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
귀환 마교관
270화
“방금, 사비강이라고 했나?”
“그런데?”
만생검살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다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한참이나 앙천대소를 터뜨리던 그가 사비강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이 정녕 사비강이라는 말이렷다?”
“그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먼 길 떠날 수고를 덜었구나.”
“그 말은 누군가….”
“내게 사주를 했다는 거지.”
“그게 누구냐?”
“저승에서 알아보거라.”
스스스스.
만생검살의 기도가 또 달라졌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가진 모든 내공을 끌어올리는 듯했다.
이를 본 석탄강과 유송령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애초에 우리가 싸워서 이길 자가 아니었군.’
자신들을 상대하면서 이렇게까지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사비강 때문이었으리라.
사비강이 두 사람에게 전음을 흘리는 걸 눈치 챈 이상, 이때를 대비해서 처음부터 자신의 기도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은 것이리라.
사비강의 눈에도 이채가 서렸다.
“과연. 명불허전이군. 이 정도일 줄은 나도 몰랐어.”
“마치 나를 알고나 있었다는 듯 나불거리는구나!”
말을 마친 만생검살이 사비강을 향해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쒸에에엑!
쩌엉!
천둥 같은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촤아아앗!
사비강이 얼른 다리를 벌리고는 중심을 잡았다.
그는 무려 오 장여를 미끄러졌다.
베르타스를 쥔 손끝이 저릿저릿하게 울려 왔다.
사비강이 입매를 비틀었다.
“알고 있었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
“그 말은 날 일부러 찾아왔다는 뜻인데….”
말을 뱉던 만생검살의 시선이 한쪽으로 힐끔 향했다.
아까부터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노려보는 영감.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니, 이제 기억이 났다.
“그랬군. 영감은… 그때의 그 영감이었군. 그런 거였나? 이자를 고용해서 날 제거하려는?”
그러자 사비강이 웃었다.
“아니. 반대다. 내가 널 제거해서 영감을 고용하려는 거지.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널 한 번쯤은 보고 싶었고.”
“날? 개인적으로?”
“그래, 도대체 어떤 년이기에 만 명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앗아갔는지 궁금했거든.”
순간 만생검살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흠칫거리고는 사비강을 돌아보았다.
추량이 석탄강을 힐끔 보고는 물었다.
“방금… 년이라고 한 거 맞지?”
석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놈이 아닌가?”
한편, 만생검살은 낭랑하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사비강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칭찬은 고맙지만 아직 만 명의 목숨을 채우려면 멀었다.”
“아니. 넌 채운다. 향후 십 년 이내에. 지독하고 악착같이 채우지. 그래서 난 널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네가 여인이라 할지라도.”
일행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조금 전에는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틀림없이 ‘여인’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게다가 십 년 이내에 벌어질 일을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이 단정하다니.
추량을 제외한 일행들은 사비강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추량 또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역시나….
“저어… 영감님? 만생검살이 여잡니까? 제가 볼 땐 어느 모로 보나 남자인데요.”
“그러게 말이다. 내 눈에도 그리 보인다만.”
반면 만생검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당황하고 있었다.
그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사비강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네놈이 어떻게….”
“네가 여자인 줄 알았냐고? 너 스스로 본 모습을 보였으니까. 역근골(易筋骨)의 기법으로 외모를 바꿨다지? 하나만 물어보자. 그렇게까지 하면서 강호인을 만 명이나 죽인 이유가 뭐냐?”
사비강은 마치 과거형처럼 묻고 있었다.
그래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건 만생검살도 마찬가지.
아직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을 지나간 일처럼 묻지 않는가?
게다가 역근골 수법으로 본 모습을 숨기고 있다는 것까지 눈치를 채다니.
도대체 어떻게?
어쨌거나 이미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파악한 이상 굳이 숨길 필요는 없어진 셈이다.
“과연 오백만 냥의 가치가 있었군.”
만생검살이 싸늘하게 말을 뱉더니 갑자기 경계 자세를 풀었다.
곧이어,
우드득. 꾸득꾸득.
그의 전신에서 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체구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딱 벌어졌던 어깨는 어느새 아담하게 변해 버렸고, 각진 얼굴은 부드러운 선을 그렸으며, 탄탄해 보이던 허리는 잘록하게 들어갔다.
전체적으로 작아진 체구였지만,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는 또 한 번 강해진 모습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역근골의 수법으로 체형을 변환시켰을 때는 오롯이 본래의 힘을 발휘하기가 어렵기 마련이다.
한데 이제 본 모습을 되찾았으니, 그 힘의 밀도가 올라갔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한편, 만생검살의 본모습을 본 일행들은 입을 척 벌리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여인은 어딘지 모르게 중년의 나이로 보였지만, 내공이 심후한 탓인지 이십대의 몸매를 하고 있었으며,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나이를 짐작케 하는 그 무언가는 아마도 그녀의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분위기와 막강한 기도 때문이리라.
“나조차도 잊고 있던 모습을 깨우다니. 맹랑하군.”
여인의 모습으로 바뀐 만생검살의 목소리는 외모만큼이나 무척 아름다웠다.
하지만 얼음장보다 차갑기도 했다.
그때 조신량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도,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어째서 내 동생을 죽인 거요?”
“흥! 닥쳐라!”
쒸이이잇!
여인이 느닷없이 품에서 비수를 꺼내 날렸다.
타앙!
마침 그 앞을 가로막으며 나선 추량이 왼손을 뻗자 수호구에서 마나 방패가 형성되면서 비수가 튕겨 날아갔다.
“별 괴상한 수법을 다 쓰는군!”
만생검살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누구냐고? 난 당신 동생이 죽인 남자의 약혼녀다.”
“뭐, 뭐라고?”
“내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았던 단 한 사람을… 당신 동생이 죽였지.”
어금니를 깨문 채 말을 뱉는 만생검살의 얼굴은 그야말로 귀신의 그것처럼이나 섬뜩해 보였다.
한 여인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다른 분위기를 낼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사실 그녀는 격동하는 마음을 주체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오랫동안 기억에서조차 지웠던 그 일을 되새기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혼인을 보름 앞둔 사이였다.
그런데 그가 생사비무를 통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했다.
그가 없다면 이 세상에서 자신이 딛고 설 땅은 어디에도 없었다.
슬픔보다도 더 큰 절망과 두려움이 그녀를 덮쳤다.
암울한 나날을 보내던 끝에 복수를 결심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모두 그녀를 말렸다.
화가 났다.
친구의 복수를 해주겠다며 나서도 모자랄 판에, 생사비무를 통해서 패한 것이니 인정하라는 모진 말만 돌아왔다.
생사비무? 그 따위가 뭔데?
생사비무를 통해 죽으면 다시 살아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강호의 예법이라고?
강호의 예법이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누구도 나서지 않겠다면,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
그날부터 와신상담(臥薪嘗膽) 하며 오랜 세월을 미친 듯이 수련하고 악착같이 실력을 키웠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녀의 욕망은 점점 비뚤어져 갔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두가 적으로만 보였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지?’
‘뭐가 그렇게 웃겨?’
‘어째서 너희들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잘만 웃고 떠들었다.
불공평했다.
이 강호에서 오로지 자신만이 지옥 같은 불행을 모두 떠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약혼자가 죽은 것이 어쩌면 강호의 거대한 음모일지도 모르겠다는 피해망상도 더해졌다.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말이 하루하루 가슴에 꽂혔다.
‘그래, 그럼 너희들 모두 불쌍하게 만들어 주마!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느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약혼자를 죽인 놈에 대한 복수였다.
그 다음에는 약혼자의 죽음을 방관했던 자들에 대한 응징이었다.
원수의 형을 찾아가 명검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친형이 만든 검에 목숨을 잃는 비극을 안겨 주고 싶었다.
과연 그는 이름난 대장장이답게 좋은 검을 만들었다.
한데 검신에 ‘만생검’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우스웠다. 가소로웠다.
동시에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딴 시답잖은 명분을 내세우는 녀석들에게 아주 제대로 엿을 먹이기로 마음먹었다.
만생검?
웃기지 마라. 이제부터 만 명의 목숨을 가져가 주마.
그렇게 만생검은 독을 품었다.
만생검살의 탄생이었다.
반드시 만인의 목숨을 앗아가리라.
“그런데… 향후 십 년 이내에 이룬다니. 마치 본 것처럼 얘기하는군.”
이야기를 들은 사비강이 미간을 좁혔다.
“겨우 그런 이유로 무고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죽여 댄 건가?”
“겨우? 그렇지. 네놈에게는 겨우 그런 일이겠지. 하지만 내게는 이 세상 전부였다.”
사비강이 복잡한 시선으로 만생검살을 바라보았다.
과연 이 정도의 능력이라면 죽이기가 아깝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한 여름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그녀는 약혼자가 죽은 이후, 남들이 상상하지 못할 만큼 강해졌다.
아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리라.
또한 그녀도 몰랐던 선천적인 재능의 결과이리라.
하지만 그 독기를 조금만 더 대의적인 곳에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령 마계의 군단이 침입했을 때, 그들과 맞서 싸웠더라면.
하지만 그녀는 반대의 선택을 내린다.
그녀의 분노와 상실감은 오로지 강호인에게 국한되어 있었기에.
세상의 모든 강호인이 미웠던 그녀에게 마계의 군단은 오히려 좋은 수단이 되어 주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마왕을 찾아가 앞잡이 노릇을 한 그녀다.
심지어 마왕의 총애를 받아 마계까지 건너가서도 한동안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다만 강호인을 섬멸하겠다는 목적이 사라지자, 그녀는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는다.
사비강은 솔직하게 말했다.
“죽이기 아깝군. 생각을 달리해 볼 여지는 없겠나?”
“그딴 건 없어.”
여인의 눈빛은 뱀처럼 차가웠다.
사비강이 쓴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빈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에.
이미 그녀의 저 비뚤어진 심성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만생검살.
만 명의 목숨을 살려야 할 저 검에는 벌써 수백 명의 피가 묻어 있을 터였다.
그리고 이대로 두었다가는 수천 명을 넘어 결국 만 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역시 어쩔 수 없다.
“죽여야겠군.”
사비강은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만생검살을 보았다.
그의 전신에서 살기가 피어나오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전에 없이 강한 살기와 기도였다.
만생검살 역시 천천히 기수식을 취해 갔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대라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강박.
마침 사비강이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 보시오, 영감. 약속은 지킬 테니.”
지켜보던 일행들이 저마다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만큼 사비강의 목소리는 냉엄했다.
만생검살이 미간을 잔뜩 좁히고는 사비강을 빤히 쏘아보았다.
‘과연 보통 놈이 아니구나. 이번 일격에 내 모든 걸 걸어야겠어!’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위협이 느껴진다.
만생검살은 깨달았다.
이 승부가 단 일격에 끝날 것이라는 것을.
다시 말하면, 그건 자신에게 딱 한 번의 기회만 남아 있다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후우우웅!
만생검살을 중심에 두고 사방으로 기풍이 불어 갔다.
사비강이 싸늘하게 읊조렸다.
“당신에게 만 명의 목숨을 되돌려 주지.”
다음 순간,
타앗!
먼저 몸을 날린 사람은 만생검살이었다.
쒸이이이잇!
허공을 가르며 그녀의 검이 날카롭게 파고들어 왔다.
그녀는 단언할 수 있었다.
이 일격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완벽했다고.
파앙!
찰나, 사비강도 무서운 속도로 그녀에게 마주쳐 갔다.
쒸에에에엑!
마침내 베르타스와 만생검의 검봉이 정확히 마주쳤다.
쩌엉!
다음 순간 만생검살은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들이 매우 느리게 보였다.
까차자자장!
놀랍게도 베르타스는 만생검을 끝자락부터 조각조각 부수며 파고들어 왔다.
스콱!
손목을 베인 만생검살이 검을 놓치고 말았다.
어차피 손잡이밖에 남지 않은 검이었다.
한데 더 놀라운 현상이 이어졌다.
만 개의 조각으로 부서진 만생검신의 파편이 일시에 그녀를 덮쳐 오는 것이 아닌가?
쒸익! 쒸익! 쒸이익! 쒸에엑!
푸푸푸푸푸푸푹!
“아아악!”
온몸에 수많은 파편을 박힌 그녀가 울컥 피를 토하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무릎을 꿇어 갔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딱 벌린 채 꿈쩍도 하지 못했다.
단 일격으로 이루어진 승부.
그녀의 예상은 정확했다.
그녀가 입매를 비틀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오백…만 냥으로는… 턱도 없었잖아.”
“죽이기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비강이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고맙…군.”
마지막 말을 겨우 내뱉은 그녀가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는 어쩐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