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603화 (603/670)

# 603

귀환 마교관

603화

아들러는 성벽을 거닐다가 먼발치를 내다보며 턱을 매만졌다.

그의 곁에는 타몬스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글레이드가 서 있었다.

휘이이이이잉!

차가운 칼바람이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결에는 저 아래에 운집한 인간들의 살기가 섞여 있는 듯했다.

백만에 이르는 강호인이 한 자리에 모인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내뿜는 다양한 기도가 모여 하나의 커다란 구름을 만들고 있었다.

강호가 탄생한 이래 단 한 번도 이렇게 많은 강호인이 모인 적이 없으리라.

그곳에는 정공을 익힌 자와 사공을 익힌 자가 섞여 있었다.

심지어 마공을 익힌 자들도 있었다.

마공을 익힌 자들 대부분은 사실 마계를 섬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강함을 추구하다 보니 마공을 자연스럽게 접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마공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계가 인간을 위협하는 지경까지 이르자, 그들 역시 생존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선 것이다.

후우우우웅!

이번에는 좀 더 짙은 농도의 바람이 불었다.

물론 바람결에 묻은 살기도 더해졌다.

아들러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중얼거렸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그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중원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힘든 싸움이 될 줄 몰랐다.

마계의 시간으로 대략 석 달이면 정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넉넉잡은 기간이었다.

한데 평정은커녕 마족이 내몰리는 처지가 아닌가?

인간을 상대로 마족이 이렇게까지 고전을 치를 줄이야.

곁에 서 있던 글레이드도 무언으로 긍정했다.

예전 같았으면 코웃음을 쳤으리라.

한낱 벌레나 다름없는 인간이라며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이은 패전 소식에 그는 더 이상 인간을 얕잡아 보지 않았다.

“동태가 어떤가?”

“곧 치고 들어올 듯합니다. 사기가 높습니다.”

“잡초 같은 놈들.”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밟아도, 밟아도 일어서는 저 근성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단 말인가?

‘사비강….’

혹시 그놈 하나가 저 중원인들을 변하게 만들었던가?

‘그러고 보니….’

사비강의 의식을 장악하기 위해 수를 쓴 적이 있었다.

능운파를 마족으로 만든 바로 그날.

하지만 그는 사비강의 기억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보았다.

그때 사비강의 기억 속에서는 중원이 힘없이 무너졌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말 ‘사비강’이라는 단 한 명의 존재가 이렇게까지 중원의 명운을 바꿔 버렸다는 건가?

“긴장하게. 이제 정말 마지막 전쟁이 벌어지는 걸세. 이 전쟁에 폐하와 우리의 운명이 걸렸네.”

“명심하겠습니다.”

“아니, 명심하는 걸론 부족해. 무조건 이긴다는 일념으로 싸워야 해.”

“무조건 이기겠습니다.”

글레이드의 대답에 아들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대마괴를 깨우겠네.”

“……!”

글레이드가 눈을 부릅뜨고는 아들러를 바라보았다.

대마괴를 전투에 참가시키는 건 정말이지 특별한 경우였다.

대마괴는 마족들조차도 감당이 되지 않을 때가 있기에.

인간의 온갖 부정적 감정과 한으로 응집된 대마괴.

녀석은 살아 있는 재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칫 대마괴는 잘못 다스리게 되면 마족들에게도 꽤나 골치 아픈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글레이드의 시선을 느낀 아들러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최후의 전투가 될 걸세. 굳이 아낄 건 없지. 꺼낼 수 있는 모든 걸 꺼내야지.”

“알겠습니다.”

“자네… 어찌 생각하는가?”

글레이드가 고개를 들고 아들러를 바라보았다.

질문의 요지를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들러가 그를 돌아보았다.

“사비강 말일세. 저들은 사비강이 죽었다면서 저렇게 분개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자네도 정말 사비강이 죽었다고 생각하는가?”

“죄송합니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아들러가 피식 웃었다.

그렇다.

바로 이런 모습이 마족이다.

중요한 건 사비강의 생사 여부가 아니다.

눈앞의 벌레들을 최대한 철저히 짓밟는 것.

그렇게 해서 이들을 완전히 평정하고, 중원인들을 대거 납치해서 실험재료로 들고 가는 것.

목적과 수단.

그게 전부다.

하지만 아들러는 자꾸만 사비강의 의식 세계에 들어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강했다.

사비강에게는 과거였고, 자신에게는 미래였던 어느 날.

사비강은 자신을 처절하게 고문했다.

그 고통이 지금도 되새겨질 정도로 생생했다.

그리고 자신은 사비강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사비강이 찾는 고대의 마법서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사비강이 그 마법서를 들고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에게서 반역의 조짐을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걸 밝힌 직후, 사비강은 자신을 가차 없이 죽였다.

그리고… 이제야 알았다.

그때 사비강은 회귀를 준비했다는 것을.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을 성공시켰다는 것을.

고대 마법서를 본다고 한들 누구나 회귀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적힌 오의를 깨닫기 위해서는 엄청난 지식이 필요하다.

수천 년을 산 마족들도 그 오의를 깨닫지 못해 회귀를 하지 못한다.

한데… 사비강은 해냈다.

인간의 집념이란 얼마나 무서운가?

‘한데… 그 인간이 죽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그때였다.

“음? 누군가 흑성으로 오고 있습니다.”

글레이드가 저만치 앞을 내다보며 말했다.

아들러가 상념을 깨고 눈을 찌푸렸다.

과연 누군가 빠른 속도로 흑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능운파…?”

흑성 성문에 다다른 자는 다름 아닌 능운파였다.

게다가 그의 어깨에는 놀랍게도 사비강이 축 늘어져 있었다.

능운파가 흑성을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문을 열어라. 본좌가 사비강을 죽이고 돌아왔다. 여기 사비강의 시체가 있다.”

**

휘우우우웅!

매설란은 칼바람에 맞선 채 낮은 언덕 위에 올라섰다.

백만 강호인들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았다.

목숨을 건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있는 강호인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다부진 의지가 가득했다.

매설란은 가슴이 마구 뛰었다.

분명 최후가 될지도 모를 전투를 앞두고 있음에도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벅차올랐다.

강호 역사 이래 이렇게 많은 강호인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친 적이 있던가?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 되리라.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사비강, 당신이 이들을 하나로 모았어. 반드시 버텨낼 게.’

마음을 다잡은 매설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는 최후의 전투를 치를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울렸다.

별로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공력이 담겨 있었기에 강호인들의 귀에 또렷하게 박혀 들었다.

“이 땅에 허락 없이 발을 디딘 저들은 그동안 강호를 짓밟고 강호인들을 능멸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대가를 가르쳐야 할 때입니다. 저들에게 강호의 은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확실히 인식시켜야 할 때입니다.”

매설란이 말을 잠시 끊고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우우우우우웅.

고요함 속에서 응축된 기가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인들 모두 끓어오르는 투기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저 마족들과 달리 언젠간 죽습니다. 마족에 비하면 하루살이처럼 허무한 인생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끝이 있기에 우리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그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 짧은 인생이기에 우리는 악착같이 살아간다는 것 또한 저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웃음 짓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저들에게 가르쳐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강호 동도들이여! 여러분이 진정한 강호의 영웅입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마침내 억눌려 있던 투기와 함께 함성이 폭발했다.

파아아아아아앙!

백만 강호인들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기파가 사방으로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

“자, 이제 한 번 맺으면 죽을 때까지 끊을 수 없는 강호의 은원을 가르쳐 줍시다!”

“와아아아아아!”

백만 강호인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진군하기 시작했다.

**

“폐하! 강호인들이 집결하여 본성으로 진군해 오고 있습니다!”

대회의장 문이 열리면서 마족 하나가 얼른 달려 들어와 보고했다.

태좌에 앉은 마왕 타란트는 여전히 나른한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툭 던지듯 물었다.

“얼마나 되는가?”

“대략 백만에 이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흐음. 백만이라… 사비강의 죽음에 분개하고 있다지?”

“그렇습니다!”

“사비강이 죽었을 리가.”

타란트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때.

“폐하! 능운파가 사비강의 시체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아들러 백작이 대회의장으로 들어서며 소리쳤다.

순간 장내에 모여 있던 마족들이 웅성거리면서 서로를 번갈아보았다.

타란트 역시 뜻밖의 소식에 몸을 바로 세웠다.

“사비강의 시체를?”

“예, 폐하!”

아들러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옆으로 물러나자, 커다란 문 사이로 능운파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과연 그는 어깨에 사비강의 시체를 짊어지고 있었다.

능운파가 사비강을 바닥에 툭 내던지듯 두고는 고개를 숙였다.

“폐하! 사비강을 죽이고 그 시체를 가져왔습니다!”

타란트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과연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자는 사비강이 분명했다.

일전에 직접 그를 만나고 왔기 때문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마족 수뇌들이 수군거리자, 타란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들 뭣들 하는가? 여기서 수다 떨고 있을 여유는 없을 것 같은데.”

“아! 그럼 저희들은 물러나 전투에 임하겠습니다!”

수뇌들이 얼른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서둘러 대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벌써 밖에서는 폭발음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인간들이 작정을 하고 흑성을 치는 게 분명한 모양이었다.

이제 장내에는 아들러와 능운파 그리고 타란트와 사비강의 시체만 남아 있었다.

타란트가 미간을 좁히고는 아들러를 보았다.

“확인해 보았나?”

“예, 생명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들러는 허리를 숙여 보고하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확인한 결과 분명 사비강은 죽은 상태였다.

“그렇군. 아들러 백작은 가서 대마괴를 풀어 놓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아들러가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타란트가 사비강의 시신을 보며 무심한 투로 말을 뱉었다.

“시체치고는 상당히 깨끗하군.”

“외상보단 내상을 심하게 입어서 그렇습니다.”

능운파의 대답에 타란트가 그를 보았다.

“자네가 죽였단 건가?”

“예, 기력이 다한 틈에 기습을 해서 죽일 수 있었습니다.”

능운파가 공손한 자세로 대꾸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다.

타란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단상의 계단을 내려왔다.

‘과연 자리에서 일어섰을 뿐인데도 존재감이 다르군.’

능운파는 내심 마른 침을 삼키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타란트가 사비강 앞에 멈춰 섰다.

아들러의 말대로 사비강에게서는 그 어떠한 생명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피부는 창백했고, 체온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호흡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굳이 만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뭐든 확실한 게 좋은 법이지.”

입매를 비튼 타란트가 손바닥을 펼쳐 사비강의 얼굴을 겨눴다.

그의 손바닥에서 강렬한 기운이 응집하는 순간.

파밧!

쒸에에엑!

사비강이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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