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339화 (339/670)

# 339

귀환 마교관

339화

“쿠웨에엑!”

시뻘건 핏덩이와 함께 진득한 녹빛 액체가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적무린은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고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발 아래로 구름이 자욱했다.

애초에 천 길 낭떠러지로 몸을 던지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이 정도로 겨우 숨이 차다니.’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무림에 처음 발을 들일 때는 장대한 꿈을 꾸었다.

무림 최강의 사내가 되어서 천하를 오시하며 만인의 지존이 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는 나이를 먹어 가면서 깨달았다.

인생이란 하나씩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결국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포기해 갔다.

이룬 것보다 포기해 버린 것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지금….

‘이딴 곳에서 온몸이 썩어 가는 채로 죽게 생겼군.’

긴 한숨을 내쉬고는 발아래에 깔린 구름을 보았다.

마치 자신이 내뿜은 한숨이 저 많은 구름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몸을 던지기 위해 이곳으로 올라왔건만, 만사가 귀찮아졌다.

썩어 가며 죽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한데 아무렴 어떤가?

결국 죽으면 끝인 것을.

오히려 죽음을 회피하려는 게 더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닌가?

그래, 그냥 이대로 죽자.

운명을 받아들이고.

이 독도 결국 스스로 선택한 몫이 아니던가?

절벽에 걸터앉아 이 절경을 바라보며 죽어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쨌든 마지막에는 만인을 발아래에 두었군.’

그런 실없는 생각에 쓴 웃음이 배어나왔다.

그때였다.

“한가롭군.”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잠시 움찔거린 적무린이 피식 웃어 버렸다.

이젠 헛것이 들리는 모양이다.

이런 곳에 누가 찾아올 리는 없다.

하긴 이만큼 중독을 당했으니 환청이 들린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지 않나?

그러고 보니 이 목소리는 사비강 교관이 아니던가?

지금쯤 땅속 깊은 곳, 관 속에 누워 생사를 헤매고 있을 자의 목소리가 들리다니.

생사지경에서는 영혼도 통하는 것일까?

그런 실없는 생각이 들자 괜히 말을 걸어 보고 싶었다.

“당신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비강 교관.”

“그런 소리 자주 듣지.”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듣고 있는 것처럼 대답을 해왔다.

적무린은 조금씩 흐려지는 의식을 애써 부여잡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나중에 깨어나면… 내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내가 왜?”

“만약 내가 홍묘님을 막지 못했다면… 교관은 절대로… 깨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내 핑계대지 마.”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괜히 내 핑계를 대고 홍묘와 불타는 밤을 보내고 싶었던 것 아냐?”

“훗, 어느 누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니지. 홍묘 정도면 그럴 만하지. 왜 있잖아? 저런 여자와 하룻밤 잠을 잘 수 있다면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고 말하는 인간들.”

“날 잘못 보셨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적 조교가 그런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르는 거지.”

“영혼의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교관은 한결 같군요.”

“그럼.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안 좋거든. 그래서 어땠어?”

“뭐가 말이오?”

“홍묘와의 하룻밤 말이야. 좋았어? 뭐, 당연히 목숨 걸고 나눈 운우지락인 만큼 끝내줬겠지? 자세히 좀 설명해 봐. 난 들을 자세가 되어 있으니까.”

적무린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죽어 가는 동안 망상 속에서 벌어지는 대화라지만….

‘뭐 이리 현실감 돋는….’

그야말로 바로 뒤에 사비강이 앉아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는 것 같지 않은가?

피식 웃어 버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가 순간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으흐어억!”

평소 그답지 않게 소스라치게 놀란 적무린이 자칫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의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떨어진다!’

찰나,

턱!

사비강이 손을 뻗더니 적무린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아슬아슬했군. 조심해야지.”

적무린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연신 끔뻑였다.

‘이 빌어먹을 독! 도대체 얼마나 지독하기에 환청도 모자라 환시와 환각까지…!’

사비강이 휙 손을 들어 올리자, 적무린이 절벽 위로 솟구쳐 올라가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현재 적무린은 독상이 심각해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과 별 다를 바가 없는 상태였다.

때문에 바닥을 구르면서도 극심한 통증 때문에 까딱 정신을 잃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이쯤 되자 적무린은 지금 일어나는 일이 실제인지 허상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사실 사비강은 추적의 달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흑랑대의 도움을 받아 이곳까지 어렵지 않게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적무린은 지금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비강은 적무린을 보고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그 앞에 쪼그리고 앉으며 히죽 웃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듣자고. 적 조교가 죽어 버리면 그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잖아?”

‘고작 그런 이유로 날 살려 주겠다는 거냐!’

그런 목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을 눈치 챈 것인지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지금쯤 목소리가 안 나올 거야. 뭐, 걱정하지 않아도 돼. 독만 제거하고 며칠 푹 쉬면 몸은 정상으로 돌아올 테니까.”

적무린이 가물가물 흐려지는 의식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며 사비강을 노려보았다.

‘저건… 뭐지?’

그러고 보니 풀어헤쳐진 사비강의 옷깃 사이로 뭔가가 보였다.

쇄골 사이에 뭔가 박혀 있었는데, 해골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해골 모양은 대각선으로 금이 가 있었다.

마치 깨진 것처럼.

‘가만… 저 해골의 눈이 점점 녹색으로….’

그 생각을 끝으로 적무린은 앉은 채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사비강이 그의 등 뒤로 돌아 나오며 중얼거렸다.

“서둘러야겠군.”

마침내 그가 적무린의 등에 양손을 뻗은 뒤 운기를 시작했다.

우우우우우…!

희미한 기의 공명이 시작되면서 사비강의 양손이 녹색으로 점점 물들어 갔다.

뿐만 아니라 그의 쇄골 사이에 박힌 해골에서도 녹색 빛이 점점 진해졌다.

**

“혈색이 붉은 빛으로 변했습니다.”

련주의 막사로 찾아온 류여중이 굳은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침상에 정좌하고 있던 허무극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의 눈빛에 냉랭한 기운이 서렸다.

“홍묘가 떠났군.”

“혹시 모르니 정도맹으로 파견한 자의 연락을 기다리는….”

“아니.”

허무극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너무 늦다.

게다가…

“만약 일이 틀어졌을 때는 거사를 치르지 않을 생각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신중보다 신속하게 일을 처리할 때지.”

“옳은 말씀이십니다.”

류여중도 인정했다.

세혼폭멸고의 혈색이 붉게 변했으니, 홍묘가 자폭을 한 게 틀림없으리라.

하지만 너무 오래 걸렸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그래서 정도맹으로 파견한 자의 연락을 기다리고 싶은 거다.

하지만…

‘련주님의 말씀도 일리는 있다.’

만약 일이 틀어졌다면?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더욱 빨리 이쪽에서 먼저 움직여야 한다.

분명한 건 세혼폭멸고의 반응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허무극이 침상에서 일어나 손을 뻗자, 저만치 옷걸이에 걸려 있던 장삼이 휙 날아와 그의 어깨에 둘러졌다.

“마령교에 연을 넣고 정도맹을 친다.”

“명 받들겠습니다!”

류여중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대답하고는 돌아섰다.

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판은 벌어졌다. 이기는 것만 남았다!’

**

재령산 인근에 위치한 의파(醫播) 지단.

지단주 곡자강(谷子岡)은 맹의 본단에서 파견되어 온 무인을 대면하고 있었다.

그는 구윤의 직속 기관인 혜성각 소속 무인, 석소룡(石小龍)이었다.

석소룡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곡자강은 길고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소리쳤다.

“그게 정말인가!”

그의 음성에 노기가 단단히 느껴졌다.

석소룡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해서, 총군사께서는 의파 지단이 속히 재령산으로 지원군을 급파하길 바라십니다.”

“당연한 일! 혈사련과 마령교가 작당을 하다니! 본맹이 대체 얼마나 우습게 보였다는 거지? 맹주님은 무사하신 것이 확실한가?”

“맹주님은 무탈하십니다. 맹주님께서도 상황을 봐서 재령산으로 오실 예정입니다.”

“그렇군! 알겠네. 내 당장 지단의 모든 조직을 이끌고 재령산으로 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돌아가 곧바로 보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참, 또 하나.”

“말씀하십시오.”

“이 사안을 사비강 전 국주를 통해 알아냈다고 했는데, 그럼 그는 어떻게 된 건가?”

“감찰국의 당 대주님이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만, 경과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가 출발할 때까지는 사비강 전 국주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었습니다.”

“흐음. 그 정도로 위독한가?”

“사실… 당 대주님도 장담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저런…!”

곡자강이 혀를 차고는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그런데 아주 잠깐, 보고를 올렸던 석소룡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너무나 짧은 순간이었기에 그는 곧 그 느낌을 지우고는 돌아섰다.

그런데 발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다시 그가 곡자강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들었던 위화감은 지우고, 이곳 의파 지단에 들어서면서부터 든 생각을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뭔가?”

“지단의 무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말하지 않았나? 현재 비상시를 대비해서 특별 훈련 중일세.”

“그러니까 전 그 장소에 대해 여쭙는 겁니다.”

그러자 곡자강이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그가 잠시 침음을 흘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체로 명이 짧은 자들의 특징이 뭔 줄 아는가?”

“예…?”

“바로 그 쓸데없는 호기심일세.”

“무슨…?”

찰나,

팟!

놀랍게도 곡자강이 바로 코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경신법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그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는데, 코앞이었다.

그 의문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석소룡은 자신의 단전을 비집고 들어오는 뜨끈한 감각을 느꼈다.

“끄윽…!”

고개를 숙여 보니 단검 한 자루가 단전 깊숙이 쑤셔 박혀 있었다.

“이게… 무슨…! 끄아아악!”

곡자강이 단검을 비틀더니 그대로 사선으로 그어 올렸다.

비명과 함께 쓰러진 석소룡은 한쪽 구석에 처박힌 채 두 눈을 허옇게 뒤집고는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곡자강이 혀를 차고는 단검을 그의 몸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툭.

“그러게 왜 쓸데없이 자꾸 물어보나?”

석소룡은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는 한 차례 크게 몸을 떨고는 이내 축 늘어지더니 다신 움직이지 못했다.

곡자강이 그를 지나쳐 방안으로 들어갔다.

동경을 앞에 둔 그가 옆에 놓인 붓을 들고는 얼굴을 녹색으로 칠하기 시작했다.

“무인들은 어디에 있냐고? 다들 특훈 중이지. 마병이 되어서 말이야.”

곡자강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키들거렸다.

잠시 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섰다.

곡자강 아니, 녹면인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사비강이… 그렇게 됐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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