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
귀환 마교관
275화
“인왕채와 거래하는 노예상들은 제각각 다른 지역의 상단이나 조직에서 파견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서로 연관성이 없다는 건가?”
“우선은 그렇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닌 걸 밝혔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노예상들이 속한 조직에서 접선하는 곳을 전부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중첩되는 곳이 있었나?”
“예, 있었습니다.”
사비강의 말에 홍염이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말로 전달하면 매우 간단한 내용이지만,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인력과 고도의 추적술이 필요하다.
사비강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훌륭하군. 그래서 거긴 어디지?”
“각각의 조직이 접선하는 곳 중에서 중복되는 곳은 바로 의랑촌(議郞村)에 위치한 어느 장원이었습니다.”
“의랑촌이라. 거기가 어디지?”
“정도맹과 혈사련의 접경 지대입니다. 이치로 따지자면 정도맹의 영역입니다만, 거리상 따지면 혈사련과 더 가깝지요.”
“그렇군. 장원에서 무슨 이유로 노예들을 산다는 거야?”
“거기까지는 파악되지 않았습니다만, 혹시 천신교(天神敎)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천신교?”
사비강이 이맛살을 구겼다.
처음 듣는다.
홍염이 말을 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장원은 천신교의 근거지입니다.”
“천신교가 뭐하는 곳이지?”
“저희도 아직까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신흥 사이비 종교로 판단됩니다.”
“천신교라….”
사비강이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좁히고는 침음을 흘렸다.
신흥 사이비 종교라니.
전생에도 이러한 일이 있었던가?
비록 전생에 자신이 용천관에서 허드렛일을 했다지만, 나름 많은 정보를 보고 들었다.
온갖 허드렛일을 하다 보면 오히려 주워듣는 정보가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천신교를 자신이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종교라는 건 잠재적인 파급력을 가지기 마련이다.
이들이 벌써 곳곳의 조직을 통해서 노예상들을 모으고 있다.
그렇다면 세력이 꽤 크다는 뜻이 아니겠나?
그렇다면 추후에 어떤 식으로든 정도맹이 견제를 했을 법하다.
더구나 의랑촌은 정도맹의 관할지가 아닌가?
‘역사가… 바뀌었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 원인은 자신의 행보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사비강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하면 정도맹에서는 천신교를 파악한 상황인가?”
“일단 천신교에 대해 알고는 있습니다. 다만 천신교가 인신매매를 하고 있다는 것은 저희가 최초로 밝혀낸 부분입니다.”
“하면 정도맹에서도 예의 주시하는 중이다?”
“지금까지는 그런 분위기로 보입니다. 재미있는 건 오히려 혈사련이 천신교를 더욱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비강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역시 혈사련이 그들과 관련이 있다는 건가?”
“아뇨. 그 반대입니다. 혈사련과 천신교가 최근 소소한 마찰을 빚으면서 갈등 상태인 것으로 압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거리로 따지자면, 정도맹의 지단보다 혈사련의 분타가 훨씬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의랑촌과 가깝다는 정도맹의 지단은 어디지?”
“은시현(恩施縣)에 있는 은시 지단입니다.”
“혈사련의 분타는?”
“그 남쪽에 위치한 응천현(膺天縣)의 응천 분타입니다. 벌써 몇 차례 무력 충돌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해결이 안 됐다?”
“예. 천신교에도 상당한 무공을 지닌 자가 있는 듯하고, 또 하나는 지리적으로는 정도맹의 관할지이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속만 썩이는 중으로 보입니다.”
“흐음.”
사비강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천신교에서 노예를 사들인다….
인신공양(人神供養)이라도 할 셈인가?
생각할수록 역겨운 일이었지만, 역시 사이비 종교와 관련되었다면 억측이라고만 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관군이 개입하지 않는 건 둘 중 하나다.
천신교에 관군도 감당하지 못할 무림 고수가 있거나, 천신교의 행위를 아직 눈치 채지 못하고 있거나.
‘하긴. 그들이 인신매매를 한다는 건 귀영단이 거의 최초로 알아낸 셈일 테니까.’
사비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다. 매 국주에게도 그 사실을 전하도록. 은시 지단에서 이 일을 왜 묵과하고 있는지도 판단해야 할 테니.”
“알겠습니다.”
홍염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기척을 스르르 지워 갔다.
한편, 옆에서 대화 내용을 모두 들은 추량이 물었다.
“사부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뭐든 잘 이용하면 무기가 되는 법이지.”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런 게 있다. 두고 보면 안다.”
사비강이 대답하는 사이, 마침 건물 아래층 어딘가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려 왔다.
한바탕 요란한 소리가 울리고 나서 신생조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건물 밖으로 튕기듯 날아갔다.
연무장에 나뒹군 신생조원들이 다음에는 반드시 암살하고 말겠다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는 물러갔다.
사비강이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는데, 마침 추량의 목소리가 등을 때렸다.
“사부님. 근데 이거 정말 깨어나긴 하는 거죠?”
돌아보니 추량이 열심히 플라탄의 알을 향해 마나를 쏟아 붓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 돌덩이 같은 플라탄의 알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비강이 툭 던지듯 말했다.
“당연하지. 더 정성을 쏟아라.”
**
신생조와 묵귀대의 사건은 징계위에 회부되었다.
이후 혈사련주는 최종 결정을 내리기 위해 신생조원들과 사비강을 대회의장으로 불러냈다.
사비강과 신생조원들이 한가운데에 서 있었고, 정면의 단상 위에는 혈사련주가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좌우로는 혈사련의 수뇌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모처럼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한 독고진은 연신 피어나오는 조소를 참지 못한 채 사비강을 응시했다.
‘내 언젠간 네놈이 사고를 칠 줄 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비강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혈사련주를 마주 보았다.
뇌전흡살공을 익힌 자.
마계가 침공했을 때, 앞장서서 그들의 칼이 되어 중원인을 사냥했던 자.
곱씹을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사비강은 그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시종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마침내 련주가 입을 열었다.
“징계위에서 자네에게 내릴 처벌 수위를 결정했네.”
그러자 사비강이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감히 혈사련주 앞에서 웃음을 짓다니!
독고진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노골적으로 살기를 피워 올렸다.
지금 뭘 잘했다고 저런 시건방진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뒤통수라도 거세게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비강의 웃음이 신경 쓰인 것은 독고진 뿐만이 아니었다.
련주, 허무극 역시 사비강의 표정을 보고는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웃는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오.”
저, 저 개망나니 같은 놈이!
독고진은 이제 뒷목을 잡고 눈이 뒤집히기 직전이었다.
혈사련에 온 첫날도 저렇게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하오체를 쓰더니.
지금 상황을 알고는 있는 건가?
반면 허무극은 이맛살을 슬쩍 구기고는 물었다.
“뭐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건가?”
“내 알기로는 이미 이 녀석들은 징계를 받아서 편성된 조인 것으로 알고 있소. 한데 여기서 또 징계를 내린다니? 뇌옥에 갇힌 자가 죄를 지었다고, 뇌옥 속의 뇌옥에 또 가둘 수 있겠소?”
“하면?”
“뭐, 기한을 늘릴 수는 있을 거요. 신생조로 지내야 할 기한을. 뇌옥에 갇힌 기한을 늘리듯이.”
그러자 혈우당주(血雨堂主) 신관철(申觀哲)이 얼굴이 벌게져서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닥쳐라! 누구 좋으라고 그딴 소리를 하는 거냐? 저 개망나니 같은 것들이 묵귀대원 다수의 목숨까지 앗아간 것을 정녕 모른 척 할 셈인가!”
묵귀대는 혈우당 소속이었다.
그러니 혈우당주 신관철은 사비강의 말에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물었다.
“하면 어쩌면 좋겠소?”
“어쩌긴! 당연히 파문해야 한다! 저런 개망나니 같은 놈들은 본련에 발을 디딜 자격이 없다!”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수위.
때문에 신생조원들 중 누구도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몸담았던 혈사련에서 파문을 당한다는 것은 가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때문에 신생조원들 낯빛이 어두워졌다.
특히 맹가숙은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신관철을 노려보았다.
‘저 빌어먹을 새끼…!’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이 과연 천귀대주의 생각이었는지, 혈우당주의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사비강이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파문이라….”
그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독고진이 내심 조소를 지었다.
‘흥, 사태가 이 지경이 될 줄 몰랐더냐?’
그런데 사비강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럼 뭐 할 수 없지. 파문하시오.”
“뭐?”
“대신 나는 그럼 오늘부로 정도맹으로 돌아가겠소.”
“뭣이?”
장내에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비강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뭐, 당연한 것 아니오? 애초에 나는 이곳에 신생조를 계도할 목적으로 초빙되어 왔소. 교관의 자격으로 말이오. 한데 아쉽게도 내가 가르칠 신생조는 이제 사라진 셈이니, 더 이상 내가 혈사련에 머물 이유는 없지 않소?”
구구절절 옳은 말이니 논리적으로는 반박할 명분이 없다.
그렇다고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사비강을 향해 ‘볼모’를 운운한다면 정도맹과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뜻과 다름없을 터.
어디까지나 사비강은 홍묘와 ‘정당한 거래’에 의해서 이곳으로 넘어온 것이었다.
그러자 듣고만 있던 류여중이 슬며시 나섰다.
“교관께서는 너무 편한 대로만 해석하시는군요.”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물었다.
“불편하게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 거요?”
“사실 이번 사건에서 신생조는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같은 조직의 무인을 살해하고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세상이 비웃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해서?”
“교관의 말대로 신생조는 이미 한 번 징계를 받고 있는 신분입니다. 그러니 그 이상의 징계라면 파문밖에 없지요. 그리고 신생조를 담당한 교관도 책임이 있습니다.”
“내게도 그 책임을 묻겠다?”
“물론입니다. 다만 정도맹에서 친히 파견 나오신 교관을 함부로 징계할 수는 없을 테니, 그 책임을 다른 방식으로 돌리려 합니다.”
“다른 방식이라 함은?”
“신생조원들이 전원 파문되더라도, 교관은 이곳에 계속 남아 다른 교육생을 맡아 주시는 겁니다. 그럼 거래의 조건도 깨지 않는 것이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이 역시 논리적으로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때문에 상황을 지켜보던 독고진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흥!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고 하더니 꼴좋구나!’
하지만 사비강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듯 묘한 웃음을 짓더니 혈사련의 교관이 모여 있는 곳을 보았다.
“호오, 그렇소? 그럼 내가 어떤 반을 맡으면 되겠소?”
어딘지 음흉한 미소에 혈사련 교관들의 낯빛이 굳었다.
사비강의 두 눈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