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귀환 마교관
191화
“제기랄!”
콰작!
등왕패의 주먹에 탁자 한쪽이 처참하게 부서져 나갔다.
그는 주먹을 쥐고 바들바들 떨었다.
이사흠과 함천석이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설백 장로라면 당연히 맹주 자리를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사흠이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물론 이 모든 행동은 거짓이었다.
그는 이미 구윤과 사비강으로부터 설백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등왕패 앞에서는 철저하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등왕패가 어금니를 뿌드득 갈고는 씹어뱉듯이 읊조렸다.
“설백… 날 그저 이용만 했단 말이지…!”
이사흠이 짐짓 놀란 척 물었다.
“이용만 했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주님.”
“들은 그대로네. 설백 장로가 나를 이용했네.”
“무슨 뜻입니까? 설백 장로는 일선에서 물러난 장로회의 회주일 뿐….”
“내가 맹의 주도권을 쥐게 된 계기는 설백 장로 덕분이었지. 실은 오래 전부터 그가 내 뒤를 봐주고 있었네.”
등왕패가 설백과의 관계에 대해서 간략하게 전해 주었다.
사정이 이 지경까지 되었으니 더 이상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물론 이사흠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경청했다.
마치 천하의 등왕패가 누군가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을 거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처럼.
옆에 선 함천석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등왕패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한데 그 모든 것이 수작이었던 게지! 날 부려먹고 본인이 맹주 직을 차지하겠다는!”
콰장!
다시 한 번 등왕패의 주먹이 탁자를 내려쳤다.
이번에는 탁자가 아예 두 동강이 나면서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기껏 밥상을 차려 놨더니 엉뚱한 자가 날름 먹어치웠다.
어찌 속이 뒤집히지 않을까?
대략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사흠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어… 당주님. 그렇다면 이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자칫 당주님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위험해진다?”
등왕패가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며 돌아보자, 이사흠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외람되지만 설백 장로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당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정함이 드러날 수 있는 약점이라 여기겠지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토사구팽이다.
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아 먹는 법.
자신의 주인에게 그런 말을 직설적으로 전할 수는 없었기에, 이사흠은 등왕패가 알아들을 만큼만 돌려서 말했다.
빠드득!
등왕패가 이를 갈았다.
이사흠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설백처럼 철두철미한 자가 치부가 될 수 있는 자신을 그냥 둘 리가 없다.
‘그래, 머잖아 나를 치려고 하겠지. 그렇다면 역시 그 전에….’
쳐야 한다.
겨우 맹주를 제거했더니 늙은 여우가 나타나서 훼방을 놓는다.
그때 함천석이 조심스레 나섰다.
“사실 그렇잖아도 보고 드릴 것이 있었습니다.”
“뭔가?”
함천석이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일전에 구윤이 그에게 건네준 그 서신이었다.
바로 추량이 위조해서 만들었다는 서신.
함천석이 말을 덧붙였다.
“북명신문에서 발견한 밀서입니다. 천멸대가 발견하기 전에 미리 빼돌린 건데, 그동안은 보는 시선들이 있어서 보고 드리지 못했습니다.”
등왕패가 서신을 펼쳐 들고는 읽어 내려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표정이 점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마침내 그가 부들부들 떨면서 서신을 와락 구겼다.
“이 늙은 여우새끼가!”
밀서는 설백이 북명신문주에게 보낸 것이었다.
동방세가의 금괴를 훔치고 적무대를 제거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금괴가 사라진 것을 동방세가의 탓으로 몰아세워서 그 책임을 등왕패에게 묻겠다는 계획까지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한 마디로 최근 들어 실수만 잦은 등왕패를 제거하고, 북명신문주를 차기 맹주로 추대하는 작업을 진행하겠다는 내용.
등왕패의 이마에 핏대가 튀어나왔다.
“어쩐지…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어!”
역시다.
이러지 않고서야 북명신문에서 금괴가 발견될 리 없지 않나?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이리되면 오히려 감찰국에 감사해야 할 판이다.
만약 감찰국이 금괴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꼼짝없이 설백의 암계에 넘어갈 뻔하지 않았나?
분노의 끝은 허무였다.
그가 털썩 의자에 앉았다.
그동안 한 곳만을 보고 달려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자가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 것이다.
이사흠이 얼른 곁으로 다가가 나직이 속삭였다.
“당주님. 먼저 선수를 쳐야 합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무슨 좋은 수라도 있나?”
등왕패가 이사흠을 슬쩍 보았다.
그래도 맹주를 제거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사흠이 아니던가?
혹시라도 묘책이 있을까 싶어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사흠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설백 장로는 지금 임시 맹주가 된 이상 최대한 빨리 자신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가 등왕패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
감찰총국주 사비강이 죽었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그것도 뇌옥에 갇혀 있던 노괴가 탈출하여 저지른 짓이었다.
강호인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임시 맹주로 추대된 설백은 이러한 분위기를 적극 이용해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정사대전에 참전할 무인들을 대거 소집한 뒤 곧바로 혈사련과의 접경지대인 개평 지단으로 이동했다.
개평 지단주 역시 전투 태세를 완벽히 갖춘 상태에서 본단의 무인들을 맞이했다.
일찌감치 맹에서 몸을 빼낸 사비강은 개평 지단 인근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천멸대 역시 마찬가지.
어차피 일 년간의 근신 처분으로 인해 모든 짐을 덜어낸 상태였기에 이러한 눈속임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등왕패와 설백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당이협의 보고에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흠과 함천석이 제 역할을 해주는 것 같군.”
“사실 설백 장로가 맹주 자리를 차지했을 때부터 예견된 것이라 볼 수 있지요.”
“하긴.”
사비강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로서도 설백이 그렇게까지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등왕패를 맹주로 추대할 줄 알았다.
한데 뜻밖에도 설백이 직접 맹주의 자리에 올랐다.
사비강의 입장에서는 전혀 아쉬울 것이 없었다.
오히려 설백이 임시 맹주가 되면서 그가 노린 바는 훨씬 수월해졌다.
그 순간 등왕패의 마음속에는 이미 분노의 불씨가 붙어 버렸고, 사비강은 살랑살랑 부채질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더 강한 부채질을 해야 할 때다.
“슬슬 북명신문주가 퇴장해 줘야 할 때군. 살막에 지시하도록.”
어차피 살아 있어 봐야 그 비열한 본성을 버리지 못해 마계의 앞잡이 역할이나 할 자다.
그를 제거함에 있어서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사흠과 함천석에게도 언질 해두겠습니다.”
“그래. 등왕패가 마지막 수를 쓰게 되면 천멸대를 준비시켜. 장소는 어디로 정했지?”
“교항산(敎恒山)의 관제묘입니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군. 모처럼 우리 애들도 몸 좀 풀겠어.”
사비강의 눈빛이 깊어졌다.
**
“분부하신대로 밀서를 만들었습니다.”
함천석이 등왕패에게 다가와 서신을 건네주었다.
혈사련주가 설백에게 보낸 것처럼 위조된 서신이었다.
교항산의 관제묘에서 설백을 만나 은밀히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요구에 응해 준다면 섭섭하지 않은 조건을 제시하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천안각에서 은밀히 입수한 정보라고 하시면 설백 장로도 큰 의심 없이 받아들일 겁니다.”
등왕패가 눈빛을 예리하게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흑랑대가 만든 위조 서신답게 감쪽같이 속을 정도였다.
게다가 별 내용이 없음에도 글자 하나하나에서 신뢰가 느껴졌다.
그만큼 함천석과 추량이 신경 써서 만든 서신이었다.
“과연 이 정도면 설백 장로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겠어.”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사흠이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당주님!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슨 일인가?”
등왕패가 이젠 놀라는 것도 지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사흠이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감찰국 뇌옥에 갇혀 있던 북명신문주가 암살당했습니다.”
“뭣이?”
등왕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사흠이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감찰국이 근신 처분을 받으면서 인력이 빠져나가자, 그 빈틈을 노리고 암살자가 접근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흉수는 잡지 못했단 말인가?”
“예. 하지만 천안각에서 조사한 결과 설백 장로가 손을 쓴 정황이 발견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하게.”
“설백 장로가 이번 일을 당주님에게 뒤집어씌우려는 듯한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뭐야! 이 망할 영감탱이가!”
등왕패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분이 쉽사리 식지 않았다.
북명신문주를 죽인 이유는 충분히 짐작된다.
아마 설백이 금괴를 훔치라고 지시했던 일에 대해서 나중에라도 알려질 것이 신경 쓰였을 것이다.
이미 감찰총국이 힘을 잃은 상황이니, 북명신문주를 죽이는 것쯤은 어렵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늙은이가 살인멸구를 하고서는 내게 뒤집어씌우려고 해?”
“아무래도 슬슬 정리 수순으로 들어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아니, 그전에 언제라도 설 장로의 암수가 뻗어 올지 모릅니다.”
“그렇겠지. 설백, 그 인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지.”
그러고 보니 무화전의 후원 정자에서 나눈 대화가 다시금 떠올랐다.
설백은 자신에게 북명신문주를 내치길 강요하지 않았던가?
거기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리라.
‘내가 북명신문주를 끌어안게 되면 언젠간 자신이 저지른 짓이 들킬 것이라 여긴 거겠지!’
생각할수록 괘씸한 일이다.
등왕패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인다. 한 번 읽어 보시게. 흑랑대가 만든 것이야.”
등왕패가 위조된 밀서를 이사흠에게 건넸다.
서신을 훑어 본 이사흠이 눈을 빛냈다.
“과연 이 정도면 설백 장로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겠군요. 이걸 당주님께서 직접 전하시게 되면 두 분이 함께 관제묘로 가실 수 있을 겁니다. 관제묘에는 혈귀대(血鬼隊)를 먼저 배치해 두겠습니다.”
혈귀대는 그동안 등왕패가 은밀하게 키워 온 조직으로, 정예 중에서도 정예였다.
뿐만 아니라 온갖 지저분한 임무는 혈귀대가 도맡고 있었다.
“철저히 준비해서 실수가 없도록 하게.”
“믿고 맡겨 주십시오.”
이사흠이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
음산한 숲속.
관도를 살짝 벗어난 곳에 낡은 관제묘가 있었다.
나무와 수풀들이 그 관제묘를 호위라도 하듯 빙 두르고 있었다.
어느 순간 관제묘 앞으로 서른 명의 무인이 내려섰다.
핏빛 무복에 복면을 쓴 자들.
혈귀대였다.
그들 중 혈귀대주가 주변을 날카롭게 훑더니 관제묘 뒤쪽의 숲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무인들이 일제히 그곳으로 몸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흠칫!
그들 모두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부스럭. 부스럭.
수풀을 헤치며 한 남자가 태연히 걸어오는 게 아닌가?
혈귀대주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상대를 빤히 응시했다.
‘누구지?’
마침내 달빛이 드리워지면서 상대의 얼굴이 드러났다.
혈귀대주의 안색이 굳었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감찰국주?”
“호오, 이렇게 알아봐 주니 나도 유명해지긴 한 모양이야.”
사비강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