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
귀환 마교관
232화
“예산이 얼마나 남았지?”
사비강의 질문에 홍염이 깍듯하게 대답했다.
“지난번에 입수한 금괴의 삼 할 정도가 남아 있습니다.”
“지출이 좀 많았군.”
하긴 한동안 정말 흥청망청 써댔으니 바닥을 보일 때도 됐다.
수많은 인부를 고용해서 천상궁에 건물까지 번듯하게 올렸으니….
그나마도 삼 할이나 남았다는 것은 지난 번 입수한 금괴의 양이 상당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사용하게 되면 금방 바닥을 드러내리라.
이제는 관리할 필요가 있다.
“정도맹 쪽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대략의 정비가 끝나고 거의 안정을 취한 모습입니다.”
“하면 매 국주가 비교적 여유가 있겠군.”
“예, 지금으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듯합니다.”
“좋아, 천상천하유아독존혈풍멸살대에서 담우기를 좀 빼야겠어.”
“전하겠습니다.”
담우기는 어차피 무공보다는 계산에 밝은 대원이다.
그라면 다시 재정 상태를 불릴 수 있으리라.
“담우기에게 재정 관리를 전적으로 맡기도록 하고, 관련된 모든 임무는 그를 따르도록.”
“알겠습니다.”
홍염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또 보고할 건?”
“말씀하신 보부상의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사비강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 어디지?”
“보강현에 위치한 ‘소화루(翛花樓)’라는 기루입니다.”
“소화루라….”
“그 지역에서 가장 값싼 기루인데, 거의 퇴기(退妓)들만 모아 둔 곳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게는 하루 벌어 하루 탕진하는 노역자들이나, 노름꾼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대충 감이 오는군.”
사비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폐기들만 모아 놓은 기루.
인생 밑바닥의 낭인들이 들락거리는 곳.
그곳에 보부상이 들어간다는 건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아마도 그곳은….
“하오문(下汚門)의 분타 정도가 되겠군.”
홍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구 할 이상입니다.”
“과연. 하오문에서 그를 챙기고 있었단 말이지?”
대충 그림이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밑바닥 인간들만 긁어모아서 만든 문파.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발이 넓고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문파이기도 하다.
그런 하오문이 마계 도구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즉, 설백은 하오문에 대해 알았을 지도 모른다.
해서 그 보부상과 정기적인 거래를 해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설백을 구한 복면인들은?
하오문인가?
아니다.
하오문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단정한 느낌이다.
익힌 무공의 특성에 따라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다르듯이, 그 사람의 생활 환경에 따라 느껴지는 분위기가 다르다.
한데 지난번 복면인들은 어딘지 모든 부분에서 정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오문의 무인이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터.
싸우는 방식도 지저분하고 난잡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마저 정제되어 있었기에 정공인지, 사공인지도 잘 구분되지 않았다.
분명한 건….
‘마나를 다뤘다는 거지.’
사비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면 그들은 누구인가?
혹시 백호당과 관련이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는 일.
좀 더 조사해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소화루로 가봐야겠군.”
“조심하십시오.”
홍염이 진심으로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쩐지 이번 일은 만만치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단순히 하오문과의 싸움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
류여중이 찻잔을 들다 말고 멈칫했다.
사비강이 자신을 찾아왔다기에 호기심을 가지고 들여보내라 했다.
혈사련에 온 후로도 연일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이 남자가 자신에게 대체 무슨 볼일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동안 온갖 시련을 던져 주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헤쳐 나간 자가 아니던가?
한데도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 뭔가 부탁할 일이 있어서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사비강은 군사실에 들어와서 권하는 자리를 마다하고 우뚝 선 채로 용건부터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뜻밖의 말에 멈칫하고는 사비강을 올려다보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잠시 다녀올 데가 있소.”
“어딜 말입니까?”
“그건 말해 주기 싫소.”
류여중이 찻잔을 내려두고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호기심을 유발하는 자다.
하지만 쉽지 않은 자다.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짜증나는 부류다.
볼모로 잡혀 온 주제에 어딘가를 다녀오겠다는 말을 저렇게 당당히 꺼내다니.
물론, 그간 사비강이 천상궁을 벗어난 적은 여러 번 있었다.
인근 도박장을 다녀올 때도 그랬고, 맹가숙 일당을 잡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설 남매를 제압했을 때 역시 천상궁을 벗어났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전부 인근 지역이다.
천상궁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은 혈사련의 세력권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천상궁이 정도맹의 내원과도 같다면, 상권이 형성되어 있는 인근 지역은 정도맹의 외원과 같다고 보면 된다.
누구 하나 천상궁과 관련 없는 자들이 없었으므로.
그러니 그 세력권 안에서는 사비강이 어딜 가더라도 굳이 보고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비강이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혈사련의 세력권 밖으로 나가겠다는 의미.
류여중이 사비강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감시자를 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불가하오. 나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는지라.”
류여중의 안색이 굳었다.
‘허가, 불가는 당신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오!’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미소 지었다.
자고로 군사란 쉽게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언제나 냉정함을 유지해야 상황을 바로 볼 수 있는 법.
‘볼모 주제에 사생활이라니….’
내심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혼자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감시자를 붙이겠습니다.”
“감시자는 필요 없소.”
‘아니, 우리가 필요하다고!’
다시 한 번 치밀어 오르는 생각을 갈무리하며 류여중이 찻잔을 들었다.
뜨거운 찻물이 식도를 따라 흘러내려가니, 울컥 치밀었던 생각도 가라앉는 기분이다.
그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물론 처음에도 스스로 천상궁을 찾아오신 만큼 사비강 교관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 입장도 있지 않겠습니까?”
“믿는다면 그냥 보내 주시오. 대신 내 제자를 이곳에 남겨 두겠소.”
“제자라면…?”
“추량 말이오.”
“아… 하지만 그자가 사비강 교관을 대신할 정도는 아니지요.”
“내 제자를 무시하는 거요?”
“그렇다기보다는 제자를 별로 아끼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말입니다.”
“흐음. 나는 내 제자를 아주 사랑하고 있소.”
‘전혀 진정성이 보이지 않아!’
류여중이 속내를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됩니다.”
“그럼 몰래 다녀오겠소.”
‘이 사람이 진짜….’
류여중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렇게 말도 통하지 않는 자와 정도맹의 총군사는 어찌 힘을 합쳤을까?
새삼 정도맹의 총군사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정 이러실 겁니까?”
“정 그래야겠소.”
류여중이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딘가로 향한 류여중이 잠시 후 목곽 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가 목곽 상자의 덮개를 열며 말했다.
“감시자를 붙이지 않는다면 이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독단을 복용하라는 거면 사양하겠소.”
“그러실 줄 알고 다른 걸 준비했지요.”
류여중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만 한 호리병을 들어보였다.
“적서향(赤鼠香)입니다.”
적서향.
‘금적서(金赤鼠)’라는 영물의 타액으로 사람은 아무런 향을 맡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 금적서와 교배한 수컷 쥐인 금청서(金靑鼠)는 이 적서향을 수천 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게다가 금청서가 달리는 속도는 웬만한 무인이 경공을 펼쳤을 때와 맞먹는다.
즉, 사비강이 이대로 사라져 버리게 된다면 금청서를 풀어 그 위치를 뒤쫓을 것이라는 뜻이다.
한 번 묻은 적서향을 없애는 방법은 금청서의 타액인 청서향(靑鼠香)을 덮어서 뿌려야만 한다.
“이 정도에서 서로 합의를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류여중의 말에 사비강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감시자를 붙이거나 독단을 복용하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이다.
“좋소. 그렇게 하지.”
“그럼 다녀오시면 청서향을 뿌려 적서향을 제거해 드리지요. 기한은 얼마나 드리면 되겠습니까?”
“보름 안으로 돌아오겠소.”
“알겠습니다. 보름이 지나도 오시지 않는다면 금청서를 풀겠습니다.”
“좋을 대로.”
류여중이 호리병의 마개를 열고는 사비강의 몸에 적서향을 뿌리기 시작했다.
사비강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혹시라도 감시자를 몰래 붙일 생각은 마시오. 그랬다간 모두 죽여 버릴 테니까.”
“끄음. 알겠습니다.”
**
“정말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절 인질로 남겨 두고 다녀오겠다고 했다니요!”
추량이 잔뜩 서운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사비강이 별 일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뭐, 결국 그들이 널 받아 주지 않았으니까 잘 된 것 아냐?”
“그건 그것대로 기분 나쁘다고요!”
“흐음. 인질이 되고 싶었던 거냐?”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추량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래도 믿었던 사부인데, 자신을 헌신짝처럼 인질로 내던지고는 홀로 다녀올 생각을 했다니.
곱씹을수록 서운함이 밀려왔다.
게다가 인질을 거부한 건 오히려 혈사련이었다니!
‘내 가치가 그 정도도 안 된단 말인가?’
추량이 한숨을 푹 내쉬는데, 사비강이 걸음을 멈추고 현판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여기가 소화루에서 제일 가까운 객잔이군. 여기서 묵도록 하자.”
두 사람은 객실 하나를 얻어 여장을 풀었다.
추량은 창가로 가서 저잣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여기가 보강현….’
혈사련의 세력권을 벗어난 건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괜히 마음이 들떴다.
“사부님, 그런데 왜 조원들에게는 마나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겁니까?”
지금까지 사비강은 조원들에게 마나 다루는 법을 일절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수업 중이든 언제든, 조원들이 암습을 가해 올 때는 마법을 이용해서 막아내곤 했다.
“그 녀석들은 마족을 상대할 때 철저하게 내공을 이용하도록 할 테니까. 중원의 무인들이 마법에 대해 잘 모르듯이, 마족 역시 이곳 무공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니 마법을 이용한 공격보다도 순수한 중원의 무공을 이용한 공격이 더 먹힐 때도 있는 법이지.”
“아….”
“말하자면 그 녀석들은 중원의 무공만을 사용할 별동대 같은 개념이다.”
“그렇다면 사부님이 마법으로 방어를 하는 건 역시….”
“상대의 마법에 대해 익숙해지게 하기 위해서다.”
“그렇군요.”
추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강이 침상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오늘 밤에 소화루로 갈 거다.”
“저도 같이 갑니까?”
“아니. 넌 여기 남아라. 아직 하오문에 어떤 자가 있는지 자세히 파악되지 않았어. 위험할 수도 있다.”
“사부님… 절 걱정….”
“괜히 걸리적거리면 귀찮으니까.”
“아, 예….”
추량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