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3
귀환 마교관
513화
대형 마차가 관도를 따라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갑주를 두른 육두마차였는데, 그 앞뒤로는 깃발을 든 무인들이 따르고 흑의를 갖춰 입은 호위무사들 역시 함께 있었다.
깃발에는 붉은 글씨로 ‘멸마(滅魔)’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만 보더라도 멸마궁의 고인이 타고 있으리라는 것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로 마차에는 궁주인 사비강이 타고 있었다.
또한 매설란도 함께 타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번에도 멸마궁에서 총관 직을 맡게 됐다.
물론 몇몇 이들은 그녀가 인맥을 이용해서 총관 자리를 꿰찼다고 손가락질을 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무공은 멸마궁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리고 여인으로서 가지는 장점이 분명히 존재했다.
굵직한 사안들에 대해서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궁주와 달리, 총관의 입장에서는 무척 섬세하고 민감한 문제들을 다루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의 예민한 감각이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그뿐 아니라 이미 멸마관의 총관 직을 수행하면서 그녀의 통솔력은 검증이 끝난 상태였다.
“말했다시피 천멸대와 신생조 그리고 사천회는 섬서로 파견했어. 당이협 단주가 이끄는 비살단(秘殺團)과 위검종 단주가 이끄는 흑검단(黑劍團)은 호남성 영주(永州)로 보냈고, 적무린 단주가 이끄는 멸검단(滅劍團)과 서래향 단주가 이끄는 적멸단(赤滅團)은 광동의 광주(廣州)로 파견했어.”
“흐음.”
보고를 받은 사비강이 심각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리자, 매설란이 슬쩍 눈치를 보고는 말을 이었다.
“나머지는 멸마궁을 지키고 있고.”
“흐음.”
“…….”
“…….”
매설란이 미간을 곱게 찡그리고는 물었다.
“왜 그래? 뭔가 잘못된 거라도 있어?”
“있지.”
사비강의 대답에 매설란이 바짝 긴장했다.
얼른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을 곱씹어 보았지만 딱히 문제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섬서와 호남, 광동으로 각각 전력을 고루 분포시켰으니, 마족들이 움직이면 즉각적으로 대응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파견된 자들은 그녀가 생각하기에 서로 간에 호흡이 가장 잘 맞는 조직으로 구성했다.
하지만 사비강은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봤을 수도 있으리라.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문제가 뭔데? 말해 주면 바로 고칠게.”
이런 건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다.
받아들일 건 곧바로 받아들이고, 빠른 시간 안에 수정하는 것이 궁을 위해서도 좋은….
“이름.”
“이름…?”
“조직명 말이야. 아무래도 역시 좀 아닌 것 같아.”
“무슨 말이지?”
살짝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매설란이 물어보자, 아니나 다를까 사비강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비살단… 흑검단… 멸검단… 적멸단… 조직명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
“아… 그러셔….”
매설란은 이마에 핏대가 살짝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뇌까리듯 읊조렸다.
“그래서 뭘 어떻게 바꾸고 싶은데?”
“우선 비살단의 정식 명칭은 ‘비밀결사절대무적필멸(秘密決死絶代無敵必滅)….”
“그만. 더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아무튼 배치에는 문제가 없단 뜻이지?”
“그거야 뭐. 누굴 보내든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
“그게 가장 중요한 거라고!”
결국 참다 못한 매설란이 빽 소리를 질렀다.
사비강이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매설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보았다.
‘정말이지 저럴 땐 마계에서 수십 년을 굴러먹다 돌아온 영감 같지가 않다니까.’
하긴 누군가 그랬던가?
정신 연령은 몸을 따라간다고.
해서 반로환동한 노인들도 일 년만 지나면 다시 어려진다나?
조금 깊게 생각해 보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작명 감각은 용서가 안 될 정도니까….’
매설란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마족들 움직임은?”
사비강의 질문에 그녀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다행히 섬서 쪽에서는 특별한 움직임이 없어. 맹의 본단을 치는 게 부담이 된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광서쪽은 벌써 남녕(南寧)까지 치고 올라왔어. 다음으로 귀주를 칠 것 같아.”
“귀주에 일성검문이 있었지?”
“맞아.”
매설란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멸대를 이끄는 단리정의 고향이 있는 곳이다.
“그래도 당분간은 쉽게 움직이지 못할 거야. 테라포밍이 완료되지 않은 곳에서는 섣불리 움직이기에 부담이 될 테니까.”
“그럼 본궁의 전력을 귀주로 미리 보내도 되지 않아?”
“아니. 만에 하나 마족이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면 이도저도 아니게 돼. 처음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낫지.”
“그렇구나.”
매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리정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서 조직을 움직여서는 안 되기에 애써 마음을 접었다.
“맹은 어쩌고 있지?”
“능 맹주님이 보름 후에 추마회주(追魔會主)를 직접 만나기로 한 모양이야.”
“추마회주를 직접?”
매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마회란, 최근 새로 생긴 조직으로 말 그대로 마족들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서로 규합해서 만든 것이었다.
한데 공교롭게도 이 추마회주가 정도맹 출신이었다.
그것도 강림지 전투에 참여했던 태천문(太天門)의 장문인 모사성(慕四成)이었다.
매설란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강림지 전투에도 참여했던 자인만큼 맹주님이 직접 만나서 설득을 해볼 생각이신 듯해. 마족을 추종하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행위지만, 당신 말대로 심상을 깊이 입어서 한순간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구 군사 반응은?”
“당연히 반대를 했는데, 맹주님 뜻이 확고한 모양이야. 우선은 주먹보다는 말로 해결책을 찾으시겠다는.”
“말로 해결책을 찾겠다라….”
그때였다.
덜커덩!
마차가 갑자기 멈추면서 매설란의 몸이 앞으로 훅 쏠렸다.
그 바람에 그녀가 사비강의 품에 쏙 안겼다.
사비강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갑자기 도발하기야?”
“무, 무슨 소리야? 나참….”
매설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사비강과 함께 있다 보니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나 보다.
이 정도의 급정거로 이렇게까지 몸을 추스르지 못하다니.
매설란이 얼른 몸을 빼내려고 하자, 사비강이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조금 더 있자. 이대로. 좋잖아.”
“무슨 일인지는 알아봐야지.”
매설란이 몸을 빼내고는 문을 열고 내렸다.
저만치 대열 앞쪽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꽈앙!
“크아악!”
“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호위무사들 몇 명이 사지가 분리되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 폭발이 워낙 강했기에 매설란에게까지 후끈한 열기가 전해져 왔다.
호위무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자멸공이다! 놈을 빨리 제압해!”
그러자 길을 막고 있던 무인 하나가 양손을 활짝 펼치며 소리쳤다.
“멸마궁은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지 말고, 순리에 따라… 컥!”
한 줄기 검은 바람이 그를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목을 가로지르며 선혈이 생겨났다.
흑귀가 그의 목을 벤 것이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검붉게 물들어 가던 그의 얼굴이 순간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 버리더니 피를 주르륵 흘려내고는 허물어져 버렸다.
털썩!
매설란이 얼른 경공을 펼쳐 전방으로 날아갔다.
마침 추량이 그녀 곁으로 내려섰다.
“총관님.”
“무슨 일이죠?”
매설란이 바닥에 쓰러진 두 명의 무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마족을 추종하는 세력 같습니다. 현재 인근을 수색하며 조사 중입니다.”
그때 무인 중 한 명이 달려와 추량에게 보고했다.
추량이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매설란에게 돌아섰다.
“이 녀석들은 ‘신천교(新天敎)’라고 합니다. 앞으로 지나갈 마을을 급습한 것 같습니다.”
“신천…교?”
“이곳 호남 지역에 터를 두고 있습니다.”
“호남에 터를 두고 있다면, 원래 사파였던 자들인가요?”
호남성에는 혈사련 총타가 있다.
때문에 정파보다는 사파일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건 아니고… 대부분 정파였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럼 혹시 이들도 강림지에서 심상을….”
“그건 아닙니다. 강림지 전투에 참여했던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매설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등뒤에서 사비강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존심이 없으니까.”
“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적이 나타났을 때, 사파 무인들은 발악하다가 독기를 품고 죽어 가지만, 정파 무인들은 굽실거릴 명분부터 찾기 바쁘거든.”
“설마….”
매설란이 비약이 심하다는 듯 바라보자, 사비강이 싱긋 웃었다.
“물론, 비약을 좀 한 거야. 그렇지 않은 무인들이 훨씬 많겠지.”
“그렇겠지. 아무렴.”
하지만 사비강은 내심 인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전생에서 마족이 침략했을 때 가장 먼저 변절한 것도 정파 무인이었고, 가장 오래 대항한 것도 정파 무인들이었다.
정파와 사파 중에서 누가 더 많이 변절했느냐를 따진다면?
글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정파가 결코 사파보다 적지는 않았다는 점.
추량이 눈치를 살피다가 넌지시 물었다.
“어쩌지요? 돌아서 갈까요?”
갈 길이 바빴다.
신천교가 마을을 급습한지 제법 오래 됐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들이 어떤 패악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지만 이미 늦어 버린 상황이리라.
괜히 마을을 뚫고 지나가다가 쓸데없는 마찰로 시간을 허비하느니 조금 돌아가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비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랜만에 교관 출신으로서 계도가 필요한 녀석들에게 벌을 줘야지.”
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대로 마을을 지나간다.”
**
“키야아! 술맛 끝내준다!”
무인 하나가 술병을 나발 불며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그의 곁에서는 또 다른 무인이 아녀자를 겁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머리가 아무렇게나 풀어헤쳐진 아녀자는 벌써 몇 번째 당하는 것인지 동공이 풀려 있었고, 뺨에는 눈물 자국이 메말라 있었다.
마을 곳곳에서 치솟던 비명과 고함소리도 이제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간간이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희미한 신음 소리, 쾌락에 젖어 울부짖는 짐승 같은 남자들의 목소리, 왁자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만 들려왔다.
술병을 쥐고 비틀거리면서 일어난 무인이 마침 탁자 위에 놓인 동경을 들어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그러더니 동경으로 겁간 당하는 여인을 비춰 보고는 피식 웃었다.
“크크. 하늘이 무섭지도 않냐고?”
여인이 몸을 빼앗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소리친 말이었다.
하늘이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데 말이지… 하늘에서 벌써 심판자가 내려왔어. 이제 인류는 끝장이야. 어차피 다 끝난 마당에 화끈하게 즐겨야지. 안 그래, 부인? 게다가 그분들은 욕망에 충실하라고 조언하신단 말이지.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그때였다.
퍽!
“꺄아아아악!”
멍하니 몸을 내맡기고 있던 여인이 기겁을 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무인이 든 동경을 통해 안면에 검이 박힌 동료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그가 화들짝 놀라서 휙 돌아섰다.
“이, 이건 뭐야?”
“뭐긴. 네가 말한 심판자다.”
사비강이 무뚝뚝한 말을 뱉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