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귀환 마교관
199화
“국주님. 아무리 그래도… 이게 무슨 사과 밭에 가서 사과 따는 것도 아니고….”
염자량의 말에 사비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 없는 녀석은 말없이 빠져.”
“하아, 정말 너무하시네요.”
“정말 아무도 없어?”
사비강의 질문에 모두들 먼 산만 바라보았다.
염자량의 말대로 이건 사과 밭에서 사과나 따는 일이 아니었다.
정도맹의 장로였던 자를 암살하는 임무다.
그것도 적진에 홀로 들어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임무를 완수해야만 한다.
무턱대고 ‘저요.’ 하고 나설 수 있는 일이 아니란….
“저요.”
“음?”
사비강을 비롯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 난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목단화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요. 제가 갈게요.”
“흐음.”
사비강이 미간을 좁히고는 침음을 흘렸다.
염자량이 얼른 나섰다.
“다른 작전을 세워야 합니다. 이건 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 위험해요.”
“제 생각도 자량과 같습니다. 차라리 그럴 거면 살수를 시켜서….”
“야, 인마. 그럼 너희들이 수련할 기회가 없어지잖아. 요즘 감찰대 행세 좀 한다고 해서 아직 한창 배워야 할 때라는 걸 잊은 거냐?”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아무리 비밀 통로가 있다고 해도 혼자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해요.”
들어가는 게 문제가 아니다.
좋다.
설령 들어가서 암살까지 무사히 해냈다고 치자.
하지만 그 후에는?
어찌 보면 암살에 성공하는 것보다 그 후에 몰래 빠져나오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목단화는 짐짓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나 혼자면 충분해. 할 수 있어.”
“무슨 소리야? 지금 이게 얼마나 위험한 작전인지….”
“할 수 있다니까!”
목단화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날카로운지 순간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그러자 한쪽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연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 혼자서는 너무 위험해.”
“지금 날 무시하는 거야?”
“무시가 아니라 걱정하는 거지.”
“하! 걱정?”
“그래. 어쨌든 넌 우리 동료니까.”
연우경의 말에 목단화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자신을 동료로서 본다는 건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믿음직한 동료가 되고 싶었다.
걱정스러운 동료가 아닌!
“국주님. 저 혼자 충분해요. 보내주세요.”
사비강이 목단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문탁.”
“예, 국주님!”
“네가 단화와 함께 들어가도록.”
잠시 멈칫거리던 조문탁이 고개를 숙이며 깍듯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러자 목단화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왜죠? 절 못 믿으시나요? 저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요!”
“흐음. 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언제 혼자 들어갈 사람을 뽑겠다고 했던가?”
“뭐라고요?”
“난 누구든 들어갈 사람 없냐고 물었을 뿐. 혼자 들어간다는 말은 한 적이 없는데.”
“그런…!”
사비강이 천멸대원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문탁과 단화가 비밀 통로로 잠입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성문을 통해 들어간다. 고 단주도 철혈단 준비시키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옆에 선 고적산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사비강은 다시 조문탁과 목단화를 돌아보았다.
“문탁이 막충의 침소에 잠입해서 암살하도록 한다. 그러는 사이 단화가 성문을 개방하도록.”
“국주님! 제가 하겠다니까요! 막충을 죽이는 것. 제가 하겠다고요.”
목단화가 다시 끼어들며 소리쳤다.
하지만 사비강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성문을 개방하는 것도 막충을 암살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임무야. 부탁한다.”
“하지만…!”
“그럼 작전은 정확히 자정에 실시한다. 이상!”
말을 마친 사비강이 막사를 빠져나갔다.
목단화가 주먹을 꼭 말아 쥐고는 몸을 떨었다.
염자량이 그녀에게 다가와 위로를 건넸다.
“이번엔 탁이한테 맡겨. 그래도 저 녀석이 우리 중에서는 제일 은신술도 뛰어나고 민첩하잖아.”
“꺼져.”
쌀쌀하게 대꾸한 목단화가 휑하니 걸어가자, 염자량이 무안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
끼이익…!
희미한 마찰음과 함께 부엌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두 그림자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빠르게 옆 건물로 들어섰다.
마구간이었다.
그들은 바로 조문탁과 목단화였다.
서래향이 말한 비밀 통로는 시녀들이 사용하는 부엌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
마구간의 반대편 문으로 이동한 두 사람은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조문탁이 전음을 보냈다.
[임무를 마치면 신호를 보낼게. 만약 실패하게 되면 분위기 보고 알아서 성문을 열어 줘.]
[아니. 네가 성문을 열어. 내가 막충을 죽일 테니까.]
[무슨 소리야? 국주님이 분명히 나보고….]
탓!
순간 목단화가 바닥을 차고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엇!”
조문탁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목단화가 달려 나간 방향은 분명 성주전이 있는 곳이었다.
예전에 적하성에 와 본 경험이 있었기에 방향은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다.
‘젠장! 정말 제멋대로잖아!’
조문탁이 곧장 뒤쫓으려는데, 마침 무인 두 명이 목단화가 간 방향에서 불쑥 나타났다.
‘이런!’
조문탁이 얼른 마구간 안으로 몸을 숨겼다.
하필이면 두 사람이 마구간 앞에 멈춰 서서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함부로 나설 수도 없는 상황.
이 둘을 죽이거나 기절시킬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 일이 커지면 목단화도 위험해질 수 있다.
‘제길!’
어쩔 수 없이 조문탁은 두 사람이 자리를 뜰 때까지 숨을 죽이기로 했다.
**
‘나도 할 수 있어!’
목단화는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 성주전으로 잠입했다.
아마도 막충은 가장 높은 곳에 있으리라.
최대한 숨을 죽인 채 움직였다.
적하성 자체가 천애의 요새이기 때문인지, 의외로 성주전 내에는 방비가 허술한 편이었다.
‘그만큼 성내 잠입이 불가능하다는 뜻이겠지.’
목단화는 빠르게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실전 경험과 자신감이었다.
동기들과 연습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실력이 향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실전뿐이다.
그리고 실전 경험을 통해서 자신감을 쌓는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나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겠어!’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마지막 층에 올라와서 멈춰 섰다.
이제부터는 더욱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기감을 활짝 펼치니 성주 침소에 호신위로 보이는 네 명의 기도가 느껴졌다.
그리고 곤히 잠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막충의 기도도 함께.
호신위들도 굳이 기척을 숨기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곳에 누군가 잠입할 수 있을 거라는 걸 감히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하긴 이곳은 난공불락의 요새인 적하성이 아니던가?
‘그 요새에 구멍이 난 줄은 꿈에도 모르는군.’
마침내 목단화는 침상에 누워 있는 막충을 확인했다.
찰나,
타앗!
그녀가 벼락처럼 쏘아져 나갔다.
동시에 그녀가 침상의 천장에 있는 네 명의 호신위들을 향해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를 쏘았다.
번쩍! 파지지지짓!
“뭐, 뭐냐?”
막충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을 때,
푸욱!
눈부신 빛을 뚫으며 나타난 누군가가 그의 심장에 단검을 쑤셔 박았다.
“크윽… 네놈은… 대체 누구…!”
**
빛이 번쩍였다.
성주전 최상층에서.
‘단화다!’
조문탁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단화가 만들어낸 마법구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밝고 하얀 빛이 갑자기 나타날 리가 없었다.
마침 지상에서 번을 서는 무인들도 그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방금… 뭐였지?”
“그러게. 뭔가 번쩍인 것 같았는데….”
다음 순간,
퍼콰앙!
성주실의 창문이 부서져 나가면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무인 세 명이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침입자다!”
‘단화!’
조문탁이 어금니를 꾹 씹고는 가장 먼저 튀어나온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는 공중에서 제비를 돌더니 경공을 펼치며 옆 건물의 지붕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추락하는 속도 때문에 꽤나 세게 부딪치는 듯했다.
“저년을 잡아라!”
뒤이어 떨어진 세 명의 무인들이 소리치자 지상에서 번을 서는 무인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제길!’
반사적으로 그곳을 향해 달려가려던 조문탁이 순간 멈칫거렸다.
자신이 달려가 봐야 별 도움이 되지 않을 터.
혼자라면 충분히 저들을 따돌리고 도망갈 수 있겠지만, 목단화를 데리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역시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타닷!
조문탁은 곧장 성문을 향해 달렸다.
막충이 직접 나서서 소리치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가 암살당했거나, 최소한 치명상을 입었다는 뜻이리라.
순식간에 성문 앞에 다다르자, 번을 서고 있던 무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넌 누구….”
퍽!
“엇! 웬 놈…!”
푹!
성문을 지키던 두 명의 무인이 맥없이 쓰러져 갔다.
하급 무인이었기에 애초에 조문탁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조문탁이 지체 없이 성문을 열었다.
**
성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잠시 후,
구구구구…궁!
육중한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렸다.
사비강이 수신호를 내리자, 고적산이 창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가자!”
“우와아아아!”
이히히힝!
철혈단이 일제히 말을 몰고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뒤늦게 성벽 위에서 화살을 쏟아 부었지만, 온통 철갑으로 단단히 두른 철혈단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뒤를 이어 천멸대가 성문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사비강이 들어서자 조문탁이 얼른 달려왔다.
“국주님!”
“뭐야?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그게… 단화가 갑자기….”
조문탁이 자초지종을 빠르게 설명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철혈단과 성내 무인들이 서로 뒤엉키며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성내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설명을 들은 사비강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은 따로 있었군.”
“죄송합니다.”
“어느 쪽이냐?”
“성주전 동쪽입니다.”
“알았다.”
사비강이 대답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아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쉬컥!
“끄악!”
휘리리링!
“아악!”
사심자가 춤을 췄다.
달빛을 받아 팔랑거리는 사심자는 한 번씩 몸부림을 칠 때마다 허공에 피를 뿌렸다.
목단화는 그야말로 무아지경 속에서 연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베었을까?
이미 막충을 죽이는 순간, 엄청난 심력을 소모한 그녀였다.
그래도 라이트닝 볼트를 동시에 발사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어둠 속에서만 머물러 있던 호신위들은 강렬한 빛의 구로 인해 시야 확보를 하지 못했다.
그 바람에 막충의 심장에 단검을 쑤셔 넣을 수 있었다.
다만 창문으로 뛰어내리면서 발목에 약간의 부상을 입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그 사소한 불편함이 큰 약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성문 쪽으로 향하지 못하고, 당장 달아나기가 편한 지형을 골라서 뛰었다.
그런데 그게 패착이었다.
어쩌다 보니 적진 복판으로 들어온 셈이 된 것이다.
‘버텨야 해!’
목단화는 이를 악물었다.
막충의 호신위들은 생각보다 강했다.
성주실에서 라이트닝 볼트에 맞은 한 명은 부상을 입고 쓰러졌지만, 나머지 세 명이 그녀를 악착같이 쫓아왔다.
그리고 지금.
수십 명의 적들이 그녀에게 벌떼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베고, 휘두르고, 막고, 다시 베고.
끝이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옷자락도 여기저기 찢어져 맨살이 드러나고 상처가 생겼다.
세상의 모든 무인이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점점 지쳤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이동이 둔해지기 시작했고,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나마 사심자가 무척이나 가벼운 검이었기에 이렇게나마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때,
[말 좀 들어라.]
사비강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불쑥 귓가에 흘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