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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마교관-355화 (355/670)

# 355

귀환 마교관

355화

일초지적(一招之敵).

단 한 번의 초식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 대상.

허무극은 이 말을 좋아했다.

보통 이런 말을 쓰게 될 때면, 자신이 바로 그 초식을 사용하는 사람이었고, 쓰러지는 자는 늘 상대였으니까.

한데 적어도 오늘 만큼은 그 반대의 상황이 되고 말았다.

쑤욱!

차디찬 감촉이 뱃속에서 빠져나가자 입 밖으로 피가 분수처럼 토해졌다.

통증을 억누르기 위해 운공되던 내공이 순간 흐트러지면서 피가 역류한 것이다.

“푸우우웃! 크으윽…!”

허무극은 비틀거리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군가 앞에서 무릎을 꿇는 날이 오다니!

비록 전쟁에서 승리하진 못했다지만, 정도맹주가 눈앞에 나타나도 싸워서 이길 자신은 있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뇌전흡살공을 펼쳐 수많은 자들의 진기까지 흡수한 다음이라면 더더욱.

한데…

‘이건 어째서…?’

그는 입가를 타고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사비강을 올려다보았다.

사비강의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그려졌다.

아니, 저건 승자의 미소가 아니었다.

패자를 조롱하는 악마의 미소였다.

“아프냐?”

“……!”

“나도 아프다. 널 진작 죽이지 못했다는 내 마음이.”

“이… 씹어 먹을… 놈…!”

허무극이 얼른 자신의 혈을 짚어 지혈하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사비강이 천천히 다가왔다.

“애써 살려고 하지 마라.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여. 아직 저지르지 않은 죄는 묻지 않을 테니.”

“뭔 개 같은 소리를…!”

퍼억!

“커억!”

주먹에 얻어맞은 허무극이 저만큼 튕겨 나가면서 나뒹굴었다.

“역시 청소하려면 소각해 버리는 게 낫겠지.”

사비강이 왼손을 들었다.

손바닥에 불기운이 서서히 뭉치는 순간,

“멈춰요!”

문득 날카로운 목소리가 사비강의 등을 때렸다.

멈칫거리고 돌아보자, 서래향이 빠른 속도로 경공을 펼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마침내 사비강 옆에 도착한 서래향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잠깐만… 잠깐 시간을 줄 수 없을까요?”

서래향이 간절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이미 거절했을 텐데.”

사비강이 싸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서래향도 이번만큼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때나마 연정을 품었던 사람이다.

이렇게 마지막을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부탁드려요. 한 줄기 숨만 붙여 주세요.”

“그럴 가치가 없는 놈이야.”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에요. 부탁드려요.”

서래향이 다시 한 번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결국 사비강이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섰다.

“좋을 대로.”

“고마워요. 배려는 잊지 않을게요.”

서래향이 포권을 취하고는 허무극이 드러누워 있는 곳으로 돌아섰다.

명치에 깊은 상처를 입은 허무극은 이제 일어서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자박자박…

그녀가 천천히 허무극에게 다가갔다.

한때 감히 올려다보는 것조차 어려웠던 남자.

언제나 자신을 가슴 떨게 했던 남자가 겨우 숨이 붙은 채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의 메마른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김이 애처롭게만 보였다.

“홍묘…”

허무극이 게슴츠레 뜬 눈으로 서래향을 보았다.

그의 입에서 별호가 불리자 서래향은 가슴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곳에 오기 전에 련주를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생각해 보았다.

화가 날 것 같기도 했고, 슬플 것 같기도 했다.

나를 버렸다는 마음에.

사랑했던 이에게 이용당했다는 배신감에.

한데 이 순간 서래향의 가슴으로 밀려드는 감정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가… 죽어 가고 있다.’

세상 무엇보다 그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는데!

그 사람에게 가차 없이 이용당했는데!

그럼에도 죽어 가는 그의 모습을 보는 건 가슴이 찢어질 만큼 슬펐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또르르 굴렀다.

허무극이 가쁜 숨을 내쉬며 희미하게 웃었다.

“홍묘… 본좌가 가여운가…?”

“쉬. 아무 말 하지 말아요.”

서래향이 울먹이며 겨우 대답했다.

하지만 허무극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지는군….”

허무극이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훅훅 뿜어져 나왔다.

서래향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런 식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순간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슴 속으로 소리쳤다.

왜 이런 곳에 누워 있냐고.

이런 모습은 결코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당장 일어나서…

당장 일어나서… 자신을 안고 어디론가 떠나 버리라고….

하지만 그 많은 목소리가 한 마디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만큼 많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문득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눈이 내렸다.

죽음이 가득했던 서화평원에.

“눈이… 내리는가?”

허무극이 희미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래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이 보이지도 않을 진데, 허무극은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말을 이어 갔다.

“너를… 처음 보았을 때도… 이렇게 눈이 내렸지.”

서래향은 입술을 콱 깨물었다.

련주는 이미 잊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기억하고 있었다.

돌연 잊었던 원망이 치솟았다.

“왜… 왜 나에게…!”

“…미안하구나.”

“그런 말을…! 당신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잖아요!”

결국 서래향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주저앉은 서래향은 허무극의 몸을 더듬다가 그의 얼굴을 잡았다.

허무극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부디… 나를 용서하게.”

“당신이 미워요. 너무 미워서 가슴이 찢어질 만큼 미워요. 당신을 원망해요. 이대로 죽게 만들기 싫을 만큼. 당신을 원망한다고요.”

서래향은 눈물이 범벅이 된 채로 소리쳤다.

허무극은 빠른 속도로 생명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한참이나 흐느낀 서래향이 허무극의 양 뺨을 잡고는 읊조렸다.

“잘 가요…”

그녀가 허무극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때였다.

“읍…!”

서래향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정신을 잃어버릴 만큼 강렬한 뇌전이 온몸을 훑으며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악…!”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려는 서래향을 허무극이 재빨리 낚아챘다.

그의 손등으로 힘줄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홍묘,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기꺼이 희생해라!”

그렇게 진기를 흡수하려는 찰나,

쒜에에에엑!

푹!

“커억!”

빛살처럼 날아든 베르타스가 허무극의 목을 꿰뚫었다.

뇌전흡살공을 펼치던 허무극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며 완전히 절명하고 말았다.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서래향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나마 그녀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허무극의 상태가 워낙 위중했고, 그녀의 몸에는 수라대환단의 기운이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까지 사랑했던 이에게 버림을 받은 서래향.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에 빠져 차갑게 식어 가는 허무극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흩날리는 눈발과 함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 곁으로 사비강이 천천히 다가섰다.

허무극의 목숨을 끊어 놓았던 베르타스가 쑤욱 뽑히며 사비강의 손으로 돌아왔다.

베르타스를 갈무리한 사비강이 서래향에게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그럴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나?”

서래향이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천천히 돌아서서는 희미한 목소리로 답했다.

“당신은 모를 거예요. 누군가를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가치로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을.”

사비강이 멀어지는 서래향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가? 가치로 따질 일이 아니라….”

사비강의 시선이 쓰러진 허무극의 시신으로 향했다.

그때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흩날리는 눈발을 뚫으며 달려오는 여인이 있었다.

추위 때문인지 뺨에 홍조를 띤 채 달려오는 여인은 바로 매설란이었다.

하얀 눈발 사이로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이제 막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나요?”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무슨 소리예요?”

“가치로 따질 수가 없다는 말.”

“뭐라고요? …잠깐, 맙소사! 저건 혈사련주 허무…! 읍…!”

순간 매설란의 몸이 사비강의 손에 이끌리면서 자연스럽게 품에 안겨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길고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잠깐 당황하던 매설란 역시 이내 힘을 빼고는 사비강에게 온몸을 내맡겼다.

그래, 아무렴 어때.

이제 전쟁은 끝났는데.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사비강이 매설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설란.”

“이 상황에 이런 인사.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무렴 어때? 내 맘이지.”

“정말 못 말리겠군요. 하지만….”

매설란이 사비강을 빤히 바라보더니 답했다.

“살아나 줘서 고마워요.”

다음 순간, 그녀가 사비강의 입술을 덮쳤다.

그렇게 두 사람은 혈향 가득 풍기는 언덕 위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긴 입맞춤을 이어 갔다.

**

서화평원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절벽.

그곳에 한 소녀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바로 마령교주가 ‘존야’라 불렀던 그 소녀였다.

한참이나 눈발을 맞으며 서 있던 소녀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저자는 우리 마계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군.”

그러자 이번에도 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아무래도 저자는 마계에 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많아.”

“그게 가능합니까?”

“글쎄. 나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바다.”

소녀는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하고 있었다.

소녀가 자신에게 다시 물었다.

“만약 마물들을 좀 더 투입했더라면, 저자 역시 제거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지금은 모든 패를 다 꺼내 보여서는 안 된다. 저자가 있는 한 더더욱. 아직 준비가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곧 모든 게 준비되리라.”

“알겠습니다.”

“서두를 것은 없다. 조급하면 그르치는 법. 차근차근 하나씩 쌓아 가는 거지. 우선 저자에 대해 면밀한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알아보겠습니다.”

소녀가 스스로 한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공손히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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