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6
귀환 마교관
356화
치열했던 전쟁은 정도맹의 승리로 공식 선언됐다.
하지만 강호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서화평원 대전에서 나타난 마물들 때문이었다.
또한 사비강이 소환한 나타스의 군단 역시 화제 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강호 역사상 이러한 마물들이 대거 등장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때문에 강호는 혼돈에 빠져 있었다.
어떤 이는 종말이 다가왔다고 소리쳤고, 어떤 이는 악마가 곧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며 사이비 종교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수양을 깊이 쌓은 자들도 심력이 흔들릴 정도이니, 평범한 무인들이야 오죽하랴.
객잔이나 주루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서화평원 대전에 대해 떠들어대기 일쑤였다.
그런 한편, 정도맹 본단에서는 뒷수습을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은 혈사련에 대한 처분이었다.
한동안은 정사지간에 조약을 맺어서 짧은 평화를 유지했지만, 혈사련이 먼저 배반을 한 이상 그들을 그대로 용인할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러한 강경책에 대한 회의론도 제기했다.
우선 중원 각지에서 활동하는 사파 무인들을 모두 억압할 수는 없다는 것이 주요 쟁점이었다.
혈사련을 아예 없애 버리면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는 분타와 사파 무인들이 제멋대로 활개를 치고 다닐 것이 뻔한데, 이들을 다스릴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혈사련을 계속 남겨 두는 대신,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규제로 다스리는 게 낫다는 의견이었다.
이렇듯 강경파와 온건파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니 맹주전에서 진행되는 회의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었다.
급기야 서로가 서로에게 삿대질까지 해가며 목소리를 높였고, 심지어 살기까지 은근히 뿜어내는 자들까지 있었다.
맹주 능운파는 작금의 사태에 대해서 골머리가 아프다는 듯 태사의에 등을 기댄 채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 모습을 보던 구윤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맹주님?”
“전쟁을 끝내고 나니, 여기서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됐군.”
구윤이 쓴 웃음을 지었다.
“사비강 전 국주가 나오면 더 시끄러워질 텐데요.”
“하긴. 그땐 저들의 반응이 어떻게 변할지 짐작도 되지 않는군.”
“아마 난리가 나겠지요.”
“자네는 어딘지 기대가 된다는 표정이군.”
“사실 기대 반, 걱정 반입니다. 아시다시피 사비강 전 국주가 워낙 과격하지 않습니까?”
“허허, 그 괴짜 성격을 과격하다고 표현하는 건 너무 얌전한 것 아닌가?”
“그런가요?”
구윤이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사비강은 능운파와 구윤에게만은 분명하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이 중원에 대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것을.
사비강을 오랫동안 겪은 구윤은 별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었다.
스스로도 놀라웠다.
그렇게 엄청난 사실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자신이.
누구보다 냉철한 이성으로 상황을 직시해야 하는 자신이 그 허황된 이야기를 정말이지 쉽게 믿고 있었다.
능운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는 사비강에게 여벌로 얻은 목숨이라는 생각을 아직도 하고 있었다.
약해빠진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그 생각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집착과 야욕을 버리면 무인은 강해지기 마련이므로.
게다가 능운파는 지난 서화평원 대전에서 ‘바올드’라는 마물과 여러 종류의 마병을 직접 겪고 싸우지 않았던가?
게다가 사비강이 소환한 나타스와 망자들까지.
그런 강력한 증거가 있으니 오히려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만 두 사람의 사견과 군중의 심리는 또 다를 것이 분명하다.
맹주전이라는 곳은 매우 복잡 미묘한 장소다.
온갖 심리전이 거미줄처럼 얽힌 곳.
정치란 그런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때문에 이들이 사비강을 어찌 받아들일지 아직 알 수 없다.
능운파와 구윤은 가만히 생각했다.
‘어찌됐든 판은 깔았다.’
이제부터는 사비강이 헤쳐 나가야 한다.
“사비강 전 국주는 아직도 소식이 없는가?”
“사람을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능운파가 손을 저었다.
“아닐세. 많이 피곤할 테지. 좀 더 쉬도록 내버려 두지.”
원래 오늘 회의는 사비강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다른 수뇌 인사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한데 사비강이 아직도 맹주전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승전의 공이 큰 만큼 능운파는 사비강에게 충분한 휴식을 베풀었다.
일부러 사람을 보내서 재촉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생각할 것이 많거나 맹주전에서 연설할 것에 대해 정리하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얼마나 시끌벅적한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장내를 조용하게 만드는 한 사람이 등장했다.
맹주와 총군사가 지금껏 기다리고 있던 한 사람.
사비강이었다.
그를 본 무인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꺼내며 수군거렸다.
“끄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사비강 전 국주가 왔군.”
“그러게 말이오. 한데 저 행색을 보니 이제 막 잠에서 깬 것 같군. 기가 막혀서.”
“지금 잠이 온단 말이오? 허참.”
사비강을 탐탁찮게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반면 사비강을 전쟁의 영웅처럼 여기는 자들도 있었다.
“오오, 사비강 전 국주가 드디어 나오셨군.”
“만약 그날 사비강 전 국주가 나서주지 않았더라면, 우린 전멸을 각오했어야 할 겁니다.”
“이를 말이오? 비록 그가 보인 술법은 낯선 것이었지만 본맹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것만큼은 자명한 사실 아니겠소?”
한편 사비강은 수뇌 인사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맹주전 복판까지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가 길게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을 하더니 포권했다.
“맹주님의 배려로 숙면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허허, 피로는 좀 풀렸는가?”
“예, 몸이 아주 가벼워졌습니다. 따로 주신 영단도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별 말씀을.”
능운파가 손을 저었다.
한편 사비강을 시기하는 무인들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특히 장로회주 욱청풍과 천호당주 묵양제는 미간을 팍 구긴 채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내 묵양제가 먼저 한 걸음 나서며 포권을 취했다.
“맹주님. 이번 전쟁에서 그의 공이 큰 것은 사실이오나, 그 과정에 있어서 따져 보아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천호당주의 말이 옳습니다. 사비강 전 국주가 본맹을 위기에서 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사용한 술법은 몹시 사이한 것이어서 가히 정도의 무공으로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욱청풍이 거들고 나섰다.
그러자 또 다른 자가 나서며 포권했다.
그는 은휘 다음으로 높은 서열인 패월당주(覇越堂主) 조적상(曺積狀)이었다.
은휘가 전사한 이 시점에서는 그가 맹주 다음으로 실권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 중원 각지에서 사비강 전 국주가 보인 사술 때문에 무척이나 시끄럽습니다. 많은 정도 문파가 동요하는 상황인 만큼 이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이 있어야 할 겁니다.”
갑자기 쟁쟁한 수뇌 인사들이 너도나도 나서며 발언을 쏟아내자, 사비강을 은근히 지지하던 무인들은 괜히 눈치가 보여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묵양제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원래 이런 결렬한 회의일수록 처음에 분위기를 어떤 식으로 몰아가느냐가 중요하다.
때문에 그는 일부러 먼저 나서서 사비강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을 부추긴 것이었다.
사실 정도맹 내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장로회주와 제 이의 실권자인 패월당주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들로서는 갑자기 혈사련에서 돌아와 인기몰이를 하는 사비강이 눈엣가시와 같을 테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하자 욱청풍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오늘 이처럼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 지금껏 잠을 자다가 오다니! 대체 사비강 전 국주께서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슬립.”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호통을 치다시피 목청을 높이는 욱청풍을 향해 사비강이 손을 슬쩍 뻗는가 싶더니 ‘슬립’이라는 말을 짤막하게 내뱉었을 뿐이었다.
한데 갑자기 욱청풍이 스르르 힘을 잃더니 그대로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순간 장내가 쥐죽은 듯 조용해지다가,
“어엇! 사, 사, 사술이다! 사비강이 사술을 썼다! 장로회주님을 죽였…!”
“슬립.”
이번에도 사비강이 고래고래 소리치는 조적상을 향해 주문을 캐스팅했다.
마찬가지로 조적상은 그 자리에서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간 것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이쯤 되자 무인들은 물론, 맹주인 능운파와 총군사 구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능운파가 더는 지켜보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사 전 국주. 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한 건가?”
“걱정 마십시오. 잠든 것뿐입니다.”
사비강의 말에 사람들이 얼른 달려가 욱청풍과 조적상을 살폈다.
과연 그 말대로 두 사람은 고르게 숨을 쉬며 혼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묵양제가 발끈하며 나섰다.
“대체 이게 무슨 사술이오? 서화평원에서 그 사이한 술법을 쓴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맹주전에서 대놓고 사술을…!”
말을 쏟아내던 묵양제가 흠칫거리고는 뒤로 후다닥 물러섰다.
사비강이 자신을 돌아보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것이다.
하지만 사비강은 더 이상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검지를 입에 가져갔다.
“쉿. 지금부터 설명할 테니 잘 들으시오. 맹주님, 잠시 단상에 올라도 괜찮겠습니까?”
사비강이 돌아보며 정중히 청하자, 능운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강이 단상에 오르자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비강이 그들을 한 차례 훑어보고는 말했다.
“방금 여러분들이 본 건 ‘마법’이라는 술법이오. 원래 드래곤이 사용하는 것인데, 마계에 머무는 마족들 역시 마법에 통달했다고 보면 될 거요.”
“대, 대체 지금 뭔 소리를…?”
“마계에 마족이라니….”
사람들이 술렁거렸지만 사비강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원래대로라면 앞으로 칠 년 후, 마계에서 본격적으로 중원을 침공할 예정이었소. 하지만 최근 일어나는 현상을 보건데, 그 시기가 다소 빨라질 것 같소.”
“잠깐!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마계의 침공이라니? 대체 마법은 뭐고, 마족은 또 뭐란 말이오?”
사비강은 대략적인 상황을 일러 주었다.
머지않아 마계에서 마족들이 넘어와 중원을 휩쓸기 시작할 것이며, 그것을 막기 위해 대비를 해두어야 한다는 것까지.
또한 마족들은 강호인들의 능력에 대해 관심이 깊고, 이를 실험하기 위해 수많은 강호인들을 납치할 것이라는 사실도 말해 주었다.
꽤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장내에서는 나지막한 탄성과 탄식이 번갈아가며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사비강의 말을 완전히 실감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당장 눈앞에 펼쳐진 현상도 믿기 힘든 판에 마계에 마족이라니!
그렇다고 아예 부정하지도 못했다.
당장 며칠 전에 있었던 서화평원 전투에서 그들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바올드와 마병들이 있지 않았던가?
“끄음…!”
이야기를 모두 들은 수뇌 인사들이 저마다 불편한 침음을 흘리면서 시선을 회피했다.
어디선가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번지더니 이내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번만큼은 사비강도 막지 않았다.
혼란스러울 것이다.
자신들이 살고 있던 세상이 갑자기 일그러진 것이니 받아들이기가 어려우리라.
하지만 지금 말해 두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
바올드와 마병들에 대한 충격이 아직 가시기 전에 일러두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이 생기리라.
그때 누군가 조심스레 나섰다.
그는 바로 검영각주 섭청이었다.
맹주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그였기에 사비강이 하는 말 역시 허투루 듣지 않았다.
“하면 사비강 대협이 사용한 그 요상한 무공은 마계의 술법이라는 말씀이오?”
“그렇소.”
다시 장내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하하하하하!”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