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8
귀환 마교관
338화
어두운 밤.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흑효는 진흙이 된 숲길을 따라 빠르게 내달렸다.
초상비(草上飛)를 펼치는 그의 신형은 마치 날다람쥐처럼이나 민첩했다.
쉭쉭쉭!
풀과 나무들이 그의 곁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한참이나 달린 흑효는 눈앞의 커다란 바위 앞에 멈췄다.
쏴아아아.
빗줄기는 아까보다 한층 굵어져 있었다.
바위는 족히 십여 장은 될 정도로 우람했다.
그 바위 중턱쯤에 한 남자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얼굴이 온통 화상으로 일그러진 자.
바로 적면인이었다.
“오셨소?”
담담히 던진 목소리였지만, 흑효의 귀에 또렷하게 박히는 음성이었다.
흑효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련주님의 밀언을 전하기 위해 왔소. 이왕이면 내려와서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떻소?”
그러자 적면인이 입매를 비틀며 대꾸했다.
“보다시피 내 몰골이 말이 아니오. 이렇게 비라도 오는 날이면 온 삭신이 쑤시오. 그러니 그쪽이 올라오는 게 좋겠군.”
흑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적면인의 속셈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리라.
흑효가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는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휙, 타다닷!
새처럼 날아오른 그가 바위벽을 차면서 몇 차례 도약하자, 마침내 중턱 쯤에 위치한 적면인의 자리까지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다.
흑효의 경신법에 짐짓 감탄한 표정으로 적면인이 말했다.
“과연 훌륭한 경공술이외다.”
“과찬이오.”
속에서는 욕지거리가 나왔지만, 어쨌거나 상대는 지금 마령교를 대표하는 자다.
괜히 자극할 필요는 없기에 흑효는 예를 다했다.
적면인이 예의 그 조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한데 경공술을 자랑하려고 여기까지 오신 건 아닐 테고.”
흑효가 내심 발끈했다.
‘이곳까지 올라오라고 한 게 네놈이 아니었더냐!’
하지만 표정을 다스리며 대답했다.
“이쪽 사정이 있어 소모전을 좀 더 끌어 주었으면 하오.”
“벌써 나흘째요. 이런 장난질을 도대체 언제까지 하자는 거지?”
적면인의 목소리에 은근한 불만이 서렸다.
충분히 예상했던 바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이런 무례한 대우에도 꾹 참아온 것이고.
흑효가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작은 문제가 있지만 곧 해결될 거요. 때가 되면 신호를 보낼 거요. 그때 본련과 귀교는 비로소 정도맹을 완전히 박멸할 수….”
“이미 그 이야기는 나흘 전에도 들은 것 같은데. 아니면 내가 착각하는 것인지?”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소.”
“유감이라… 혹시 이제 와서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 건 아닌가?”
“말을 삼가시오.”
“지금 그쪽이 내게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적면인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진득한 살기가 마기와 섞여 뿜어져 나왔다.
그 덕에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조차 그의 몸에 닿지 않고 그대로 기화될 정도였다.
흑효는 내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마령교의 신도들은 하나 같이 괴물들이군. 정도맹을 처리하고 나면 필시 마령교를 견제해야 할 일이다.’
그런 속내를 감추며 흑효가 입을 열었다.
“협조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련주께서 선물을 보내셨소.”
흑효가 들고 온 금속 상자를 내려 두었다.
적면인이 상자를 힐끔 보고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정도맹주의 수급이라도 되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꽤 마음에 들 거요.”
흑효가 말을 마치고는 금속상자의 옆면 빗장을 풀어 올렸다.
그러자 창살 안에 든 동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푸른 털로 뒤덮인 쥐였는데, 그 크기가 어른의 머리통만 했다.
뿐만 아니라 두 눈은 황금빛으로 빛났고, 유난히 길고 날카로운 앞니가 위협적일 만큼 예기를 뿜고 있었다.
적면인이 이맛살을 푹 찡그렸다.
“삶아 먹으면 되는 건가?”
“금청서요. 한 번쯤 들어본 적은 있을 거요.”
그제야 적면인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금청서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본 적이 있었기에.
적서향을 맡으면 수천 리 밖에서도 찾아낸다는 영물이 아니던가?
눈치 빠른 적면인이 흑효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이 녀석이 본교에게 뭘 갖다 줄 수 있다는 거지?”
이 대답에 따라 혈사련에게 얼마나 더 협조할지 결정될 것이다.
흑효가 이번만큼은 자신 있다는 듯 턱을 살짝 들고는 답했다.
“선천마령지체.”
적면인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선천마령지체에 대해서는 이미 아픈 기억이 있지 않던가?
언젠간 다시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취하고 말겠다고 다짐했던 것이기도 하다.
한데 이 금청서가 선천마령지체를 찾아낼 수 있다는 건가?
그 말인즉슨…
“련주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선천마령지체에 적서향을 뿌려 두셨소. 인간은 느낄 수 없는 무색무취의 적서향이기에 선천마령지체는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소.”
“과연.”
적면인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흘.”
“……?”
“사흘을 더 기다려 주지. 그 이후에도 신호가 없다면 본교가 먼저 행동으로 옮긴다.”
그 말은 사흘 후에는 마령교가 먼저 작정하고 정도맹을 칠 거라는 말이다.
흑효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적면인을 보았다.
“한데 그만한 병력은 있소?”
조금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묻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소모전을 펼치면서 마령교는 어떠한 압도적인 힘도 보인 적이 없었기에.
적면인이 피식 웃더니 몸을 훌쩍 날렸다.
그는 곧 바위 꼭대기에 올라섰다.
흑효가 그를 따라 경공을 펼쳐 바위 꼭대기까지 올랐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순간,
“……!”
흑효의 눈동자가 커졌다.
바위산 뒤편에 운집해 있는 수많은 무인들.
아니, 저들을 무인이라고 할 수 있나?
‘도대체 저것들은 뭐지?’
흐느적거리면서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웅얼거리는 자들.
그들에게서 뿜어지는 마기가 이곳까지 탁한 공기로 와 닿았다.
흑효는 다시 한 번 긴장하며 속으로 다짐했다.
‘거사가 끝나면 반드시 마령교를 정리해야 한다!’
적면인이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상대가 누구든.”
**
똑… 똑…
동혈 안쪽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적무린은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서래향이 나른한 잠에 빠져 있었다.
적무린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지난 밤, 두 사람은 열락의 밤을 보냈다.
아직도 가슴에는 서래향의 뜨거운 숨결이 와 닿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젠 끝이다.
곧 자신의 몸으로 들어온 세혼폭멸고가 제멸고독단을 완전히 갉아먹은 후 자멸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몸에도 맹독이 퍼져 죽으리라.
내공으로 몸을 보호한다고 해도 분명 한계가 있으리라.
이젠 미련을 가질 때가 아니다.
적무린은 벌떡 일어나서 바지를 챙겨 입었다.
그리고 장삼을 주워들어 걸쳐 입으려다가 멈칫하고는 서래향의 나신을 가만히 덮어 주었다.
그때였다.
“크읍…!”
단전 부위가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통증이 서서히 혈맥을 따라 싸늘하게 휘돌아 가는 기분이다.
‘중독이 시작됐군!’
다행히 내공을 끌어올려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아직은 심각한 단계가 아니었다.
우선은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잠시 식은땀을 흘리면서 기분 나쁜 통증을 참아낸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감각이었지만, 내심 다행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이런 통증이 있다는 것은 세혼폭멸고가 자신의 몸으로 온전히 들어왔다는 뜻이니까.
아마도 지금쯤 세혼폭멸고는 자신의 몸속 어딘가에서 몸부림을 치며 죽어 가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그런 모습으로 죽어 갈 것이다.
‘홍묘님. 부디 행복하십시오.’
곤히 잠든 서래향을 보며 적무린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가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으음…!”
희미하게 들려오는 신음소리.
잠시 멈칫거렸던 적무린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걸음을 성큼 내디뎠다.
하지만 끝내 그의 발길을 붙잡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무린…?”
잠결에서 이제 막 깨어난 서래향의 목소리.
적무린의 시야가 일순 흐릿해졌다.
죽음을 앞둔 이 순간에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줄은 몰랐다.
서래향은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몸을 일으키다가 곧 상황을 인식하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앗, 이게 어떻게 된…?”
결국 적무린은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돌아섰다.
“홍묘님…”
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리듯 말했다.
죽음을 앞두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무사하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애써 눈물을 참고는 있었으나, 그의 표정은 겁먹은 아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서래향이 그를 보고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장삼자락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가슴에 꼭 쥔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설마… 내가 널 덮친 거야?”
“…예?”
“정말 미안해. 나, 왜 기억이 없지? 내가 그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된 거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미간을 곱게 찡그린 채 진지하게 캐묻는 서래향을 보자니, 적무린은 조금 전까지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자신이 바보가 된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이 언뜻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홍묘님은 저런 여자다.’
비로소 희미한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행복하십시오.”
적무린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자, 서래향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인사가 그래? 어디 멀리 가기라도 할 사람처럼. 그나저나 내가 적 대주한테 이상한 짓 한 건 아니지? 그러니까 내 말은… 음… 뭐, 채찍을 들었다거나… 음… 밧줄로 묶는다든지… 아니면… 촛농… 뭐… 그런….”
멍한 표정으로 듣던 적무린이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서래향의 얼굴이 더욱 발갛게 달아올랐다.
“왜, 왜 그러는 거야? 정말 내가 이상한 짓을 한 거야?”
그녀가 얼른 다가서자, 적무린이 반사적으로 물러나며 재빨리 손을 뻗었다.
탁탁탁.
순식간에 점혈 당한 서래향은 그 자리에서 목석처럼 굳은 채 꿈쩍도 하지 못했다.
대신 눈만 둥그렇게 뜨고는 연신 끔뻑였다.
“어…? 무슨…?”
“죄송합니다, 홍묘님. 이제 정말 시간이 별로 없어서… 크읍!”
순간, 적무린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서래향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무린! 왜 그래? 괜찮은 거야?”
“두 시진 후에 마혈이 풀릴 겁니다.”
“잠깐만! 기다려 봐!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은 해야 할 것 아냐!”
서래향이 소리치며 얼른 내공을 끌어올렸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적무린보다 훨씬 심후해진 내공 덕분에 이렇게 간단히 점혈을 당할 리가 없었다.
‘어째서…?’
그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적무린이 말했다.
“세혼폭멸고가 선천지기까지 완전히 소멸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내공은 다시 회복될 겁니다. 그럼.”
적무린이 몸을 돌리고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갔다.
“무린! 무린!”
어두컴컴한 동혈에서 서래향의 목소리만 애처롭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