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8
귀환 마교관
598화
“과연 사비강의 빈자리가 제법 크군.”
언덕 위에서 멸마궁을 내려다보던 능운파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중얼거렸다.
곁에 선 구윤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계속 이렇게 보고만 계실 겁니까?”
“하면?”
“제 계획은 멸마궁이 버텨야지 실현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이대로 멸마궁이 밀린다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맹주님!”
구윤의 고함 소리에 능운파가 가늘게 뜬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윤은 새삼 그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분명 지금의 얼굴에도 능운파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외모의 문제가 아니다.
감정이라고는 전혀 깃들지 않은 차가운 표정.
지금껏 자신이 모셨던 맹주는 단 한 번도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때문에 눈앞의 능운파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낯설었다.
능운파가 피식 웃었다.
“군사는 언제까지 나를 맹주라고 부를 텐가? 나는 더 이상 이 강호와 연관이 없는 존재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맹주님이 이루고자 하는 그 야망을 위해서라면 멸마궁을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말은 잘하는군. 그래,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예나 지금이나 무딘 칼은 쓰지 않아. 만약 사비강이라는 칼날이 내 생각보다 무딘 날이라면, 굳이 주워들 필요도 없겠지.”
“정녕 이대로 두고만 보시겠다는 겁니까?”
구윤이 다그치자 능운파는 가만히 시선을 옮겨 멸마궁을 바라보았다.
멸마궁의 전경은 그야말로 수라도가 펼쳐진 듯했다.
여기저기 타들어가는 연기 때문에 매캐한 냄새가 여기까지 풍겨 왔다.
이제 멸마궁은 내궁만 온전하게 남은 상태였다.
외궁은 완전히 검은 땅으로 변해 버려 테라포밍이 완료된 상태.
그나마 내궁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은 조신량이 설치해 놓은 기관 장치와 무랑도사가 펼쳐 놓은 진법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기세라면 그 역시 곧 뚫릴 위기에 처해 있었다.
“사비강이 무슨 수련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 또한 그의 운명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섣불리 나서서 마족의 군대와 대항한다면? 그럼에도 사비강이 제 역할을 해주지 못한다면?”
“…….”
“이건 어디까지나 사비강의 시험 무대라고 할 수 있겠지. 그가 얼마나 이 위기를 잘 넘길 수 있는지. 이만한 위기를 넘긴다면… 그땐 나도 자네가 제안한 작전을 더욱 안심하고 수용할 수 있을 테지.”
구윤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능운파의 표정으로 보건데 더 이상 그를 설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결국 남은 건 사비강에게 달렸다.
구윤의 시선이 저만치 멸마궁으로 향했다.
‘궁주님. 시간이 없습니다. 서두르십시오!’
**
퍼콰아앙!
폭음과 함께 튕겨 날아간 연우경이 전각 일부를 부수면서 거칠게 나뒹굴었다.
“크윽! 제길…!”
부상을 입은 그가 비척거리면서 일어나다가 곧 다시 고꾸라지더니 피를 토해냈다.
“쿠웨에엑!”
검은 피를 토하고 나자 의식이 가물가물 흐려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천멸대원과 신생조원들이 여기저기 걸레조각 마냥 널브러져 있었다.
모두들 내상을 크게 입어 움직임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는 점이랄까?
“칫!”
연우경이 소매로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는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차분하면서도 어딘지 건조한 소리.
지나치게 규칙적이고 차분한 소리였기에 아수라장이 된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침내 먼지를 뚫고 그림자가 어렴풋이 드러나는가 싶더니 마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트라잔 공작이었다.
그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연우경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쥐새끼 중에 너만 남은 건가?”
연우경이 천천히 기수식을 취하면서 트라잔을 경계했다.
정말이지 상대는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존재였다.
천멸대와 신생조가 한꺼번에 놈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부 부상을 입은 채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나마 이렇게 자신이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솨아아아아.
트라잔에게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압감이 풍겨져 나왔다.
숨이 막힐 듯한 압력에 연우경이 기를 끌어올리면서 간신히 말을 뱉었다.
“왜지?”
“뭐가 궁금한가? 미개한 존재여.”
트라잔이 무감한 시선으로 연우경을 보았다.
그 소름 끼치는 시선을 마주한 채 연우경이 따박따박 따지듯 물었다.
“그 정도 실력이면 우리를 다 죽일 수도 있을 텐데. 어째서 살려 둔 거지?”
“죽일 거다.”
“……!”
“단, 충분한 공포를 심어준 후에. 그것이 폐하의 명이니까.”
꽈득…!
연우경이 어금니를 갈았다.
광오한 대답에 울분이 끌어 올랐지만, 저런 자신감을 무시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게 더욱 화가 났다.
“너 같은 놈에게… 공포 따위 느낄쏘냐!”
파밧!
연우경이 순간 바닥을 차고 튀어 나갔다.
최후의 일격이었다.
하지만 기력이 다한 탓일까?
그의 일격은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막히고 말았다.
따앙!
퍽퍽! 퍼퍼퍽!
“크아악!”
단지 트라잔이 손가락을 튕겼을 뿐이었다.
그렇게 지풍처럼 날아간 마력 줄기가 청빙검을 때리더니 연우경의 몸 다섯 곳을 가격했다.
딱히 요혈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그저 아무렇게나 꽂아 넣은 주먹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 힘만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미 기력이 다한 상태였던 연우경에게는 그 다섯 군데의 타박상마저 목숨을 위협할 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쿠당탕탕!
바닥에 미끄러지듯 쓰러진 연우경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다가 다시 고꾸라지고 말았다.
자박자박….
다시 이어진 규칙적인 발자국 소리.
이번만큼은 목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리라.
연우경이 힘겹게 고개를 꺾어 들었다.
트라잔이 눈을 내려 깔며 중얼거렸다.
“그 눈빛…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
그가 손을 들었다.
다시 지풍이 날아드는 순간, 연우경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리라.
연우경이 이죽거렸다.
“가서 전해라. 결국 명을 받들지 못했다고. 도저히 공포 따위는 줄 수 없었다고.”
찰나.
쒸이에에엑!
허공을 가르면서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연우경을 향했던 트라잔의 손길이 순간 뒤틀리면서 갑자기 날아든 화살을 낚아챘다.
곧이어.
파바밧!
그가 몸을 회전하면서 화살을 그대로 날아온 방향으로 날려 보냈다.
쒸이이이이잇!
궁주전 전각 지붕 꼭대기까지 날아간 화살이 그대로 단리정을 노렸다.
“막앗!”
백미령과 민유향이 재빨리 나서며 기합성을 내질렀다.
“하아아앗!”
꽈아아아아앙!
화살과 검이 부딪쳤음에도 폭발음이 들렸다.
순간 마력을 품은 기파가 세 사람을 덮치는 것과 동시에 지붕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크읍!”
“아악!”
마치 화살이 폭발을 일으키자마자 그때부터 강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와 세 사람을 덮친 것만 같았다.
제대로 방어조차 할 수 없었던 세 사람이 그대로 지상으로 추락하며 곤두박질쳤다.
쿠당탕탕!
“끄으으윽…!”
추락하면서 다친 상처보다는 화살을 막아낸 직후 뻗어 나온 마력에 당한 고통이 훨씬 더 컸다.
지금까지 마족과 마물들을 상대하면서 마력에 맞서 싸운 적은 많았지만, 이토록 이질적인 기운은 처음이었다.
온몸이 마비되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트라잔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매를 치켜 올렸다.
“과연 아직도 더 남았다는 건가?”
그의 중얼거림에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기습은 글러먹었군요.”
“어차피 기습이 통할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잖아?”
트라잔의 등 뒤에서 나타난 두 사람은 바로 적무린과 서래향이었다.
곧이어.
“이렇게 된 이상 궁주님이 나오실 때까지만 버텨 보지요.”
“그래야지.”
무천과 당이협이 왼쪽 방향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만약 제가 여기서 죽는다면, 사부님께 꼭 말씀드려 주십시오. 사부님을 지키려다가 장렬히 희생했다고요.”
“걱정 마.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오른쪽에서 나타난 사람은 바로 추량과 매설란이었다.
마지막으로 연우경 뒤편에서도 두 사람이 걸어왔다.
“그간의 과오를 이 자리에서 청산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할 거요.”
사뭇 상반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 자운룡과 위검종이었다.
여덟 사람이 사방을 포위하자, 트라잔이 입매를 씰룩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저 녀석이 한 말 중 하나는 사실인 것 같군.”
그의 눈길이 쓰러진 연우경에게 향했다.
그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적어도 네놈들이 공포를 느끼지 않을 거라는 것. 폐하께는 죄송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설명드려야겠군. 개미 따위가 맹수의 발에 깔려 죽은들 공포를 알았겠는가?”
“흥! 네놈도 어지간히 수다스럽구나!”
추량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면서 달려 나갔다.
그것을 신호로 여덟 사람이 동시에 트라잔을 향해 쇄도했다.
- 크르러렁!
어느새 튀어 나온 것인지, 추량의 품속에 있던 반묘가 바닥에 내려서서 커진 몸으로 포효를 내질렀다.
동시에 여덟 명의 기력이 대폭 상승했다.
쉬쉬쉬쉬이이익!
머릿수는 여덟이었지만, 뻗어 나간 강기는 수십 갈래였다.
그간 기량이 발전한 것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 진백이 지어 준 영약을 복용한 터였다.
스스스스슷!
순간, 트라잔의 몸이 수십 개로 쪼개지는가 싶더니 이리저리 몸을 비틀면서 강기를 피해냈다.
“반묘!”
추량이 마나검을 휘두르며 소리치자, 반묘가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며 포효를 내질렀다.
- 쿠어어엉!
‘크흠!’
트라잔은 순간 기력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랬군. 저놈이 버퍼였구나!’
그렇다면 자신에게 디버프를 건 것도 저 반묘라고 불리는 마수리라.
처음 보는 짐승이어서 중원의 동물인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희귀한 마수가 틀림없으리라.
죽이긴 아깝지만 방해가 된다면 처리할 수밖에.
파밧!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반묘에게 향했다.
찰나, 여덟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사실 처음부터 그들은 단 하나의 전술을 들고 나온 셈이었다.
지금까지 천멸대와 신생조를 앞세우고 나서지 않았던 것 역시 전술을 짜기 위해서 시간을 끈 것이었다.
다행히 적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공포를 심으라는 마왕의 명을 따르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허세가 이 여덟 명에게는 시간을 벌어 준 셈이었다.
다만 오랜 궁리 끝에 나온 전술은 생각보다 무척이나 단순했다.
결국 마족은 단순하게 싸워야 겨우 이길 수 있을까 말까라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 전술을 써먹을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상대가 버프의 능력을 가진 반묘를 먼저 제거하려고 움직이는 찰나.
그 한순간에 모든 공격을 퍼붓는다.
통하면 막을 것이고, 통하지 않으면 죽으리라.
쒸에에에에엑!
트라잔의 검이 그대로 반묘의 이마를 향할 때.
“어딜!”
추량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 앞을 막아서며 마나방패를 내질렀다.
후아아아아앙!
지금까지와 비교하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두꺼운 마나방패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맡은 이번 임무는 모든 힘을 쏟아서 트라잔의 공격을 막는 것이었다.
각각의 한 사람이 단 일합에 모든 공력을 쏟아내는 것.
그것이 이들이 택한 유일한 전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