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
귀환 마교관
223화
“크하하하! 이제 보니 사 대협께서는 아주 호탕하신 분이구려!”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장 각주님이야말로 호인 중에서도 호인이시지요.”
사비강이 술잔을 부딪치며 칭찬을 퍼부었다.
장후겸이 기분 좋게 술을 들이켜고는 술병을 들었다.
“자, 내 잔 받으시오! 내, 사 대협이 이렇게 멋진 분이실 줄은 미처 몰랐소!”
“하하하! 제가 좀 멋지긴 하지요!”
“크하하하! 역시 재미있어! 재미있는 분이오!”
장후겸이 큰 소리로 웃으며 사비강을 보았다.
정말 하늘이 자신을 돕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사비강은 자신을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대략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이 수하를 보내 죽을 위기에 처했던 사비강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물론, 수하를 보낸 적이 없다.
그런데 사비강을 구해 주고 숨을 거둔 수하가 어찌된 일인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알렸다고 한다.
그것도 정확히 북천각주 장후겸이 보내서 도우러 왔다고 말했단다.
아마도 잘못 들은 것이리라.
정파의 누군가와 착각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하지만 이 사사로운 오해가 장후겸에게는 천운으로 다가온 것이다.
게다가 사비강을 구하고 죽은 자를 화장시켜서 영면에 들게 했다고 하니, 증거도 완벽하게 사라진 셈이다.
대략의 상황 파악을 끝낸 장후겸은 이 천운을 이용해서 급한 불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누가 보낸 수하인지 모르겠지만, 그 덕을 내가 보게 됐구나!’
당장 천만 냥이라는 거금을 해결하게 됐으니 이보다 더 기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정말이지 그동안 마음고생 했던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건만.
앞으로 중요한 건 자신에게 천운이 되어 준 이 착각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사비강에게 호감을 얻어야 하리라.
“사 대협이 이리 날 도왔으니 앞으로도 내 도움이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날 찾아 주시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하하!”
사비강이 호탕하게 웃으며 다시 잔을 부딪쳤다.
술자리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장후겸은 점점 사비강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눌수록 상대방에 대한 호감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하기야 착각이든 뭐든 지옥 불에 떨어진 자신을 구제해 준 사람이니 호감이 생기지 않을 수도 없었다.
“오늘 일로 흑운방에서 따질 지도 모르오. 그때는 내가 나서서 해결해 드리겠소.”
“그렇게 해주신다면 감사하지요.”
“감사는.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은 건데 당연히 그래야지.”
장후겸이 껄껄 웃었다.
그러는 사이 문이 열리면서 점소이가 술병과 안주를 가지고 들어왔다.
“주문하신 양하대곡(洋河大曲)과 철판우육(鐵板牛肉)입니다.”
장후겸의 입이 귀에 걸렸다.
천만 냥이나 도움을 받은 것도 기쁘기 그지없는데, 이렇게 융숭한 접대까지 받으니 마음이 뒤숭숭했다.
특히나 양하대곡은 명주 중에서도 명주로 알려진 술이 아니던가?
웬만한 객잔에는 양하대곡을 구비하지도 않거니와 있다고 하더라도 거금을 주지 않고서는 향도 맡아 볼 수 없는 술이다.
점소이가 마개를 열자 향긋한 술 내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히야, 끝내주는군.’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점소이가 먼저 장후겸의 잔을 채워 주었다.
또로로롱.
어쩐지 비싼 술은 잔을 채우는 소리마저 다르게 들린다.
이번에는 그가 사비강의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또로로롱.
그 순간!
쉬이이이잇!
점소이가 느닷없이 다른 손에 들린 단도로 사비강의 목을 베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탁!
놀랍게도 점소이의 공격은 사비강의 코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사비강이 젓가락으로 상대의 단도를 붙잡은 탓이다.
“이것도 먹는 거냐?”
사비강이 비웃음을 띠고 묻자, 점소이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곧장 술병을 거꾸로 들고 내리쳤다.
“으앗! 명주를…!”
장후겸이 저도 모르게 소리 지르는 사이,
파박!
사비강이 의자에 앉은 채로 점소이의 무릎을 걷어찼다.
그 바람에 그대로 고꾸라진 점소이의 머리 위로 술병이 떨어지며 박살났다.
퍽석!
진한 술 향기가 객실을 가득 채웠다.
아까운 술이 그대로 점소이의 머리를 적시며 흘러내리는 걸 본 장후겸이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놈들은 어디서….”
그가 미처 말을 매듭짓기도 전에,
타다닷!
기절한 줄 알았던 점소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사비강을 향해 단도를 후려쳐 왔다.
쒸에에엣!
이번에는 사비강이 술잔의 술을 휙, 뿌렸다.
촤아아악!
점소이가 얼른 눈을 가린 다음 그대로 단도를 찍어 가는데,
쉬이이잇! 따앙!
술잔이 날아와 단도와 부딪치면서 산산조각 났다.
휘청거린 점소이가 재차 공격을 해오는 순간,
팍! 팍! 팍!
사비강의 손가락이 상대방의 팔꿈치와 허벅지, 어깨를 각각 내찌르며,
“굽히고, 벌리고, 뒤로 빼라.”
점소이의 자세를 교정해 주는 게 아닌가?
끝으로 사비강이 일장을 뻗어 점소이를 밀어냈다.
팡!
촤아아앗!
미끄러지듯이 멈춘 점소이가 혀를 찼다.
“칫!”
사비강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어제보단 나았다, 비천.”
“하여튼 귀신이군요.”
점소이가 투덜거리더니 제 목을 잡고는 뜯어내는 것이 아닌가?
인피면구가 벗겨지자 도비천의 얼굴이 드러났다.
장후겸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그때,
콰창! 콰차앙!
창문이 일제히 깨져 나가는가 싶더니 그림자 둘이 불쑥 날아드는 게 아닌가?
시커먼 기운을 뿜어내며 급습한 자는 다름 아닌 석탄강이었다.
쒸이이잇!
그가 완만하게 굽은 환도를 대각선으로 베어 들어왔다.
찰나, 사비강이 번쩍 사라지더니,
“호흡을 멈추지 말고 운기해라. 집중하는 건 좋지만 호흡을 멈추게 되면 사흑공 운기가 흐트러진다.”
어느새 등 뒤에서 읊조리는 게 아닌가?
스카앙!
그대로 의자를 베어낸 석탄강이 몸을 휙 돌리는 사이,
쒸에에엑!
사비강의 배후에서는 또 다른 예기가 날아들고 있었다.
상대는 바로 수면검귀 옹기승이었다.
사비강이 옹기승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석탄강 쪽으로 밀어냈다.
관성을 이기지 못한 옹기승이 석탄강을 향해 검을 내뻗자, 당황한 석탄강이 환도를 앞세워 막아냈다.
쩌엉!
두 사람의 도검이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넌 같은 수법에 또 당하는군. 이래서야 수면검귀가 아니라 몽유검귀라니깐.”
잔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객실 문이 부서져 나갔다.
꽈과앙!
출입문을 부수며 나타난 사람은 바로 혈기권왕 백공보였다.
“이여업!”
그가 커다란 주먹을 마구 퍼부었다.
펑! 펑! 펑! 펑!
하지만 주먹마다 사비강이 내지른 일장에 부딪치면서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찰나, 사비강이 백공보의 품안으로 파고들면서 주먹을 올려쳤다.
퍼억!
“크우욱!”
백공보의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이렇게 밀어치는 것보다….”
어느새 한 걸음 물러서며 자세를 바로 잡은 사비강이 빠르게 주먹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짧게 끊어 치는 일권이었다.
꽈앙!
안면에 주먹을 얻어맞은 백공보가 그대로 코피를 터뜨리며 날아가서는 한쪽 구석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렇게 끊어 치는 게 효과적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내력을 운기할 때 타격점에서 변화를 주는 게 효과적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깨진 창문으로 유송령이 거신도를 휘두르며 나타났다.
사비강이 휙 몸을 날리더니 유송령의 어깨를 감싸듯 돌아서서는 그대로 손목을 낚아챘다.
일전에 적하성에서 목단화를 가르쳐 줄 때와 비슷한 자세.
“살기를 감추는 건 암살의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야.”
말을 마친 사비강이 유송령의 손목을 잡은 채로 돌아섰다.
어느새 일어나서 달려들던 석탄강과 옹기승이 움찔거리는 사이,
따다당!
유송령의 거신도가 두 사람의 도검을 거칠게 튕겨 냈다.
콰당탕탕!
“거신도의 무게가 감당이 안 된다면, 무게 대신 흐름을 느껴. 흐름은 곧 관성이다. 그 흐름에 친해지지 않으면 너에게 거신도는 거추장스러운 쇳덩이일 뿐이야.”
“……!”
말을 마친 사비강이 유송령의 등을 거칠게 떠밀었다.
“악!”
이로써 모든 암습이 끝났다.
한쪽 벽에 쓰러진 신생조원들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사비강이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는 장후겸을 보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거 참, 죄송했습니다. 좋은 자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군요.”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그냥… 수업 좀 했습니다. 하하!”
“수, 수업?”
“뭐, 제 수업 방식입니다. 자리가 어질러졌으니, 방을 옮기지요. 아참, 뒷정리는 맡겨 두마.”
말을 마친 사비강이 장후겸과 함께 방을 걸어 나갔다.
결국 남은 신생조원들이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눕고 말았다.
그리고 모두들 말이 없었다.
**
남자는 온통 백발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이었고,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선이 고운 사내였다.
거기에 피부는 창백하리만치 희고 어딘지 학자풍이라고 생각될 만큼 단아해 보였다.
다만 그는 무표정할 때가 더 아름다웠다.
그가 웃음을 지으면…
“히익! 살, 살려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 살려… 크아아악!”
반드시 누군가 공포에 질린 채로 죽어 갔다.
그래서일까?
남자의 웃음은 어딘지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설수민.
그가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를 시큰둥한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가장 내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흐음. 다 죽어 버린 건가?”
마치 개미를 눌러 죽인 아이처럼 무감한 목소리 끝에 낭랑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오라버니, 저기에서 뭔가 움직여요.”
역시나 백발의 미녀.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백발의 마녀’라고 불렀다.
설수민처럼 아니,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
어딘지 앳되어 보이는 외모이면서도 뭇 남성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그 무언가가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설수민의 여동생 설서린이었다.
설수민이 설서린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섬뜩한 그 미소였음에도, 목소리만큼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가보자꾸나, 린아.”
“네, 오라버니.”
두 사람이 걸어간 곳에는 한쪽 다리를 잃은 채 바닥을 기어가는 중년의 여인이 있었다.
여인의 안색은 창백했다.
‘제발… 제발 누구라도 날 좀 살려줘…!’
여인은 가슴으로 울부짖었다.
오래전 죽은 남편과 아들의 복수를 꿈꾸며 남은 생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살아왔다.
무너져 가는 위지세가(慰遲世家)를 악착같이 일으켜 세우고 버텼다.
한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복수를…! 반드시…!’
하지만 그녀는 곧 절망에 빠져들고 말았다.
척!
그녀 앞을 두 그림자가 가로막았다.
암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백발의 마귀들이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어딜 가?”
설서린이 물었다.
“이 천벌 받을…!”
“하하하! 천벌은 지금 아줌마가 받고 있잖아.”
“뭣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저승에서 물어 봐.”
다음 순간,
피융!
한 줄기 지풍이 날아들면서 중년 여인의 이마에 구멍을 뚫었다.
중년 여인이 그대로 눈을 부릅뜬 채 엎어졌다.
휘이이이이잉!
죽음의 허무함을 알리기라도 하듯 스산한 바람이 마당을 쓸었다.
바람에는 피비린내가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이렇게 하나의 가문이 사라졌다.
마침 피바람을 타고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새의 발목에는 서신이 묶여 있었다.
서신을 풀어 본 설서린의 표정이 점차 미소를 그려 갔다.
“오라버니, 이것 좀 보세요.”
설수민이 서신을 받아들더니 예의 그 섬뜩한 미소를 그렸다.
“사비강이라… 재미있군. 오랜만에 천상궁으로 돌아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