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1
귀환 마교관
601화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던 능운파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과연…!”
강하다.
사비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다.
그러고 보니 사비강은 늘 그랬다.
언제나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그의 무공을 보고 놀라지도 않았다.
한데 이번에는 달랐다.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강함!
절대적인 힘!
온몸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였다.
멸마궁 인근은 그야말로 지옥도로 변해 있었다.
시체가 즐비한 곳에서 검붉은 강기 줄기가 산만하게 뒤엉키면서 마구 자라났다.
그리고 그 강기 줄기에 얽힌 마족들은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잃어 갔다.
비명이 난무하고, 피가 낭자했으며 시체가 쌓여 갔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광경 위에서 사비강은 도도한 자세로 내려다보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편 능운파 곁에서 내심 마음을 졸이며 사태를 지켜보던 구윤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어떤 생명체가 절대적인 힘 앞에서 이렇게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공포로 다가왔다.
‘사비강 궁주님…! 설마 만해경을 이루신 겁니까?’
구윤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침 옆에서 툴툴거리며 웃는 소리에 그가 시선을 돌렸다.
“큭큭큭. 하하하하!”
능운파가 느닷없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한참이나 웃어젖힌 그가 문득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더니 저만치 허공에 뜬 사비강을 빤히 응시했다.
“그래, 그래야지. 사비강. 그 정도는 되어야지 쓸 만한 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말을 마친 능운파의 입매가 히죽 치켜 올라갔다.
그 웃음은 어딘지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이거… 기대되는군. 마왕을 제거할 순간이…! 저 멋진 도구로 말이야!”
구윤이 그런 능운파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혹,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걱정? 무엇을? 마왕을?”
“……”
구윤은 답하지 않았다.
다만 무언으로 긍정했다.
능운파의 이런 행동이 마왕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능운파가 차갑게 웃었다.
“나이가 들면 느는 것은 주름과 걱정이라지. 하지만 나는 다시 젊음을 얻었고, 주름도 펴졌다. 펴진 주름만큼이나 걱정도 사라졌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 군사가 말한 그 최후의 작전을 차근차근 진행할 차례가 되겠군.”
말을 마친 능운파가 몸을 휙 돌렸다.
**
마족이 완전히 전멸했을 때, 사비강은 천천히 내궁 입구로 내려섰다.
부상을 당한 멸마궁도들이 사비강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들 중 누구도 환호성을 내지르거나 박수를 치지 않았다.
그러기엔 사비강이 보여준 무위가 너무나 격이 달랐던 것이다.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은.
경외감이 지나치면 감탄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 기회를 통해 깨달았다.
역시나 제일 먼저 매설란이 힘겨운 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최선을 다해 봤는데… 결국 이 지경이 됐네. 미안해.”
그녀는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더 시간을 끌고 싶었다.
아니, 이기고 싶었다.
보란 듯이.
그동안 당신이 내게 많은 것을 베풀었고, 그것을 이용해서 이만큼 해냈다고 당당히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세상이 만만치가 않다.
기껏 꾸역꾸역 올라왔다 싶으면, 항상 더 강한 무언가가 나타난다.
그래서 분했다.
괜히 울컥 울분이 치밀었다.
사비강을 볼 낯이 없었다.
하지만 사비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덕분에 내가 살았지.”
빈말이 아니었다.
만약 방호단을 이끄는 천세명이 방벽에서 최후까지 버티지 않았더라면, 외궁을 지키던 궁도들이 마지막까지 마족의 발길을 붙들지 않았더라면, 천멸대와 신생조가 최선을 다해 막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녀가 트라잔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리지 않았더라면, 사비강은 의식을 되찾기도 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리라.
모든 이가 그렇게 힘을 모아서 자신을 살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낸 것이다.
그렇다.
지금 자신이 가진 이 힘은 그렇게 얻어진 것이다.
결코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룬 것이 아닌.
‘하지만….’
사비강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힘이 넘쳤다.
환골탈태까지 이루었다.
다만…
“다행히 살아남았군.”
문득 들려온 목소리.
사비강이 고개를 들어보니 무랑이 뒷짐을 진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과연 대단한 경지로세. 강기를 이런 식으로 부릴 수 있다니. 자연의 조화를 주무르는 듯하군.”
“아직 멀었소.”
“알고 있네.”
뜻밖에도 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안타깝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만해경… 도달하지 못한 게지?”
순간 모여 있던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사비강을 돌아보았다.
지금 무랑이 뭐라고 물었나?
만해경에 이르지 못했느냐고 물었나?
그럴 리가!
하면 지금 보여준 이 신의 경지에 다다른 무위는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사비강의 입에서는 그들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언하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못했소. 아직도 천해경에 머물러 있소.”
“역시….”
무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자네가 나타났을 때, 만해경에 이른 게 아닌가 생각했네. 하지만… 와 닿지 않더군. 물론 만해경의 경지에 대해서 나도 아는 바가 없으니 착각일 수도 있단 생각은 했지만… 자네가 스스로 그렇게 확신한다면 분명 만해경에는 이르지 못한 게군.”
사비강은 씁쓸한 표정으로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매설란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만해경을 이루지 못한 거야?”
사비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역시 처음 깨어났을 때는 만해경을 이룬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다.
그 지옥 같은 통증에서 벗어나 버젓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만해경에 이른 것만 같았다.
분명 환골탈태까지 겪으면서 더 강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깨달았다.
자신이 만해경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만해경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다.
“나야말로 애써 준 두 사람에게 미안하군.”
옹기승과 흑귀를 두고 한 말이었다.
두 사람은 자신에게 그 막강한 힘을 넘겨주면서 평생 무인의 삶을 버린 채 살아가야 했다.
한데 그들의 염원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매설란이 얼른 말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정말 강해진 거잖아. 어쩌면 마왕에게 이길….”
“아니, 마왕은 이보다 더 강하다.”
모두가 얼음이 된 것처럼 굳어 버렸다.
맙소사.
마왕은 도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땅바닥에서 용솟음치는 강기들을 두 눈으로 보았는데, 마왕은 그보다도 강하단다.
그런 존재가 실재한다는 게 가능한가?
“하지만 능 맹주가 함께 싸운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당이협이 다가오며 물었다.
사비강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 아주 어쩌면.”
하지만 대답을 듣는 무랑은 알고 있었다.
불가능하리란 것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비강 말대로 어쩌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둘이 일심동체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서로가 같은 목적과 같은 의도를 가지고, 같은 적을 두고 싸워야만 겨우 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사비강과 능운파는 생각이 서로 다르다.
둘은 언제든 기회가 되면 서로를 등질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 상태에서 마왕을 이길 가능성은 일 할도 채 되지 않으리라.
‘역시 일 푼의 가능성을 뚫는 것은 헛된 기대였던가?’
무랑이 물었다.
“이제 어찌할 텐가?”
사비강이 다시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소?”
무랑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네의 의지에 달렸을 테지. 나는 최대한 자네를 도울 뿐.”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그럼 괜한 걸 묻는군. 어쩌긴 뭘 어쩌겠소? 예정대로 진행해야지.”
“흑성으로 가겠다는 건가?”
“가야지. 더 이상 마왕은 내게 시간을 주려고 하지 않을 거요.”
이쯤 되면 마왕이 직접 나설 것이다.
그전에 허를 찌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구윤이 고안한 그 작전은 자신이 마왕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마왕이 믿든, 안 믿든.
적어도 어떠한 기력 소모도 없이 오롯한 상태로 마왕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
하지만 전쟁 중에서는 그런 기회를 만들기가 어렵다.
수많은 적들을 뚫으며 다가가야 한다.
그럼 절대로 마왕을 이길 수 없다.
오늘처럼 수만의 마족과 마물을 단숨에 휩쓸게 되면 마왕을 상대할 때 기력이 턱없이 부족해진다.
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나는 먼저 가서 준비를 해두겠네.”
사비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사비강은 방을 정리했다.
옷가지를 가지런히 하고, 침상을 단정하게 다듬었고, 탁자와 선반의 먼지를 털어냈다.
그러다가 문득 피식 웃음이 나왔다.
초환당에서 몸을 회복하고 있는 옹기승과 흑귀가 생각나서였다.
그 두 사람도 사비강에게 힘을 넘기기 전 비슷한 행동을 했다고 들었기에.
이러고 있으니 마치 죽음을 준비하는 행동 같지 않은가?
하지만 왠지 큰일을 앞두고 뭔가를 정리하는 마음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단지 주변을 정리하는 것이 아닌, 마음을 정리하는 행위라는 것을.
좀 더 하나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그렇게 방 정리가 거의 다 끝나 가고 있을 때쯤이었다.
끼익…!
문 열리는 소리에 이어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사비강은 돌아보지 않고도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왔어?”
“깔끔하네.”
청아한 목소리.
매설란이 방을 둘러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울리지 않게 깔끔해.”
“그런가? 그냥 좀 정리해 두고 싶었어.”
“긴장 돼?”
매설란의 물음에 사비강이 뚝 멈추고는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깊어져 있었다.
단순한 질문인데, 단순하게 대답할 수 없는 이 묘한 기분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한참 생각을 헤매다가 나온 대답은….
“글쎄….”
사비강이 피식 웃으며 창가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최근 뜨는 태양보다도 지는 해를 많이 보게 된다.
하는 것도 없이 하루 종일 뭔가에 쫓기듯 움직이다 보면, 해가 언제 떠올랐는지 관심도 없다.
그러다가 조금 여유가 생긴다 싶으면 저렇듯 해가 저물고 있다.
문득 인생이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뭔가를 위해서 악착같이 달려가다가 어느 순간 깨닫고 멈춰 서면 이미 저물어 가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은 회귀하고 나서 오랜만이군.’
사실 수십 년의 세월을 산 사비강이다.
육체는 젊어졌지만, 정신만큼은 오랜 세월을 담고 있었다.
매설란이 탁자에 마주 앉으며 창밖의 석양을 바라보았다.
저무는 햇빛이 그녀의 얼굴을 노랗게 물들였다.
아름다웠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여전히 그렇게 아름다웠다.
매설란의 입이 떨어졌다.
“예전엔… 그런 생각을 했었어.”
“무슨?”
“당신이 용천관에서, 정도맹에서, 혈사련에서 마지막으로 멸마궁에 이르기까지. 온갖 정치적인 문제로 엮여 있을 때 주변이 조금만 정리되면 일은 훨씬 쉬워질 텐데, 하는 생각.”
“…….”
“그런데 막상 모든 게 다 정리된 지금… 오히려 쉬운 게 하나도 없어져 버렸어. 단순한 게 결코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이제 깨달았어.”
사비강이 매설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려운 거지.”
“그래, 부정하진 않을 게. 난 당신을 잃을까 봐 두려워.”
창밖을 향하던 매설란의 시선이 사비강에게 향했다.
그녀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반드시 살아. 나도 최선을 다해서 싸울 테니까. 그리고 살아남을 테니까.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