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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마교관-271화 (271/670)

# 271

귀환 마교관

271화

“놀라울 정도로 흔적을 남기지 않았군요.”

추량이 혀를 내둘렀다.

그는 추종의 달인이라 볼 수 있었다.

한데 그런 그조차도 만생검살의 집에서는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마도 의뢰자가 아주 짧게 머물렀다 간 것이리라.

다만 수납장에 술잔이 놓여 있는 위치로 미루어 보아서 방문자가 한 명이었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었다.

잔 두 개만이 다른 것들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 정리되어 있었기에.

추량은 다시 한 번 혀를 내둘렀다.

“의뢰자는 그렇다고 치지만 만생검살도 어지간하군요. 어느 곳에도 그녀가 여자라는 흔적을 찾기 힘들군요.”

“아마 본인이 여자라는 사실을 한동안 잊고 지냈을 거다.”

“그녀 스스로도 잊을 정도라면 남자라고 봐야 할까요?”

“봤잖아? 그래도 사랑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을.”

추량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랑이 사람을 참 약하게 만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반대일 수도 있지. 그만큼 사랑의 힘이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나?”

“아…!”

뭔가 느껴진 게 있는 추량이 잠시 후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오, 역시 그건 사랑을 해본 자의 감상이군요?”

“쓸데없는 소리만 할 거면 그만 돌아가지.”

“잠시만요. 한 번 확인해 보죠.”

“뭘?”

“지켜만 보십쇼.”

추량이 씨익 웃어 보이더니 품에서 누런 종이를 꺼내 들었다.

얼핏 보면 부적처럼 보이는 종이였지만, 부적과 달리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상태였다.

휙! 휙! 휙! 휙!

추량이 방 곳곳에 그 종이를 날리자, 각각의 장소에 종이가 찰싹 달라붙었다.

“뭐지?”

“흑랑대에서 개발한 탐기환색지(探氣換色紙)입니다. 의뢰인이 앉았거나 만졌을 부분으로 판단되는 곳에 뿌려놨죠. 잔존하는 기운에 따라 종이가 변색될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탐기환색지 중 몇 개의 색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누런 종이였던 탐기환색지는 검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추량이 탐기환색지를 거두고 분석에 들어가자, 사비강이 다가와 물었다.

“어때?”

“의뢰자로 추정되는 자에게서 음기와 사기(死氣)가 비정상적으로 많은 양이 탐지되었습니다.”

“그럼 극음의 무공을 익힌 자라는 건가?”

“그게… 좀 묘합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째서?”

“만약 그자가 극음의 내공을 소유한 자라면, 탐기환색지의 왼쪽 모서리가 약간 타들어 갔을 겁니다. 하지만 그자는 이 자리에서 내공을 드러내지도 않았어요. 다만 이건….”

“환경이라는 건가?”

추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자는 평상시에 극음의 기운과 사기에 노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참 이상하네요. 시체를 옆에 두고 잠이라도 자는 걸까요?”

“그 정도라면 시독(屍毒)도 탐지 되었겠지.”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그럼 도대체 뭐죠?”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생각보다 건진 건 없군. 이래서야 네 추종술도 써먹을 데가 없잖아.”

결국 추량이 발끈해서는 소리쳤다.

“겨우 의뢰자가 다녀간 것뿐이라고요! 거기서 의뢰자 정체까지 알아내면 제가 돗자리 깔고 점이나 치지 왜 이러고 다니겠습니까?”

한편, 조신량은 마당에 쓰러진 만생검살의 시신을 보면서 씁쓸한 감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굉장히 원론적인 질문이 허망하게 떠올랐다.

“어째서 이래야만 하는 거지?”

신물이 났다.

원래 강호가 은원관계로 복잡하게 얽힌 곳이라곤 하지만, 이래서야 거미줄처럼 엉킨 관계망 속에서 죽어 가는 곤충과 뭐가 다른가?

언제 다가왔는지 옆에 다다른 사비강이 무뚝뚝한 소리로 말했다.

“흔들릴 것 없소. 앞으로 당신이 마주칠 적은 강호인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될 테니까.”

조신량은 고개를 들고 가만히 사비강을 보기만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어쩐지 사비강의 눈빛만으로도 설명하기 복잡한 뭔가가 있다고 느껴졌기에.

어쨌거나 사비강은 약속을 지켰다.

만생검은 만 명의 목숨을 채우기 전에 산산이 부서졌다.

이제는 자신이 약속을 지켜야 한다.

마침 사비강이 그 결심을 굳힐 수 있도록 말을 꺼냈다.

“약속하지. 당신이 만든 무기들이 결국 만 명 이상의 목숨을 살리게 될 것이라고.”

“이번에도… 믿어 보겠네.”

사비강 일행은 만생검살의 은거지를 떠나 산을 내려갔다.

제법 큰 마을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혈사련의 분타를 찾아서 묵었다.

그리고 귀환이 늦어짐에 따라 천상궁으로 대략의 사정을 전서구로 날려 보냈다.

**

고량주가 식도를 따라 꿀렁꿀렁 잘도 넘어갔다.

탁.

“캬아!”

술잔을 탁자에 내려 둔 맹가숙이 연신 감탄을 터뜨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역시 이 맛이야.”

그가 젓가락으로 전을 집어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맛 좋고! 난 이 집이 제일 맛있더라고.”

“배가 고팠나보군.”

“아니. 여긴 배불러도 맛있다.”

맹가숙이 진조영의 말을 반박하면서 쉴 새 없이 젓가락을 놀렸다.

진조영이 피식 웃고는 맹가숙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안주빨 그만 세우고 한 잔 합시다. 난 술 먹을 때 안주빨 세우는 인간이 딱 싫어.”

“거참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먹자고.”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좋은 일은 무슨. 성질나서 그러지.”

“무슨 일로?”

“그야 뻔하지! 그 사비강 교관인지 뭔지 하는 녀석에게 다들 정신이 팔려서 헤실헤실 거리고 있잖아.”

“뭐, 영감도 즐기는 것 같더만.”

“흥! 즐기긴 무슨. 마셔.”

두 사람이 잔을 부딪치고는 술을 들이켰다.

술잔을 내려놓은 맹가숙의 표정이 짜증으로 물들었다.

사실 진조영의 지적은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사비강과의 대결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문득 그 사실이 한심하게 느껴진 것이다.

해서, 술 한 잔 하자고 부른 것이기도 하고.

마침 저만치 서녘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펼쳐지면서 하늘빛이 아름답게 물들었다.

하지만 맹가숙은 이 시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눈앞에 앉은 진조영도 마찬가지이리라.

“잊지 말자고.”

맹가숙이 불쑥 말을 꺼냈다.

진조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가숙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붉은 노을을 볼 때마다 두 사람의 머릿속은 언제나 피로 물든 광경이 겹쳐졌다.

그리고 그 광경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리라.

하지만…

“그 멍청한 것들은 전부 잊은 것 같더군.”

맹가숙과 어울리던 일당들을 두고 말한 것이다.

어느새 사비강과 대결하는 것에 푹 빠져서 처음의 각오를 전혀 기억도 못하는 듯했다.

특히…

“도비천 그 녀석은 아예 사비강 교관의 앞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야.”

“뭘, 그렇게까지.”

진조영이 툴툴 웃고는 술잔을 비웠다.

그가 이렇게 안주도 먹지 않고 연거푸 잔을 비우는 것은 오늘 저녁노을이 너무 짙기 때문이었다.

“잊지 않았다면 그렇게 헤벌쭉거리며 지낼 수가 없을 테지.”

“너무 그러지 말자고. 영감이나 나나 그리고 그 녀석들이나 어찌 그 일을 잊겠어?”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지.”

“뭐, 그럴 지도. 한데 사비강 교관은 좀 다른 것 같지 않수? 왠지 여느 인간들하고는 좀….”

콰앙!

맹가숙이 느닷없이 탁자를 내려쳤다.

진조영이 그를 빤히 바라보자, 맹가숙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소리쳤다.

“다르긴 개뿔!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사람을 한둘 겪은 줄 알아? 다 똑같은 것들이지. 그 모습에 속으면 끝인 거다. 그렇게 버림을 받고도 아직 깨닫지 못한 거냐?”

“흥분하지 말자고. 내 보기엔 사비강이라는 교관은 어딘지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에….”

“흥! 좀 튀는 행동을 하지만 결국 똑같은 인간이다. 그 따위 정신머리로는 또 조직에 배신을 당할 수도 있다는 걸 모르겠나?”

“…….”

결국 금기시 되어 왔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진조영은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뭐, 영감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마셔.”

그가 맹가숙의 잔에 술을 채웠다.

맹가숙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저녁노을을 바라보다 거칠게 잔을 들이켰다.

“조만간 사비강 교관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반드시 그자를 죽이겠어.”

“영감은 사비강 교관이 겁나?”

“솔직히 말할까? 겁난다. 그자의 무공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자가 너희들의 마음을 풀어 가는 게 두려워. 그렇게 그 녀석이 너희들의 마음에 덧씌워진 갑옷을 하나하나 풀어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순간 맹가숙의 눈동자가 녹빛으로 잠깐 물들었다.

뿐만 아니라 관자놀이의 핏줄이 툭 불거져 나왔다.

그걸 본 진조영이 긴 숨을 내쉬며 다시 술잔을 채워 주었다.

“진정하라고. 또 영감 눈깔 돌아가잖아. 그러다 잘못 되면 어쩌려고 그래? 마셔.”

“흥! 더 이상 잘못될 것도 없어.”

하늘은 점점 더 붉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만큼 두 사람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딱 그때 같군. 저 지랄 맞은 하늘이.”

“그런데 정말 사비강 교관을 끝낼 생각이야?”

“해 봐야지. 왜?”

“실은 괜찮은 정보가 하나 있긴 해서.”

“뭐지?”

“사 교관이 내일 저녁쯤 갑사협곡(岬蛇峽谷)으로 돌아온다는 정보가 있어.”

순간 맹가숙의 눈이 반짝 빛을 뿜었다.

“갑사협곡으로? 그게 정말이냐?”

“며칠 전에 사비강 교관 쪽에서 전서구를 보내 왔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귀환이 늦어져서 지름길을 이용할 모양이야. 갑사협곡을 지나오면 두 시진 정도는 단축할 수 있을 테니.”

맹가숙의 입매가 서서히 치켜 올라갔다.

갑사협곡이 어딘가?

기암절벽을 양쪽으로 끼고 있는 험지 중에서도 험지다.

물론 이곳이 혈사련의 영역인 만큼 혈사련 소속 무인들에게는 그리 위험할 일이 없는 곳이다.

하지만 사비강이 그곳을 지나온다면?

“이젠 본인의 정체성도 잊어버린 모양이군.”

아무리 자신감이 넘친다지만, 그 좁은 협곡을 지나오겠다니.

이거야말로 어서 와서 날 암살하라고 소리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잘 됐군. 이번에야말로 그 교관의 모가지를 딸 수 있겠어.”

“한데 그쪽으로 안 올 가능성도 있지 않겠수?”

“뭐, 그게 대순가? 그럼 그냥 돌아오면 되지. 하지만 허탕 칠 것을 염려해서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겠냐?”

“그건 그렇지.”

“아무리 지름길이라도 거긴 죽기 딱 좋은 장소라는 걸 모르다니.”

“알고야 있겠지. 일종의 허세 아니겠어? 영감도 알다시피 그 교관, 허세가 장난 아니잖아.”

“그 허세 때문에 명을 달리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지. 그리고 그걸 깨달을 때는 이미 목이 날아간 직후고.”

맹가숙이 술잔을 들이켜고는 말했다.

“애들 모으자고.”

“흐음. 하지만 비천이나 다른 녀석들도 그렇게까지 할지 모르겠어. 녀석들, 언제부턴가 그 교관을 상대하는 걸 즐기고 있으니까.”

“흥! 그럼 빠지라고 해. 어차피 그런 놈들이 제일 먼저 배신당하고 질질 짤 놈들이니까. 멍청한 것들이 과거를 너무 빨리 잊는단 말이야.”

맹가숙이 아예 술병 째로 들고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

다음날, 비슷한 시각.

맹가숙은 갑사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섰다.

그의 두 눈은 다부진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후 그의 곁으로 진조영이 다가왔다.

“녀석들은?”

“안 온다더군.”

“흥! 병신 같은 것들! 내버려 둬! 우리도 충분하다. 갑사협곡이라면.”

“영감, 다 좋은데 무리는 하지 마. 그러다 또 독이….”

“시끄럽다. 가자!”

맹가숙이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협곡 안쪽으로 들어간 맹가숙이 붉게 타들어 가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오늘도 그때 생각이 나는군.”

“그날도 이런 협곡이었지.”

진조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다신 떠올리기 싫은 기억임에도 이렇게 자꾸 말을 하는 이유는, 이런 시답잖은 수다가 마음 한 구석의 응어리를 어루만져 주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두컴컴한 협곡.

머리 위로는 붉은 하늘만이 기다란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협곡 안쪽 벽이 갈라진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은신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지형.

잠시 후면 이곳으로 사비강이 지나갈 터였다.

흑귀라는 녀석이 새로 호위를 맡는 듯했지만, 이 정도의 기습이라면 성공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석탄강, 유송령이 자신들을 도울 수도 있다.

아니, 그들은 그들대로 암살을 시도할 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승산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온다! 준비해!]

맹가숙이 얼른 전음을 흘렸다.

저만치 불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분명 협곡 안으로 들어오는 자들이었다.

진조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껏 기척을 죽여 갔다.

맹가숙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매섭게 빛났다.

다음 순간, 맹가숙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하지만 그는 곧 눈을 크게 뜨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네놈이… 왜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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