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귀환 마교관
190화
“아, 그전에.”
사비강이 걸음을 옮기다 말고 바닥에 떨어진 노인의 머리를 가리켰다.
“이자, 알고 있소?”
서래향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사비강과 노인의 머리를 번갈아보았다.
사비강이 눈살을 구겼다.
“아직도 어느 줄을 잡을지 고민하는 거라면….”
“알 것 같아요.”
사비강이 다시 물었다.
“누구요?”
“노괴라는 자예요. 오 년여 전에 정도맹에 사로잡힌 걸로 알고 있어요. 사공을 익힌 자인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납치해서 실험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죠.”
“흐음. 그 인체 실험 끝에 얻게 된 것이 대침을 이용한 금제라는 건가?”
“아마 그럴 거예요.”
“하면 이자를 사로잡은 정도맹도 대단하긴 하군. 금제가 풀린 상태라면 그야말로 무적일 텐데.”
“금제가 걸린 상태에서 사로잡혔을 수도 있죠.”
“하긴.”
과거의 일이나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다.
뭐,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거니와.
“한데 이자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요?”
“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말했다시피 이자는 혈사련 소속의 무인은 아니에요. 사공을 익혔지만 혈사련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당이협이 들어섰다.
“국주님! 괜찮으십니까?”
소리치던 그가 바닥에 쓰러진 노괴와 엉망진창이 된 실내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감찰총국은 정도맹의 내원에서도 굉장히 한적한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다.
어느 기관에도 예속되지 않으며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한다는 상징성을 두기 위해서라도 특별히 외진 곳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때문에 당이협도 뒤늦게 감찰국에서 일어난 소란을 알아채고는 달려온 것이었다.
물론, 만약을 대비해 수하들에게는 누구도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시해 두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당이협의 질문에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불청객이 좀 있었어.”
“이자는…!”
“알아보겠어?”
“노괴입니다.”
“그렇다더군.”
사비강이 서래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이협이 빠르게 설명을 이어 갔다.
“뇌옥에 갇힌 노괴가 자력으로 탈출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아마도 설백이 손을 쓴 것 같습니다.”
“설백이?”
“예, 최근 노괴를 접견한 인물들은 모두 무화전의 무인이었습니다.”
당이협은 그동안 암영대를 이끌고 맹 내의 모든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노괴와 관련된 사항들에 대해서 곧바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음?”
사비강이 노괴의 시체를 내려다보는데, 잘려 나간 목의 단면에서 뭔가 꾸물거리며 기어 나왔다.
키리릭. 키릭.
이상한 소리를 내며 기어 나온 것은 실지렁이처럼 가느다란 형태였는데, 얼핏 메뚜기나 사마귀 따위의 뱃속에 기생하는 연가시와 닮은 모습이었다.
“이거였군요. 노괴가 설백의 지시에 따른 이유가.”
독공에 해박한 당이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야?”
사비강의 질문에 당이협이 실지렁이 같은 녀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삭뇌충(削腦蟲)입니다.”
“삭뇌충?”
당이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명을 이었다.
삭뇌충.
모든 생물이 그러하듯 삭뇌충도 암놈과 수놈이 있는데, 짝짓기를 하고 나면 암놈이 알을 낳고 그대로 몸이 굳어 버린다.
이때 굳어 버린 암놈을 단환으로 만든 것이 삭뇌기단(削腦期團)이다.
“이 삭뇌기단을 복용하게 되면 평소에는 단환의 형태로 유지되지만, 수놈이 죽으면 암놈이 단환에서 깨어 나와 뇌를 갉아먹게 됩니다. 암수가 아무리 먼 거리에서 떨어져 있어도 상관없지요.”
“그 말은 수놈을 보유한 설백이 삭뇌기단을 노괴에게 먹였고, 그걸 빌미로 수족처럼 부렸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지금 이 녀석이 기어 나온 이유는 숙주가 죽어서 그렇습니다.”
“흐음. 뇌옥에 갇힌 노괴를 끌어들여서 날 공격했다는 건 사파에 대한 분노를 더 부추기겠다는 노림수겠지. 후후, 이 늙은이가 손도 안 대고 코를 풀려고 하는군.”
적어도 등왕패보다는 확실히 다루기가 까다로운 상대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이협이 꾸물거리며 기어 나온 삭뇌충을 밟아 죽이며 물었다.
수놈이 죽으면 암놈이 반응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상관이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설백의 장단에 어울려 줘야지.”
“하면 매 각주를 불러오겠습니다.”
“분위기를 만들어. 마치 내가 죽은 것처럼. 거리낄 것이 없을수록 설백 장로도 더 활개를 치면서 본성을 드러낼 테니까. 물론 이사흠과 함천석에게는 사실을 알려 주고.”
“그럼 이자는….”
당이협의 눈길이 노괴의 시체로 향했다.
“내가 죽으면서 동귀어진한 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당이협이 대답을 하고는 몸을 돌려 나갔다.
서래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설백 장로가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까요?”
“속을 거요. 우선 설백의 입장에서 볼 때, 내가 죽은 척할 이유는 없지 않소? 오히려 살아남았다면 사파의 공격을 막아낸 영웅으로 등극할 기회니까. 거기에 설백의 수하가 내 시체를 직접 확인까지 한다면 더 의심할 여지가 없지.”
“시체를 확인한다니 어떻게...?”
“이왕 내가 내민 줄을 잡았으니, 좀 도와주셔야겠소.”
말을 마친 사비강이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
지붕에 납작 엎드려 있던 무영은 기척을 최대한 숨긴 채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조금 전부터 감찰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국주실에서 뛰쳐나온 당이협은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 후로 국주실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 가서 깨진 창문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지금은 신중해야 한다.
‘노괴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다니….’
설마 둘 다 죽어 버린 걸까?
삭뇌기단을 복용한 노괴가 이대로 잠적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역시 노괴도….’
그때였다.
“밤도 깊은데 고생이 많다.”
뒤통수를 때리는 목소리!
무영은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천천히 돌아서자 사비강이 히죽 웃으며 주먹을 냅다 꽂았다.
퍼억!
**
끼리릭. 끼릭.
아주 희미한 소리가 상자 안에서 들렸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다.
상자 안에는 실지렁이처럼 가느다란 몸체를 가진 벌레가 꾸물거리고 있었다.
삭뇌충의 수놈이었다.
설백이 상자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왔느냐?”
“예, 맹주님.”
어느새 무영이 부르는 호칭은 장로에서 맹주로 바뀌어 있었다.
“어찌 되었나?”
“노괴가 사 국주를 제거했습니다.”
무영의 보고에 설백의 입가에 여린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 될 줄 알았다.
금제가 풀린 노괴는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강했으니까.
오 년여 전, 그를 사로잡을 때도 기지를 발휘해 속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생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후후후. 참 재미있지 않은가? 내공을 끌어올려 줄 영약인 줄 알고 먹었던 것이 삭뇌기단이라니. 노괴의 입장에서는 참 뼈아픈 실수였을 테지. 그래, 노괴는 어쩌고 있나?”
“저어… 그것이 동귀어진에 당한 듯합니다.”
“동귀어진? 사비강 국주가 저승길 동무로 노괴를 데려갔다?”
이번에는 다소 의외라는 듯 설백이 무영을 돌아보았다.
무영이 고개를 숙이며 보고를 이어갔다.
“감찰국에서는 사 국주의 죽음을 비교적 조용히 처리하려는 분위기입니다. 아무래도 사파를 물리쳤던 영웅적인 면모를 유지하고 싶은 듯합니다.”
“하긴. 쌓아올린 명성이 있을 테니.”
“예, 노괴는 뇌옥에서 탈출한 것으로 꾸며 두었습니다. 해서, 간수 두 명을 죽였습니다.”
“그랬군. 수고했네. 사비강 국주는 어찌 죽었나?”
무영이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전했다.
물론 그것은 실제로 그가 겪은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서래향의 환술에 걸려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영의 묘사와 설명은 제법 그럴싸했기에 설백도 더 이상의 의심은 하지 않았다.
“그렇군. 그리 됐군.”
설백이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노괴가 죽었다는 것이 좀 아쉬웠다.
살아 있으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을 텐데.
생각보다 사비강이 강했다.
‘뭐, 상관없지.’
어차피 중요한 건 사비강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왠지 모르게 신경 쓰이는 자였다.
“그럼 이제 이 녀석도 쓸모가 없게 됐군.”
설백이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실지렁이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다음 순간, 그가 삭뇌충을 콱 움켜쥐었다.
키이익!
듣기 싫은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그의 손아귀에서 진득한 녹색 액체가 흘러내렸다.
삭뇌충이 터져 죽은 것이다.
“이로써 오염됐던 물이 정화됐구나.”
설백의 눈초리가 매섭게 빛을 발했다.
“그럼 이제 새로운 시대를 열어 보지.”
그가 창가로 다가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근처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밤새 한 마리가 후드득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어느 순간 새의 눈이 희번덕이며 뒤집혔다가 제자리를 찾았지만,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하얗게 뒤집혔던 사비강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군.”
사실 노괴의 약점을 파악하지 못했더라면 위험한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운이 좋았다.
당이협이 이끄는 암영대는 노괴의 시체를 신속하게 수습하고, 국주실의 부서진 물건들을 빠르게 복구해 나갔다.
물론 사방을 경계해서 외부인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대략의 정리가 끝나자 사비강이 수납장에서 새 술병을 꺼내 왔다.
그때까지도 서래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사비강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남자 정체가 뭐야?’
살면서 그런 싸움은 처음 봤다.
사비강이 사용한 무공이 정공인지, 사공인지, 마공인지도 구분되지 않았다.
게다가 조금 전의 그 모습.
한참이나 눈이 허옇게 뒤집혀 있더니 갑자기 설백 장로의 반응을 확신한다.
도대체 어떻게?
물론 사공이나 마공 중에도 그런 경우가 가끔 있다.
예컨대 구슬을 통해 다른 곳을 관찰한다거나.
하지만 저렇게 눈이 뒤집혀서 곧바로 확인하는 무공이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마침 사비강이 탁자 앞에 술잔을 내려놓더니 술을 채웠다.
또로롱.
맑고 영롱한 소리에 서래향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도대체 당신 정체가 뭐죠?”
“사비강이오.”
“아니,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몰랐소? 원래는 교관이오. 생도들을 계도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어엿한 교관.”
사비강이 히죽 웃어 보이자, 서래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군요.”
“그런 말 자주 듣소.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원래 사람이라는 게 그렇소. 누군가를 안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시건방진 거지.”
“좋아요.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죠.”
“바라던 바요.”
“우리끼리 하자는 이차 협정. 무슨 얘기죠?”
서래향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사비강도 웃음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