제 우리는 저 악랄하고 간악한 적들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이 강호가 그냥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사는 이 강호에는 두 개의 기둥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하나하나가 각각의 기둥이 되어 이 강호를 지탱하고 유지하고 있었음을!
이제 우리는 수천, 수만의 기둥이 되어 무너지려는 강호를 떠받치고자 한다.
강호인들이여!
우리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모이자!
강호 동도들이여!
분노하자!
이것은 정의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싸워서 이기자!
**
어디에도 인장 따위는 찍혀 있지 않았다.
누가 보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최근 강호에 퍼진 이 전서들이 뭔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흐음.”
창천문주 호요범은 서신을 접고는 침음을 흘렸다.
그 곁에서는 적랑대주 강능초가 호요범의 눈치를 살폈다.
“사비강 궁주가… 죽었다는군.”
강능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가장 먼저 의심이 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호요범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가 그리 쉽게 죽을 인물이 아님을. 하나… 이 서신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군.”
사비강 궁주가 죽었다.
멸마궁에서는 별다른 발표를 하지 않았다.
다만 강호에 퍼진 이 서신이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실제로 이 서신대로 강호인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어쩌면 강호인들은 사비강의 생존 유무가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단지 그들을 자극할 만한 계기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이 서신이 불을 지폈다.
누가 어디서 보낸 것인지도 모를 이 서신이 강호 주요 문파마다 퍼졌다.
‘그를 만난 게 벌써 수년 전이군.’
호요범은 사비강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인연이었다.
폭렬궁 단구기가 안강의 모든 문파를 멸문시키려고 했을 때, 그것을 막은 사람이 바로 사비강이었다.
만약 그때 사비강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호요범 역시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리라.
당시 사비강은 생도들의 연무기행을 위해서 안강을 지나가는 길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사비강은 마치 단구기의 일을 처음부터 예견한 듯했다.
기연이 따로 있을까?
이게 바로 기연이 아니겠는가?
호요범은 다시 서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강능초가 넌지시 물었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호요범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어쩌긴. 강호를 지켜야 하지 않겠나?”
강능초의 표정이 상기됐다.
그가 힘차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
사비강은 매설란과 함께 복도를 따라 걸었다.
매설란이 말했다.
“무랑전주님은 먼저 기련산으로 가셨고, 멸마궁의 모든 병력이 기련산의 흑성 인근에 집결했어. 지금도 강호인들이 기련산 인근으로 속속 모여드는 중이야. 그 수가 수십만에 이르고 있어. 이걸로 최후의 진격을 위한 준비는 끝난 셈이야.”
“당신은?”
“나도 이제 기련산으로 가야지.”
매설란이 생긋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구윤과 함께 스크롤을 이용해서 마지막으로 기련산으로 갈 예정이었다.
지금은 당이협이 멸마궁도들과 강호인들을 규합해서 이끌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자신이 가면 멸마궁도는 매설란이, 그 외 강호인들은 당이협이 통솔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 모두를 총괄 지휘하는 건 총군사 구윤이 될 것이다.
한때 무림맹의 총군사였던 그가 상징적으로도 가장 적합했다.
“뭐, 결국 내 죽음이 강호인들에게도 통한 건가?”
사비강의 말에 매설란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았을까?”
사실 조금만 더 자세히 따지고 든다면 허점투성이 소문이다.
실제로 그 많은 멸마궁도의 입을 단속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는 사실 사비강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가까운 지인에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비강의 죽음을 믿을 것이다.
원래 가짜 소식은 더 빨리 사람들의 입을 타고 오르내리기 마련이다.
게다가 안 좋은 소식이라면 더욱 그렇다.
멸마궁주의 사망.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진 않다.
오히려 그 진실을 가리고자 하는 이들을 통해서 더욱 빨리 퍼져 나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부풀고 부푼 소문을 서서히 믿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분노가 터진다.
구윤은 그걸 노린 거다.
“사람들은 그저 희망을 지키고 싶었을 거야. 그리고 그 희망이 사라졌으니, 최후의 저항을 하고 싶었던 거지. 오히려 모든 희망이 무너졌을 때, 인간은 무모할 정도로 용감해지기도….”
한참 말을 이어 가던 매설란이 문득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사비강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물었다.
“왜, 왜 그렇게 빤히 보는 거야?”
“그냥. 봐 두고 싶어서.”
“불길한 소리 하지 마. 꼭 죽으러 가는 사람 같잖아.”
“죽으러 가는 것 맞아.”
“그래도 진짜 죽는 건 아니잖아!”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 진짜 죽는 건 아니지.”
어느새 대화를 나누는 동안 두 사람은 집무실을 앞두고 있었다.
사비강이 문을 열기 전에 멈춰 서며 말했다.
“그 희망을 절대로 놓으면 안 되겠군. 나도 소중한 누군가를 지켜야 하니까.”
“그렇… 흡!”
순간 사비강의 입술이 매설란의 입술을 덮쳐 왔다.
갑작스러웠지만 매설란은 거부하지 않았다.
대신 스르르 눈을 감고 두 팔로 사비강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뜨거운 입맞춤이 한동안 이어졌다.
사비강이 매설란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조심해.”
“당신이야말로.”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그가 문을 활짝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자들이 보였다.
바로 능운파와 구윤이었다.
구윤이 다소곳한 자세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셨습니까?”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능운파를 가만히 보았다.
“기다리게 했군.”
능운파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니 그 정도는 이해해 줘야지.”
“그런가? 생각보다 마음이 넓군.”
“그렇기보단 사사로운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걸세.”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 이제 구 군사를 풀어 줄 텐가? 우리 쪽 병력을 이끌 사람이 필요해서.”
능운파가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러고 보니 이 비슷한 작전을 예전에도 자네와 한 적이 있었던 것 같군.”
그랬다.
몇 년 전, 능운파는 사비강과 함께 죽음을 위장한 적이 있었다.
능운파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자네 혼자 죽어야겠군.”
말 속에 은근히 뼈가 있었다.
사비강은 동요하지 않고 대꾸했다.
“죽는 게 처음도 아닌데 어려울 것도 없지. 이 몸은 죽어도, 죽어도 계속 살아나거든.”
“그거 좋겠군.”
말을 마친 능운파가 걸음을 옮겼다.
“그럼 가지.”
사비강이 두 말 않고 돌아섰다.
둘이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였다.
“궁주님.”
구윤이 무거운 목소리로 불렀다.
사비강이 돌아보자, 그가 주먹을 꾹 말아 쥐고는 말했다.
“반드시… 이겨 주십시오.”
사비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 선 매설란에게 한 번 시선을 주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심전심.
말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통하고 있었다.
매설란 역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때론 한 마디 말보다도 한 번의 눈빛이 더 많은 의미를 담을 때가 있는 법.
사비강은 그렇게 멸마궁을 나섰다.
**
휘이이이이!
한기를 품은 칼바람이 무랑의 뺨을 스쳤다.
하얗게 늘어진 수염에 서리가 송골송골 맺혔다.
정말이지 대단한 추위였다.
하지만 무랑도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만치 아래로는 넓은 평야가 보였고, 바로 옆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구쳐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동혈이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절벽 중턱쯤이었다.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저 아래에서 마족과 인간들이 뒤엉킬 가능성이 컸다.
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좋겠군.’
무랑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바닥에 뿌리기 시작했다.
**
멸마궁 인근의 소환지.
얼마 전 트라잔이 병력을 이끌고 이동했던 곳이기도 하다.
소환지에 머무는 마물들이 제법 보였지만, 녀석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사비강과 능운파에게 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마물들의 시체를 쌓으면서 전진하던 둘은 마침내 둥근 단상에 세 개의 기둥이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곳까지 다다랐다.
흑성으로 향하는 게이트였다.
게이트가 꿈틀거리는 것을 본 사비강이 싸늘하게 웃음 지었다.
“역시 게이트가 아직 작동하는 걸 보니, 이쪽에서 쳐들어가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군.”
“아니면 바라고 있는 지도.”
“하긴.”
전투를 한다면 역시 자기 집 앞마당이 편하지 않겠나?
굳이 테라포밍을 하느라 수고를 할 필요도 없을 테니.
그럼에도 멸마궁은 흑성을 쳐야만 한다.
사비강이 온전히 마왕에게만 집중하기 위함이다.
능운파가 사비강을 돌아보면서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자, 그럼 이제 죽어 주실까?”
사비강이 품에서 단환 하나를 꺼냈다.
“실수는 하지 마.”
“잔말 말고 죽기나 하라.”
능운파가 이죽거리자, 사비강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가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사령환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잠시 후, 사비강의 몸이 차갑게 식었다.
능운파는 천천히 사비강에게 다가가 맥을 짚어 보았다.
‘과연.’
신기하게도 사비강은 완전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반듯하게 앉아 있는 자세이긴 했지만, 맥박도 뛰지 않고 호흡도 멈췄다.
하지만 사비강의 말에 의하면 그 와중에도 의식은 멀쩡하다고 했다.
정말이지 신기한 약이 아닐 수가 없다.
‘사파 나부랭이들은 별의 별 것을 다 만든다니까.’
능운파가 피식 웃고는 사비강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자신을 만든 게 사비강이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가장 죽이고 싶은 자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면…?’
이처럼 무방비 상태로 있다면, 단 일 수에 죽일 수도 있지 않을까?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솟구쳐 올라왔다.
손만 뻗으면 죽일 수 있다.
한 번의 출격으로.
능운파의 손이 천천히 사비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손길이 사비강의 목덜미에 닿는 순간,
“네놈이야말로 실수하지 마라.”
싸늘하게 읊조린 능운파가 사비강을 어깨에 들쳐 멨다.
여기까지 와서 소탐대실할 수는 없지 않나?
잠시 후, 그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쒸아아아아아!
묘한 소리가 울리더니 곧 능운파의 모습이 소환지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사비강도 그곳에 없었다.
**
휘이이이잉!
차가운 바람이 게이트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잠시 후.
파지지지짓!
게이트가 마구 꿈틀거리더니 뇌전이 흐르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그곳에 나타났다.
바로 사비강을 어깨에 들쳐 멘 능운파였다.
저벅저벅.
게이트에서 내려온 그가 고개를 꺾어 들었다.
흑성이 먹구름을 뚫고 까마득하게 솟구쳐 올라 있었다.
“그럼… 가볼까?”
말을 마친 능운파가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