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귀환 마교관
254화
털썩!
사비강이 탁자 위에 종이 뭉치를 올려 두었다.
추희룡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건…!’
자신이 지금까지 남몰래 모아 두고 있던 기물이 아닌가?
사비강이 지하 비고에 가서 가지고 나온 게 분명했다.
“대신 이것들에 대해서 좀 알고 싶소.”
처음부터 사비강이 지하 비고에서 찾으려고 한 것은 마법 도구였다.
한데 엉뚱하게 추희룡과 혈사련주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사비강이 탁자 위에 올려 둔 것은 마법 스크롤.
추희룡이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최근 들어 알게 된 기물이오.”
추희룡이 말을 이어 갔다.
그는 얼마 전 우연한 기회로 한 보부상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기묘한 물건을 고가에 판매하고 다닌다는 보부상이었다.
한데 그 보부상이 어찌나 신출귀몰한지 어지간해서는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말들이 떠돌았다.
호기심이 동한 그는 보부상이 팔고 있다는 물건을 추적해서 몇 가지를 구했다.
과연 기물이었다.
종이를 찢는 순간 내공과 비슷한 힘이 일순간 늘어나는가 하면, 주변이 갑자기 암흑에 잠긴다거나, 느닷없이 불이 나타나는 등 괴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 물건들이라면 추후 거사를 일으킬 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는 수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해서 그 보부상을 찾으려고 했던 건데… 마침 당신이 그들을 쫓고 있는 것 같았소.”
“나는 설백 장로가….”
“알고 있소. 설백 장로가 그들과 은밀히 거래를 해왔지. 하오문과 말이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 비고에서 이들이 그 사실까지 파악한 것을 이미 확인했기에 놀랄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도 사비강의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 부분이야 어쩔 수 없으리라.
사비강이 모른 척하며 물었다.
“당주께서 보기에 저 물건들이 대체 무엇으로 보이시오?”
“나는 저것들이 마교와 관련된 게 아닌가 싶소.”
“마교와?”
“그렇소.”
뜻밖의 대답이었지만, 중원인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마신을 숭배하는 마교인 만큼 마계의 물건이 그들과 아예 연관이 없다고 하기에도 애매하지 않은가?
“계속해 보시오.”
이미 추희룡은 사비강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거의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때문에 딱히 숨길 것 없이 말을 이어 갔다.
“나는 마교에서 사이한 술법을 이용해서 만들어낸 일종의 부적 같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소.”
“하지만 마인들은 과거 정마대전 이후에 전부 사멸하지 않았소?”
“그랬지. 그렇다고 해서 마인들이 사멸했을 뿐, 그들이 만들어낸 물건까지 사라진 건 아니지 않겠소? 이런 기물들이 여전히 건재하듯이.”
완벽히 틀린 추리였지만, 사비강은 꽤 흥미롭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자신도 마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더라면 추희룡과 비슷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을까?
“그래서 혈사련주가 되기 위해 마교의 술법이 담긴 부적들을 이용하려고 했다?”
“후후후. 이깟 종이가 전부는 아니오.”
“하면?”
“하오문은 몇 해 전부터 중원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마교의 도구들을 수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소. 그 중에는 신묘한 힘이 깃든 마병기도 제법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 그 외에 다른 영약까지도.”
“그래서 그걸 찾으려고 했던 거요?”
“그렇소. 하지만 내 수하가 그날 그 장소에서 당신에게 죽었지.”
얼마 전 보강현의 소화루에 들렀을 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때 백호당 소속인 야조대원 한 명이 설백의 손에 맞아 죽지 않았던가?
사비강이 무심한 듯 말했다.
“내가 그를 죽인 게 아니오.”
“하면?”
“설 장로가 죽였소.”
“설 장로가? 설 장로가 그곳에 있었단 말이오?”
“놀랍게도 그랬소.”
“어째서 설 장로가 그곳에?”
사비강은 정도맹에 있을 때, 설백과 마지막으로 싸웠던 일을 간략하게나마 전해 주었다.
대략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추희룡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하면 그 복면인들이 설백 장로를 구해 주었다는 말이오?”
“그렇소. 나는 지금까지 그들이 백호당의 무인이 아닌가 의심했었소.”
“무슨 소리를! 우리는 전혀 모르던 일이오.”
“알고 있소. 이제는.”
사비강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그 복면인들은 백호당의 무인이 아니다.
그저 비슷한 시기에 마계 도구를 노리던 백호당과 우연히 겹쳤을 뿐이다.
하면 그 복면인들은 누구일까?
적어도 마계 도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자들이 백호당 말고 또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들은 백호당주인 추희룡보다 그 도구의 쓰임새를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추희룡이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창가의 탁자에 앉아서는 말했다.
이제 그는 확실히 사비강과 손을 잡기로 마음을 굳힌 듯했다.
“그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면 제 삼의 세력이 있다는 뜻인데….”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정도맹 쪽은 아니오.”
“어찌 그리 장담하시오? 설백 장로는 분명 정도맹 사람이 아니었소?”
“그랬소. 부패와 비리의 꼭짓점에 있었지. 하지만 그 복면인들은 설백 장로를 마치 소모품처럼 취급했소.”
사비강은 마지막으로 설백과 싸웠던 때를 떠올렸다.
그의 몸은 이상한 대법으로 개조된 상태였다.
그가 마수처럼 변한 것에는 단순히 스크롤의 부작용만은 아니었을 터다.
분명 누군가 그의 몸을 가지고 장난을 친 것이리라.
“설백을 소모품처럼 취급할 정도였다면 보통 놈들은 아니겠군.”
“그래서 당신을 혈사련주로 만들어 주겠다는 거요.”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되오?”
“당신이 련주가 되도록 도울 테니, 당신도 내가 그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단지 그것뿐이오?”
“물론 아니오. 만약 당신이 련주가 된다면 앞으로 정도맹과 상호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더 큰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지.”
무척이나 공허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내전에서 승리한다는 건 꽤나 솔깃한 조건이었다.
나라에서도 거사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줄곧 외부 세력과 손을 맞잡지 않던가?
이대로 사비강을 믿을 것인가? 당장 죽여 버릴 것인가?
다시 가슴 속에 넣어 둔 선택지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추희룡은 빠르게 가설을 떠올려 갔다.
먼저 사비강을 믿고 도움을 받게 된다면?
비교적 안전하게 혈사련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때가 되면 사비강이 직접 혈사련주를 죽이겠다고 하지 않았나?
자신이 나설 것이 없으니, 만약 실패하더라도 위험 부담이 최소화된다.
다만 추후에 자칫 정도맹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 할 수도 있다.
‘뭐, 그거야 그때 가서 대처해도 문제는 없지만….’
제일 크게 걸리는 부분은 역시 사비강이 자신을 속였을 때다.
말은 저렇게 해놓고 이대로 련주에게 가서 자신의 계획을 모두 까발리게 된다면?
당장 증거들을 없애고 발뺌을 한다고 해도 곤혹스러운 상황이 생길 터다.
‘역시 죽여 버리는 게 나을까?’
당장 그를 죽이려고 한다면 쉬운 싸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사비강은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다.
사실 그가 이렇게 조심스러운 이유에는 사비강이 의도적으로 기도를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이 한몫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기도를 강하게 드러냄으로써 혹시라도 추희룡이 무리수를 두지 않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러한 작전은 어느 정도 먹혀들고 있었다.
‘역시 쉽게는 죽이지 못할 터.’
추희룡은 평소에도 사비강을 어느 정도 존중하고 있었지만, 이렇듯 감추지 않은 기도를 마주하자 더욱 부담스러워졌다.
만약 무리해서 그를 죽이려고 한다면?
당장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럼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이미 자신이 공격한 이상 사비강은 모여든 자들에게 자신의 야망을 발설하고 말 것이다.
결국…
‘선택지가 하나로 좁혀지는 건가?’
도박을 해야 할 때다.
그때 사비강이 말을 보탰다.
“잘 생각하시오. 만약 내가 련주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릴 생각이었다면 지금 당주께 이러한 제안을 할 필요도 없소. 오히려 이럴 시간에 당장 이곳을 벗어나서 련주에게 달려가는 게 빠르겠지. 그렇지 않겠소?”
사비강이 빙그레 웃었다.
“끄음.”
부정할 수 없다.
당장 손을 섞어도 어려운 상대다.
작정하고 달아난다면 그를 쫓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마침내 추희룡의 표정에 결심이 굳었다.
“좋소. 당신을 믿어 보겠소.”
“잘 생각하셨소. 이제는 사파의 미래보다 강호의 미래를 걱정해야 할 때지.”
추희룡은 사비강의 말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굳이 따져 묻지는 않았다.
**
고오오오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추량의 몸에서 오묘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푸르스름한 기운은 추량의 주변을 연기처럼 떠돌더니 어느 순간 그의 전신에 흡수되듯이 사라져 갔다.
마침내 그가 눈을 떴을 때, 눈동자에서 옥빛이 맴돌다가 사르르 사라졌다.
그의 표정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사부님… 끝난 겁니까?”
“그래, 생각보다는 잘 적응했다.”
“제가 복용한 게 뭐였죠?”
“아칸 포션이라는 거다. 소모된 마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신체 마나량을 늘려 주는 거다.”
“그럼… 한 마디로 내공이 늘었다는 거군요!”
“뭐, 그런 셈이지. 이젠 마나를 내공으로 치환할 수 있을 테니까.”
“오옷! 감사합니다, 사부님!”
“너는 앞으로 내공보다는 마나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 마나는 음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니 참고해라.”
“음이라면…?”
“냉기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거지.”
“하지만 사부님은 얼음과 불을 가리지 않고 막 쏟아 부으시잖아요?”
“그거야 내가 워낙 뛰어나니까 그런 거고.”
“아, 예에….”
“오늘 복용한 아칸 포션을 완전히 소화해냈다고 생각되면, 나중에 선물을 하나 주도록 하마.”
“선물이라면….”
“지금까지 네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일 거다.”
“오오, 그건 엄청난 기물이라는 뜻이군요!”
“기물이지. 확실히.”
“갑자기 그런 게 어디서 나는 거죠?”
“백호당에서 가져온 거다. 물론 추 당주에게 허락을 받고 가져왔으니 걱정할 건 없다. 때가 되면 주마.”
“사부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추량이 벌떡 일어나서 포권했다.
사비강이 피식 웃어 버리는데, 마침 출입문 쪽에서 기척이 스르르 나타났다.
“주군, 연금신수 조신량을 찾아냈습니다.”
“호오, 그래? 어디에 있지?”
“말씀하신 강서 지역의 정강산(井崗山) 인근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대장간 일은?”
“현재는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역시 그런가? 알겠다. 수고했다.”
“아, 그리고 매 국주님께서 한 가지 알아봐 달라고 하신 게 있습니다.”
“설란이?”
“예.”
“뭐지?”
“최근 중원 곳곳에서 아녀자와 아이를 납치하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현재 정도맹에서는 이와 관련해서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해서?”
“맹주님을 비롯한 수뇌 인사들이 그 일과 관련하여 혈사련의 개입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에 매 국주님이 주군께 도움을 얻고자 하십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일단 그건 알아보도록 하지. 참, 사람을 하나 찾아야겠다.”
“누굽니까?”
“만생검살(萬生劍殺). 별호다. 본명은 모르겠군.”
“충분합니다.”
“내가 여행 중이라도 알게 되면 접선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어차피 귀영단은 중원 각지에 눈과 귀를 두고 있어서 사비강이 은밀하게 움직이지 않는 한, 그들이 어렵지 않게 찾아올 수 있을 터였다.
홍염이 기척을 감추고 나자 사비강이 추량을 돌아보았다.
“량아, 가서 탄강과 송령을 불러와라.”
그러자 추량이 허공을 힐끔 보며 말했다.
“들었지? 가서 두 사람 불러와.”
“…….”
사비강이 미간을 좁히고는 추량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 지금 뭐하는 거냐?”
“명령을 내렸습니다.”
“누구한테?”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흑귀지요.”
“누구 맘대로?”
“사부님. 찬물도 위아래가 있고, 잡일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사부님의 하나밖에 없는 애제자이자 일대 호위무사로서 그런 잡일은 역시 저보다 흑귀가 하는 게….”
따악!
“크악!”
추량이 정수리를 쥐고는 끙끙 앓는 소리를 흘렸다.
사비강이 싸늘하게 말했다.
“한 대 더 맞고 다녀올래? 지금 다녀올래?”
“사부님! 정말 너무해요!”
추량이 버럭 소리치고는 도망가다시피 내려갔다.
사비강이 그 뒷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어 버렸다.
암울한 미래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에도 이렇게 실소라도 하는 건 저런 녀석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