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
귀환 마교관
259화
황규억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예상 중에 저렇게 생긴 녀석이 있었던가?
인왕채의 구역으로 너무나 태연하게 걸어오는 사비강 일행을 보면서 그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인왕채는 외진 숲속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오지 않고서는 들어올 일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기에 그는 수하를 거느리고 사비강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디서 온 놈들이냐?”
짐짓 위엄을 부리면서 묻자, 사비강이 황규억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툭 내뱉었다.
“채주냐?”
“……!”
순간 황규억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느닷없는 질문에 뭘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당당하게 들어와서 다짜고짜 채주냐고 묻다니?
그것도 한참 윗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함께 온 수하들도 당황했는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어디서 온 자들이지? 혹시 채주님이 아는 자들인가?’
적아가 구별되지 않으니 머릿속이 혼란했다.
만약 거래처의 윗선이라면 자신이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난 부채주요. 그쪽은 어디서 왔소?”
“하나만 묻는다. 모르면 모른다고 대답하면 된다.”
‘뭐,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너희들이 거래하는 조직은 어디냐?”
“뭐라?”
그제야 황규억은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것을 느끼고는 칼을 뽑아 들었다.
차차차차아앙!
동시에 그의 뒤에 서 있던 수하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는 살기를 피워댔다.
“너 이 새끼, 어디서 온 것들이냐? 정도맹이냐?”
“혈사련에서 왔다.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혈사련? 혈사련에서 왜…?”
황규억은 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비강은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았다.
“대답할 생각이 없나보군.”
“뭐?”
팟!
다음 순간 황규억이 두 눈을 부릅떴다.
“헉!”
어느새 사비강이 코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뭐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푸욱!
베르타스가 그의 심장에 틀어박혔다.
“커헉!”
“아는 만큼 고통은 줄어든다. 거래하는 조직이 어디냐? 네가 모르면 채주는 알고 있나?”
입을 쩍 벌린 황규억은 베르타스의 검신을 쥔 채 부르르 떨 뿐이었다.
사비강이 그의 두 눈을 무심하게 내려다보고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역시 네놈들은 아무것도 모르는군.”
츄아아악!
베르타스가 뽑혀 나오면서 그의 몸을 대각선으로 베어 버렸다.
순간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우아아악! 부, 부채주님이 당하셨다!”
“이, 이놈들 짓이다!”
인왕채 무인들이 경악하면서 저마다 사비강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비강이 그들을 훑어보며 싸늘하게 읊조렸다.
“이 쓰레기들 전부 쓸어 버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적무린과 석탄강, 유송령이 적들에게 몸을 날려 갔다.
당장 손에 든 게 없었던 석탄강과 유송령은 권장으로 맞서 싸우다가 상대의 도검을 빼앗아 반격하기도 했다.
몇몇 인왕채 무인들은 눈 뜬 봉사라도 된 마냥 허우적거리다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목이 베이면서 피를 뿜고 쓰러지곤 했다.
흑귀에게 당한 것이었다.
특히 내공이 약한 자들은 흑귀의 어둠 속에 갇히면 거의 살아남기 힘들었다.
사비강은 느긋하게 아수라장이 된 인왕채의 본거지를 거닐었다.
이따금씩 기합성을 터뜨리며 달려드는 자가 나타나면 가차 없이 베르타스를 휘둘러 목을 베어 버리곤 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함에 인왕채 무인들 다수가 놀라서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형국이었다.
건물 한 채에서 무인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자, 사비강은 이맛살을 팍 구기고는 손을 뻗으며 마법을 캐스팅했다.
“토네이도!”
후우우우우웅!
순간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면서 통나무로 지어진 건물을 덮쳐 갔다.
콰콰콰아앙!
강렬한 회오리바람은 건물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던 무인들 역시 거센 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솟구치다가 마구 추락했다.
지금껏 그가 사용한 토네이도 마법과 비교해 보면 그 위력이 몇 배에 달했다.
어떠한 제약도 걸지 않은 순수한 마법이었다.
지금까지는 의식적으로 좁은 범위에서 마법을 사용해 왔다.
하지만 지금 사비강은 그럴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인왕채의 본거지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자, 채주전 안에 있던 육한수가 깜짝 놀라서 달려 나왔다.
그는 속수무책 쓰러져 가는 부하들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마침 채주전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던 사비강이 우뚝 멈춰 서서는 육한수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채주냐?”
“넌 웬 놈이냐?”
육한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보통이 아니군!’
사비강이 피워 내는 살기는 제아무리 채주인 육한수도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비강이 싸늘한 목소리로 툭 내뱉듯 말했다.
“이름이라도 바꾸든지. 사람을 가축만도 못하게 취급하면서 인왕채라니. 뜻은 알고 쓰는 건가?”
“노옴! 웬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죽여 주마!”
차앙!
격분한 육한수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고는 살기를 피워 냈다.
그런데,
“어딜 보고 소리치는 거냐?”
“헛!”
육한수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휙 돌아서는 순간,
쉬컥!
한 줄기 섬광이 날아들면서 그의 목을 뎅겅 베어 내버렸다.
툭, 데굴데굴…
바닥에 떨어진 육한수의 머리가 계단을 따라 굴러 내려갔다.
피츗! 츄우우우웃!
목이 잘린 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더니 그대로 고목처럼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수장이 허무하게 죽어 버리자 인왕채 무인들의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몇몇은 아예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 흑귀의 추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남은 자들은 무기를 버리고 저마다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을 선언했다.
**
“엄마!”
말 수가 적었던 금자연은 추량과 함께 인왕채로 들어서자마자 공터에 서 있는 엄마를 알아보고는 소리쳤다.
멍한 표정으로 시선을 옮기던 주화영은 추량 곁에 서서 울먹이며 선 금자연을 보고는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아아! 내 딸, 자연아!”
“엄마아!”
금자연이 다시 소리치며 엄마를 향해 달렸다.
두 사람이 와락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흘리자, 주변 사람들도 그 모습을 보며 흐느꼈다.
추량 역시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는 시선을 먼 산으로 돌려 버렸다.
한편. 그 시각 사비강은 인왕채 무인들을 노예들이 갇혀 있던 철창 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철커덩!
육중한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철창문이 닫히자, 인왕채 무인들의 표정에도 그늘이 졌다.
“이대로 두면 죽을까요?”
유송령이 그들을 둘러보며 묻자,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운에 맡겨야지.”
때마침 적무린이 다가와서 보고했다.
“말하신 대로 채주의 방에서 금고를 발견했습니다.”
“찾아낸 건?”
“서류나 장부에서는 별달리 건진 게 없습니다. 정황상 이들이 거래 상대에 대해 몰랐다는 건 사실인 듯합니다.”
“흐음. 혈사련이 엮여 있다는 건 발견되지 않았고?”
적무린이 당연한 것 아니겠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강은 적무린과 함께 채주의 방으로 돌아갔다.
금고에는 전표와 은괴가 든 상자가 있었는데, 은괴는 대략 오만 냥 정도 될 듯했다.
전표는 총 백만 냥이었다.
적무린이 나가자, 이번에는 추량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전표와 은괴를 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더러운 수단으로 모은 돈이군요.”
“그 돈을 내가 깨끗하게 써 주면 되겠지.”
사비강이 히죽 웃으며 전표를 챙기기 시작했다.
추량의 시선이 창밖으로 슬쩍 향했다.
그곳에는 아직도 흐느끼는 여인들과 아이들이 있었다.
“그 돈… 다 가져가실 겁니까?”
“왜? 그럼 안 되나?”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추량이 입을 다물고는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자꾸만 창밖의 사람들에게서 시선이 떠나질 않았다.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고는 생각한 바를 꺼냈다.
“전표는 가져가되, 은괴는 저들에게 나눠 주는 게 어떻습니까?”
사비강이 멈칫하고는 추량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길 바라지?”
“그들은 모든 걸 잃었잖아요. 이 돈이 저들에게 기쁨을 주진 않을 지라도 위로는 되지 않겠습니까? 마을을 재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전혀 다른 가능성이 생길 일은?”
“그럴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사부님께 감사하다며 절을 올리겠지요.”
“굉장히 낭만적이군.”
사비강이 냉소를 짓더니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불쑥 말을 꺼냈다.
“하긴 이것도 공부겠지. 그 은괴는 너에게 줄 테니 네 마음대로 써라.”
“예? 이걸 제게 주시겠다고요?”
“그래. 어쨌거나 이곳을 찾아낸 건 너의 공이 크니까 주마.”
“그럼, 정말 제가 마음대로 해도 됩니까?”
“물론.”
사비강이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량이 밝아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그는 곧장 은괴가 든 상자를 들고 나가서는 마당 한복판에 내려 두었다.
여인과 아이들이 멀뚱멀뚱 뜬 눈으로 추량과 상자를 번갈아 보았다.
추량이 덮개를 열자 은괴 오만 냥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여인들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추량이 소리쳤다.
“여러분! 슬프고 괴롭겠지만, 지나간 일은 잊으시고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이 돈은 여기 있던 녀석들이 부정하게 모은 돈입니다. 이 돈을 가져가셔서 부디 마을을 재건하시고, 희망을 되찾으시길 바랍니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마을 주민들은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저걸… 정말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까?”
한 여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물론입니다.”
그러자 여인들이 하나둘 상자 가까이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를 보며 한참이나 수군거렸다.
잠시 후 나이가 지긋한 여인이 추량에게 다가왔다.
어딘지 모종의 결심을 굳힌 모습이었다.
“이 돈으로 우리가 한을 풀 수 있다면… 허락해 주시겠어요?”
“물, 물론입니다. 그 돈은 이제 여러분의 뜻대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돈을 드리고 그 기회를 사겠어요.”
“그게 무슨….”
“우리와 거래해 주세요.”
여인의 말이 끝나자, 다른 여인들도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우리와 거래해 주세요!”
당황한 추량이 얼른 대답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지만 그걸 원하신다면 거래하겠습니다.”
“다른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그, 그러지요. 한데 뭘 거래한다는…?”
추량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여인이 손가락을 들어 올리고는 동혈을 가리켰다.
“우린 저들을 사겠습니다.”
“예?”
놀란 추량을 두고 여인들이 걸음을 옮겨 동혈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 모두 그 어느 때보다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잠시 후,
“으, 으아아악! 이 미친년들아!”
“크아아악! 뜨, 뜨거워! 흐익! 살려줘어어엇!”
동혈 안에서 처절한 비명이 솟구쳤다.
곧이어 시커먼 연기가 역겨운 냄새를 품은 채 동혈 밖으로 새어 나왔다.
잠시 후 여인들이 동혈을 걸어 나왔다.
앞서 추량에게 말한 여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은 것 같습니다.”
인사를 건넨 여인들은 이제 아이들을 데리고 인왕채를 떠나기 시작했다.
멍하니 선 추량의 곁으로 사비강이 다가왔다.
“어때? 위로 좀 해주었나?”
“아니요. 그 무엇도 저들을 위로할 수 없다는 걸 알아 버렸습니다.”
추량이 축 처진 어깨를 하고는 나직이 대꾸했다.
그는 공허함이 가득했던 여인들의 눈동자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