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귀환 마교관
222화
주기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뿐만 아니라 장후겸을 둘러싸고 있던 무인들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자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지?’
다가서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마치 점소이가 옆을 지나가는 것처럼 태연하게 걸어오더니 장후겸을 부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경계의식조차 가지지 못했다.
주기현이 툭 던지듯 물었다.
“누구요?”
“나, 사비강이다.”
초면부터 반말.
주기현의 뺨이 씰룩였다.
그가 분을 삭이면서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뭐하는 사람인지 묻는 거외다.”
“애들 가르치는 교관이지. 뭐, 애들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늙은 애도 있지만. 어쨌든 전부 나보단 살아온 세월이 짧으니 애들은 애들이지.”
‘뭐야? 혼자 뭐라는 거야? 그러고 보니 이자가 정도맹에서 왔다던 그 볼모인가?’
주기현이 콧잔등을 잔뜩 찌푸리고 있자, 사비강이 툭 던지듯 말했다.
“인상 쓰지 마라. 젊은 나이에 주름 생긴다.”
“흥! 오지랖이 넓은 자군. 여긴 당신이 상관할 일도 아닌 것 같은데. 갈 길이나 가시지?”
“갈 길을 간 게 여기야.”
“볼모로 잡혀 왔으면 얌전히 쥐죽은 듯 지낼 것이지 왜 이렇게 사리분별 못하고 설쳐대실까?”
사비강이 주기현을 빤히 바라보더니 베르타스를 스르릉 뽑아냈다.
“볼모라….”
순간, 에워싼 무인들이 잔뜩 긴장한 채 무기를 앞세웠다.
처처척!
사비강이 눈알을 좌우로 굴리고는 말했다.
“말했을 텐데. 볼모가 아니라 교관으로 왔다고.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 계도해 줘야겠군.”
주기현이 멍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뭐 이런 똥배짱이 다 있나?
대체 뭘 믿고?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지?
게다가 눈앞에 살기를 줄기줄기 피워대는 자신의 수하가 보이지도 않는가?
“이제 보니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군. 별 정신 나간…!”
슈슈슈슛!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
찰나지간 사비강이 주기현 코앞에 나타나더니,
쒸에에에엑!
허공을 가르며 베르타스가 빛살처럼 날아들었다.
이 모든 과정이 주기현의 눈에는 억겁의 시간만큼이나 느리게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촌각에도 지나지 않았다.
따끔.
거짓말처럼 멈춘 베르타스가 주기현의 목을 살짝 찔렀다.
핏방울이 맺히자마자 베르타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흡수했다.
뒤늦게 주기현의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조금 전, 그는 죽을 뻔했다.
시간이 느리다고 느낀 것은 분명 죽음의 문턱에서 겪는 주마등과 비슷한 현상이리라.
사비강이 베르타스의 옆면으로 주기현의 뺨을 찰싹 때렸다.
“말조심해라. 한 마디 말 때문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 강호다.”
“이, 이런 개색…!”
찰싹!
“거 말조심하라니까. 그리고 눈 깔아라.”
순간,
차앙!
주기현이 검을 뽑아 들면서 베르타스를 쳐내고는 훌쩍 물러났다.
그가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이 정신 나간 새끼를 족쳐!”
그제야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수하들이 정신을 차리고는 사비강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앗!”
가장 앞선 무인이 검을 곧게 내지르며 기합을 펼쳤다.
스슷!
사비강이 몸을 빙글 돌리는가 싶더니 검신을 미끄러지듯 스치며 지나가서는 상대의 목을 손날로 쳤다.
콱!
“쿠악!”
비명을 내지른 상대가 허공을 붕 날아가서는 동료들과 부딪치며 나뒹굴었다.
“까불지 마랏!”
이번에는 두 명의 무인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검을 내리쳤다.
찰나,
스팟!
“헛?”
사비강의 몸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두 명의 무인이 그대로 바닥을 내려찍는 순간,
퍽! 퍽!
어느새 뒤에 나타난 사비강이 두 사람을 발로 걷어찼다.
우당탕탕!
그대로 튕겨 날아간 두 사람 또한 동료들과 부딪치며 쓰러졌다.
예상을 뛰어넘는 사비강의 무위에 주기현의 수하들이 움찔거리고는 경계에 들어갔다.
주기현이 이를 뿌득 갈았다.
“멍청한 것들! 겨우 볼모 하나를 잡지 못해서 이 난리냐! 이러라고 네놈들에게 급료를 주는 줄 알아? 이 개돼지 같은 놈들아!”
찰나, 주기현이 검을 휘두르며 사비강에게 달려들었다.
쉭!쉭!쉭!
빠른 속도로 찔러 나가는 검.
하지만 사비강은 그 자리에서 발걸음조차 떼지 않고 검을 피하더니,
콱!
순간 손을 불쑥 뻗어 주기현의 목을 움켜쥐었다.
“크윽…!”
“넌 가진 게 그렇게 많냐?”
시큰둥하게 묻는 목소리에 주기현이 이를 빠득 갈았다.
“다…들 뭣들 하고 서 있어? 어서… 이놈을 치라니까! 크읍!”
뒤늦게 정신을 차린 수하들이 얼른 달려들려고 하는데,
화르르르르륵!
놀랍게도 사비강이 한 차례 손을 휘젓자 뜨거운 불길이 일어나며 장벽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크웃!”
“으아악! 뜨…!”
몇몇 이는 몸에 불이 붙어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파이어 월(Fire Wall) 마법을 처음 본 무인들은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사비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가만히들 있어. 지금 계도 중이잖아.”
“……!”
사비강의 시선이 다시 주기현에게 향했다.
목이 졸린 주기현은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
“가진 게 그렇게 많냐고 물었잖아.”
“크읍… 이 개색…!”
짜악!
“크읍!”
주기현의 뺨에 불이 붙었다.
사비강이 여전히 그의 목을 움켜쥔 상태로 중얼거렸다.
“자고로 인간이라면 가진 게 많을수록 그에 걸맞은 품위와 교양도 있어야지. 내가 살다 온 곳에서는 그걸 노블리스 오르가즘이라고 하지.”
‘뭐라는 거야? 이 병신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착각하고 말한 거지만, 사비강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처음 듣는 소리에 주기현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자, 사비강이 그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넌 아무리 봐도 교양과 품위가 빈약한 것 같다. 앞으로는 갑질보다는 베풀면서 살아라.”
“크윽…! 뭔 개 같은… 소리냐!”
쒸이이이잇!
주기현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검을 휘둘러 갔다.
그 순간 사비강이 주기현을 냅다 집어던졌다.
콰당탕탕!
결국 주기현은 검을 놓친 채 객잔 한쪽 구석에 처참하게 처박히고 말았다.
“소방주님! 이런 개 같은 놈이…!”
무인들이 다시 와르르 달려드는 순간,
“썬더 크로스(Thunder Cross)!”
사비강이 다시 한 차례 손을 휘저으며 캐스팅하자, 사방팔방으로 전기 구체가 날아갔다.
파지지짓! 치지짓!
“크아아악!”
“으으악!”
구체에 감전된 무인들이 저마다 경련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장후겸은 그저 넋을 놓고는 입을 딱 벌릴 뿐이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사비강이 괴짜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무공도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 역시.
하지만 이렇게 괴상한 방식으로 싸우는 줄은 미처 몰랐다.
아니, 그런 소문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나저나 이자가 왜 날 도와준 거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정파인들 특유의 오지랖인가?
저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아버지뻘 되는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는 걸 보고 분개라도 한 것인가?
그런데 이어진 사비강의 행동을 본 순간 장후겸은 더욱 모를 표정이 되고 말았다.
사비강이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더니 쓰러져서 신음하는 주기현에게 휙 던지는 게 아닌가?
툭!
주기현이 뭐냐는 듯 바라보자 사비강이 내뱉듯이 말했다.
“천만 냥이다.”
“……!”
주기현은 물론 주변에 쓰러진 수하들과 장후겸조차 놀란 표정이었다.
‘왜 천만 냥을…?’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같은 생각.
주기현이 옆의 수하를 바라보자, 그가 얼른 다가와 주머니를 풀어서 확인했다.
잠시 후,
십만 냥짜리 전표가 백 장!
수하가 주기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천만 냥입니다!’
주기현은 멍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뭐야? 저 인간?’
그러는 사이 사비강은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선 장후겸을 향해 돌아서더니 포권했다.
“일전에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장 각주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정말 위험할 뻔했습니다. 이렇게나마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도와…? 은혜…?”
장후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하하하! 역시 도움을 주고도 모른 척을 하시다니! 과연 장 각주님은 대인배이십니다. 다시 한 번 제가 감탄했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정말이지 그때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참으로 곤란할 뻔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 정말 다행입니다!”
장후겸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저 눈만 멀뚱멀뚱 떴다.
머릿속에서 두 가지 생각이 서로 싸웠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눈앞의 이자는 자신을 위해서 천만 냥이라는 거금을 선뜻 내놓았다.
죽음보다 더 지독한 두려움으로 자신을 괴롭혀 오던 빚이었다.
그런데 그 빚을 이렇게 깔끔하게 없앨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이건 하늘이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이자가 자신의 착각을 알게 된다면?
그때 자신에게 천만 냥을 도로 내놓으라고 하면?
지옥은 다시 시작되는 거다.
‘제길, 어쩌지?’
그러는 사이 사비강이 주기현에게 은자 한 닢을 던져 주었다.
“이건 치료비로 써라. 명심해라. 갑질은 졸부나 하는 거야. 가진 자일수록 품위와 교양이 있어야 하는 법. 나처럼 말이다. 흐흐. 그게 바로 노블리스 오르가즘이다.”
“치익!”
주기현이 혀를 차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절뚝이며 걸어가자, 수하들이 얼른 뒤따랐다.
한바탕 소란이 대략이나마 정리되자, 장후겸이 사비강의 눈치를 살피다가 넌지시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장 각주님!”
사비강이 느닷없이 장후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뭐, 뭐요?”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요!”
“그, 그야… 난 그쪽을 본 적도….”
“제가 진작 알고 있었더라면 이렇게 모른 척하지 않았을 겁니다! 천만 다행 늦지 않게 알아서 은혜를 갚을 수 있었습니다.”
이쯤 되자 장후겸으로서도 이 기회를 이용하고 싶다는 유혹이 강렬하게 들었다.
오해든 착각이든 상대방의 실수가 아닌가?
자신의 잘못은 아니다.
게다가 몇 차례나 사실대로 말하려고 해도 도통 들을 생각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그래, 이건 어쩌면 하늘이 내게 주신 기회일지도 모른다.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자.’
추후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리라.
그런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비강은 장후겸의 손을 놓지도 않은 채 눈시울마저 붉히며 말을 이었다.
“그날 수하를 보내서 제 목숨을 구해 주지 않으셨다면, 전 아마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그, 그런 일이 있었구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우선 이럴 게 아니라 조용한 곳으로 자리부터 옮기시지요. 제가 오늘 크게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하…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장후겸이 한사코 거절했지만, 사비강이 막무가내로 그를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