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
귀환 마교관
252화
백호당의 비밀 창고는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계단을 따라 끝도 없이 내려간 끝에야 나오는 공간이었다.
만약 성격이 급하거나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 이 계단을 발견하고 내려왔다가는 도중에 다시 돌아갈 지도 모를 만큼 긴 계단이었다.
그 계단 끝에 나타난 공간은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실제로 추희룡의 방보다 세 배는 더 커 보이는 넓이였다.
제일 먼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온갖 종류의 비서였다.
각종 무공 비서를 포함해서 여러 가지 정보가 담긴 책자들이 즐비했다.
정말이지 시시콜콜한 정보부터 시작해서 상당히 중요한 것들까지.
심지어 최근 북천각주가 흑운방의 소방주에게 막대한 금액의 빚을 졌다는 내용까지 기록된 책도 있었다.
책장을 빼곡하게 채워 놓은 공간을 지나가자 이번에는 온갖 무기를 진열해 놓은 진열대가 나타났다.
생전 처음 보는 신병이기부터, 이름 꽤나 알려진 무기들 또는 척 보기에도 신기하게 생긴 실험 무기까지.
그 다음에는 놀랍게도 금괴를 비롯한 막대한 자금이 보관되어 있었다.
‘서책과 무기와 자금이라….’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이곳의 공간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리라.
실제로 이곳은 추희룡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이건 전부 비자금인가?’
금괴의 양이 상당했다.
문득 이 자금에 대해서 혈사련주가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뭐, 이쪽 집안일까지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사비강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이제 마법 도구를 찾는 건 일도 아니다.
서치 마법을 사용하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법 도구 외에도 추희룡에 대해 더 알 수 있는 단서들이 있다면 뭐든 찾아보는 게 중요했다.
“가만. 그런데 저건…?”
사비강이 흥미로운 눈길로 선반 한쪽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
추희룡이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저 녀석은….’
그래, 분명 사비강이 제자라면서 데리고 왔던 자가 아니던가?
한데 어째서 저놈이 백호당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거지?
문득 불길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어딘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추희룡이 백호당 대문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아앗! 이게 누구십니까? 백호당주님 아니십니까?”
추량이 호들갑을 떨며 추희룡에게 다가왔다.
추희룡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자네는….”
“하하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사비강 교관님의 하나밖에 없는 수제자이자 호위… 커험! 아무튼 사비강 교관님의 애제자인 추량이라고 합니다!”
추량이 얼른 말을 얼버무렸다.
자칫 호위무사가 주인을 두고 왜 이런 곳에 홀로 있냐고 물어보면 말이 꼬일 것 같았기에.
“뭐, 반갑네.”
추희룡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건네자, 추량이 헤벌쭉 웃음 지었다.
‘이제 무슨 말을 하지?’
막상 시간을 끌기 위해서 말은 걸었는데 더 이상 이어 갈 말이 없었다.
누군가의 흔적을 쫓아 추적하는 일만큼은 발군의 재능을 가졌지만, 이렇게 남을 교묘하게 속이면서 대화를 이끌어 가는 것에는 재주가 전혀 없는 추량이었다.
추희룡이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추량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 그런데 추 당주님께서는 여기에 어쩐 일이십니까?”
말을 꺼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추량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이런 멍청한 질문을 던지다니!’
아니나 다를까, 추희룡이 표정을 잔뜩 구기면서 입을 열었다.
“여기에 어쩐 일이냐니? 백호당주인 내가 백호당에 들어가는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
“하하하! 그, 그렇지요. 아무 이유가 없어도 되지요! 저는 그저… 음… 그러니까 그렇습니다! 백호당주님과 좀 친해져 보고 싶어서… 하하하!”
“혹시 사비강 교관이 자네를 보낸 건가?”
“예?”
“만약 그렇다면, 이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씀드리게. 나는 사비강 교관에게 아무런 악감정도 없으니. 요즘 혈사련 무인들을 회유하느라 바쁘시다지?”
추희룡의 말투에 은근한 가시가 돋혀 있었다.
사부에 대한 험담이라고 느꼈기 때문일까?
추량의 표정이 짐짓 굳어졌다.
“우리 사부님은 그렇게 가벼운 분이 아니십니다. 아마 사부님은 그저 추 당주님과 두터운 친분을 쌓으려는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으실 겁니다.”
“호오. 그렇다면 더욱 찾아올 필요가 없네. 내가 정도맹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는 있으나, 정도 문파의 무인들에게 호감을 가지는 건 결코 아니니까. 딱 그 정도일세. 이제 그만 가보게나.”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사부님이 보내서 온 게 아닙니다.”
“그럼?”
“그건….”
“왜 여기에 나타나서 나를 붙들고 얘기를 하는 거지?”
추희룡이 날카롭게 파고들어 왔다.
갑자기 대답이 궁해지자 추량은 다시 당황하고 말았다.
“그, 그건… 그러니까 제가 추 당주님과 친분을 쌓고 싶어서… 하하.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지요.”
“자네가? 어째서 나와?”
“그게… 저어…”
추량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것 마냥 이리저리 방황했다.
‘제기랄. 왜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거냐? 사부님! 제발 좀 빨리 나와 달라고요!’
하지만 사비강은 아직도 백호당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게 분명했다.
만약 나왔다면, 자신에게 적당히 물러나라고 전음을 보내 왔을 터.
추희룡이 혀를 차고는 무심히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다시 추량이 얼른 나섰다.
“추 당주님께 좋은 정보가 있습니다.”
표정을 최대한 진지하게!
추량이 입을 한일자로 다물고는 추희룡을 빤히 바라보았다.
추희룡 역시 그 시선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지겠군. 그게 어떤 정보인가?”
“여기서 말씀드리기에는 조심스럽습니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떠신지요?”
이제 추량은 되는 대로 말을 둘러댔다.
일단은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상책이리라.
사비강이 나올 때까지 어디 다른 곳으로 멀리 이동한다면 이보다 좋은 방법도 없으….
“좋네. 내 방으로 가세.”
“예?”
“은밀히 대화할 부분이라면 내 방으로 가서 얘기하세.”
“아… 하지만 좀 더 보안이 확실한….”
추희룡이 피식 웃었다.
“내 방보다 더 보안이 확실한 곳은 없을 걸세. 걱정 말게.”
“그, 그렇군요. 그래도 차라도 한 잔 하시면서….”
“차라면 내가 대접해 주지. 하나 자네가 내놓을 정보가 나를 만족시켜야 할 걸세.”
“아… 물론이지요. 아마 당주님께서 들으시면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일 겁니다.”
“흐음. 점점 기대가 되는군. 좋아, 들어가지.”
“잠깐. 잠깐만요!”
“또 뭔가?”
“역시 다른 곳에서 말씀드리는 게…”
“흐음. 뭐가 문제인가?”
“예?”
“내 거처에서 대화를 하는 게 문제라도 되는 건가?”
날카롭게 질문을 던지는 추희룡의 반응에 추량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하하. 그럴 리가요. 다만 괜한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생각되어서….”
“쓸데없는 소리. 더 이상 그런 헛소리로 내 발길을 잡는다면 자네가 날 농락하는 거라고 생각하겠네.”
“하하… 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당주님을 농락하겠습니까?”
“그럼 들어가지.”
마침내 추희룡이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추량이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젠장, 더 이상 시간을 끌 방법도 없는데! 왜 이렇게 안 나옵니까?’
추량이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추희룡의 눈치를 살폈다.
낭하를 따라 한참이나 걸음을 옮기다가 본당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모든 게 끝이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일념에 추량이 다시 한 번 불쑥 말을 꺼냈다.
“추 당주님!”
“음? 뭔가?”
“저어… 이제 보니 추 당주님도 추씨 성을 가지셨군요!”
“그렇네만?”
“하하하! 이렇게 깊은 인연이 또 있겠습니까? 저 또한 추 가입니다!”
“그런가?”
“예, 그렇습니다! 저는 가을 ‘추(秋)’ 자를 씁니다!”
“나 또한 그렇네.”
“아, 그렇다면 역시 당주님과 저는 추엽(秋饁)을 시조로 모시는 같은 추씨 집안이었군요!”
“흐음. 그런 셈이군.”
“정말 굉장한 인연입니다! 어쩌면 당주님과 저는 먼 친척뻘이 아니겠습니까?”
추량의 수다를 듣고만 있던 추희룡이 안색을 굳히고는 말했다.
“자네.”
“예?”
“들어갈 텐가, 말 텐가? 혹시 그 정보라는 게 그만큼 비싸기에 이리도 시간을 끄는 것인가?”
“아, 그, 그럴 리가요. 그저 반가운 마음에….”
추희룡이 냉소를 흘리더니 추량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뱀 같은 눈을 마주하기가 두려워 추량이 먼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어가지.”
마침내 추희룡이 본당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추량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실내로 들어온 추희룡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다.
추량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주 짧은 순간 그의 눈길은 벽에 걸린 사방신에게 향했다가 장식장에 놓인 사면초가 군단상으로 옮겨졌다.
이는 딱히 뭔가 미심쩍은 게 있어서가 아니라, 평소 굳어 있던 그의 습관이었다.
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그가 창가의 탁자에 자리하고는 시녀에게 차를 내오도록 지시했다.
“자, 이제 말을 해보게.”
추희룡이 표정을 굳히고는 추량을 다그쳤다.
추량은 오줌이라도 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으음.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그 얘기가 뭔가?”
“그게 사실은….”
추량이 말을 얼버무리고 있을 때 마침 시녀가 차를 내왔다.
아주 잠시의 시간을 번 추량이 가슴을 쓸어내리려는데,
“물러가라.”
추희룡이 싸늘하게 던진 한 마디.
시녀가 당황해서 바라보자, 추희룡이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만 물러가라. 차는 필요 없으니.”
시녀가 그대로 돌아서자, 추량이 황급히 말했다.
“아, 저는 차를 마시고 싶은….”
다음 순간,
스르르릉.
추희룡의 허리춤에서 도가 뽑혀 나오면서 서늘한 소리가 울렸다.
예기를 뿜어대는 도신이 추량의 목 앞에 척 나타났다.
“무슨 수작인가?”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더 이상 개수작을 부린다면 참지 않겠다. 내게 접근한 이유가 무엇이냐?”
올 것이 왔다.
추량의 머릿속이 완전히 하얗게 변했다.
**
사비강의 흥미를 끌었던 그 물건은 라겔의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 외에도 그의 시선을 끄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것들을 대략 품에 챙긴 사비강은 다시 여러 가지 장부와 비서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그도 예상하지 못한 내용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굳은 듯 서 있었다.
잔뜩 좁혀진 그의 미간은 시간이 흘러도 펴질 줄을 몰랐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곳을 빨리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잠시 잊은 채 한참이나 머물렀다.
딸랑딸랑.
지하방 어딘가에서 방울소리가 울렸다.
위층 본실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신호였다.
추희룡이 지하에 머무는 동안 본실에 사람이 들어왔을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 놓은 알림 장치인 듯했다.
‘추 당주가 벌써 돌아온 건가?’
사비강은 손에 든 장부를 내려 두고는 서둘러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어서 말하지 못하겠는가!”
추희룡이 호통을 쳤다.
추량은 이제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이제는 사비강이 나타나서도 안 될 순간이다.
어떻게 해서든 추희룡을 밖으로 끌어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전에 자신이 살아남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네놈이 나를 놀리는 것이냐? 그렇다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정보를…! 당주님께서 들으시면 놀랄 수밖에 없는 정보를…!”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물었다. 마지막 기회다!”
“그건….”
추량이 눈알을 굴리며 버벅거리자, 추희룡도 더는 참지 못한 듯 도신을 치켜 올렸다.
“이 정도 되면 자네를 죽여도 사비강 교관이 할 말은 없을 테지.”
“잠깐만요! 그 정보는…!”
찰나, 추희룡의 도신이 허공을 가르며 추량의 목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철커덕, 스르르르릉!
기묘한 소리가 울리더니 한쪽 벽면이 옆으로 쑤욱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추희룡의 도신이 추량의 목 앞에 우뚝 멈췄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
갑자기 열린 한쪽 벽면에서 모습을 보인 사람은 다름 아닌 사비강이었다.
추희룡의 눈동자가 잔뜩 커졌다.
추량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정보는… 사부님이 저기서 나타나실 거라는 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