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192화 (192/670)

# 192

귀환 마교관

192화

혈귀대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런 곳에 왜 국주가…?’

그는 이미 죽지 않았던가?

지금 귀신이라도 보는 건가?

우습게도 아주 잠깐, ‘귀신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은 그가 사비강을 냉랭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죽었다고 소문 난 자가 살아 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음모에 빠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불안감이 음습해 왔다.

그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

사비강을 제거한다.

그가 왜 살아 있으며, 어째서 이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호의가 느껴지진 않는다.

게다가 자신들은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될 존재다.

그 누구라도 자신들을 목격하면 죽여야 한다.

예외는 없다.

혈귀대주가 재빨리 수신호를 보냈다.

찰나,

타다다닷!

복면인들이 순식간에 사비강을 에워쌌다.

동시에 전신에서 숨 막힐 듯한 살기가 쏟아졌다.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하는 짓이지?”

“개인적인 원한은 없소.”

“개인적인 원한이 없는데 왜 이렇게 지저분한 살기를 피워대?”

“서로 좋게 볼 인연은 아닌 것 같으니 잡담은 이쯤에서 끝냅시다!”

혈귀대주가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바닥을 차고 쏜살 같이 날아갔다.

그 순간,

쒸에에에엑!

“허엇!”

화살 한 대가 날카로운 파공성을 일으키며 혈귀대주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혈귀대주가 재빨리 무릎을 굽히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촤아아아악!

매섭게 날아들던 화살이 그의 얼굴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뒤로 날아갔다.

푸욱!

“커억!”

혈귀대주 뒤쪽에 서 있던 수하 한 명이 목을 움켜쥐고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화살이 목에 박혀 있었다.

혈귀대주가 고개를 들자 사비강이 입매를 찢으며 웃었다.

“우리 애들이 좀 거칠어서 말이야.”

‘애들?’

그 순간,

슈슈슈슈슈슉!

허공에서 그림자가 사비강을 에워싸며 떨어져 내렸다.

모두 스무 명.

사비강이 양손을 펼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소개하지. 불패의 군단, 천상천하유아독존혈풍멸살대다.”

“뭔 개소리를!”

순간 혈귀대주가 벌떡 일어나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앞을 곡보옥이 막아섰다.

“멈추시오!”

“까불지 마라!”

혈귀대주가 질풍처럼 칼을 휘둘러 갔다.

쒸에에엑!

곡보옥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얼른 손을 들어 막았다.

‘흥! 역시나 학관에서 공부나 해야 할 애송이군!’

칼날을 휘둘러 가는 혈귀대주가 내심 비웃었다.

제아무리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내공을 지녔다고 해도, 자신이 휘두르는 검을 맨손으로 막아내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그는 자신의 칼날에 곡보옥의 손목이 싹둑 잘려 나가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콰아앙!

뜻밖에도 곡보옥의 손목이 칼과 부딪치면서 어마어마한 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촤르르륵!

“크웃!”

혈귀대주가 한참이나 밀려나면서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이건 뭐…?’

뿌연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그는 눈을 부릅떴다.

기의 폭발이 일어났을 때, 예상 밖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가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적어도 내상을 입고 쓰러졌거나, 손목을 쓰지 못할 정도로 부어올랐거나.

한데 곡보옥은 너무나 멀쩡했다.

뿐만 아니라 서 있던 그 자리에서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곡보옥의 양발은 말뚝이라도 박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뭐 저런…!’

혈귀대주의 경악을 아는지 모르는지, 곡보옥은 양손을 툭툭 털며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사실 곡보옥이 이만큼이나 버텨 낼 수 있는 이유는 사비강으로부터 받은 철인구 덕분이었지만, 혈귀대주가 그런 내막까지 알 수는 없었다.

“국주님을 건드리면 안 되지. 국주님이 나서면 우리가 수련할 기회도 없어지거든.”

“뭐? 수련…?”

“국주님이 나서면 너희들 전부 순식간에 죽어 버릴 테니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우리의 소중한 교재를 그렇게 낭비할 수는 없잖아? 흐흐흐.”

혈귀대주가 분노로 뺨을 씰룩이는데,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사비강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야, 인마. 그러니까 내가 무슨 광기 들린 살인마 같잖아?”

“모르셨습니까? 가끔 그렇게 보일 때도 있다고요.”

“뭐야?”

“크흠! 그럼 저희는 지금부터 실전 수련에 들어갑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곡보옥이 몸을 날렸다.

뒤이어 천멸대원들이 일제히 복면인들을 향해 쇄도했다.

**

“흐음.”

밀서를 펼쳐 든 설백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한참이나 침음을 흘렸다.

이미 밀서의 내용은 다 읽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아마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리라.

바로 앞에 시립해 있는 등왕패는 말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괜히 조급함을 드러내서 이런 말, 저런 말을 꺼냈다가는 오히려 쓸데없이 의심을 살 수 있었다.

설백은 쉬운 자가 아니다.

자신보다 철두철미하며, 신중하면서도 사악하다.

‘설마… 눈치를 챈 건가?’

등왕패의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한 마디라도 더 꺼내고 싶은 조급함이 불쑥불쑥 치밀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밀서는 감쪽같았다.

함천석이 준비한 것이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우선 기다려 보자.

“이 밀서….”

마침내 설백의 입이 열렸다.

등왕패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천안각에서 입수했단 말이지?”

“예, 혈사련주도 전쟁을 원하지는 않겠지요. 하니 맹주님을 만나 이런저런 조건을 제시할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럴까?”

“예?”

“혈사련주는 자존심이 센 사람이야. 그런 그가 직접 나와서 내게 아쉬운 소리를 할까?”

“그건….”

등왕패가 말끝을 흐렸다.

‘제길, 틀렸나?’

이대로 설백이 만남에 응하지 않겠다고 하면 자신의 암계는 수포로 돌아간다.

‘그래, 서두를 필요는 없다. 이번이 아니어도 기회는 언젠가 있을 거야.’

애써 스스로를 달래며 체념하는데,

“뭐, 만나보면 알 일이지.”

“그 말씀은….”

“궁금하군. 혈사련주가 나를 은밀히 만나서 무슨 말을 꺼내올지.”

설백이 묘한 시선을 등왕패에게 던졌다.

등왕패는 마치 그 말을 자신에게 던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뜻밖의 결정에 등왕패가 형식적인 만류의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암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호위를 대동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니지. 그랬다간 혈사련주가 날 우습게 볼 일이 아닌가? 오히려 강호에 비겁한 겁쟁이라고 소문이 날 걸세.”

“혹시라도 함정이 있다면….”

“그 함정. 누가 파놓은 것이든 날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은가?”

설백이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등왕패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자만을 하는 표정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마치 자신을 향한 경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등왕패는 그것을 설백의 자만이라 판단하기로 했다.

설백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철저히 자기 자신을 믿는 인물.

이 암계를 세우면서도 통할 것이라고 판단한 이유가 바로 그러한 설백의 성격 때문이다.

그러면 호위 따위는 대동하지 않고 혈사련주를 만나러 갈 테니까.

어쨌든 자신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설백은 스스로의 능력과 판단을 맹신했다.

‘후후후. 그래, 그 자만이 당신에게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등왕패가 내심을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다만, 제가 동행하는 것만은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곁에서 맹주님을 호위하겠습니다.”

“그야 물론이네. 자네가 이 서신을 가져왔으니 함께 가야 하지 않겠나?”

설백이 미소를 지었다.

**

휘이이잉.

나뭇잎 따위가 바람에 휩쓸리며 관제묘 앞을 굴러다녔다.

관제묘 인근은 스산한 분위기였다.

잠시 후, 관제묘 앞으로 두 인영이 날렵한 동작으로 내려섰다.

바로 설백과 등왕패였다.

설백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련주는 아직인 모양이군.”

“잠시 기다려 보지요.”

등왕패가 대꾸하며 기감을 활짝 펼쳤다.

‘정말 감쪽같이 몸을 숨겼나보군.’

혈귀대의 매복 사실을 알고 있는 자신조차도 기척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라니.

하긴, 그들은 지금껏 그 이름처럼이나 귀신같은 존재로 지내 왔다.

은신술 하나 만큼은 확실하리라.

슬쩍 설백의 눈치를 살펴보니, 그 역시 아무런 기척도 눈치를 채지 못한 듯했다.

설백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쿠르르릉. 구릉.

나지막한 하늘이 음산한 울음을 내질렀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날이 참 좋아. 이런 날씨는 훗날 회상할 때도 얘깃거리가 될 수 있지.”

“혈사련주를 너무 믿으시면 안 됩니다.”

“물론일세. 맹약조차 지키지 않는 자를 어찌 믿겠는가?”

“물론입니다.”

등왕패의 대꾸에 설백이 툴툴 웃었다.

“자네의 문제가 뭔지 아는가?”

“예?”

느닷없는 질문에 등왕패가 고개를 들었다.

설백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조급해, 자네는.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일 때 이처럼 망설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쯤 혈사련주가 나왔어야 하네. 그게 아니면 그를 대체할 그 누구라도.”

“……?”

“무의식중에 망설이는 것일 테지. 참아야할 때 기다리지 못하고, 정작 밀고 나가야 할 때는 주춤거리지. 그게 지금껏 자네가 실패한 원인일세.”

“새겨…듣겠습니다.”

“이제 와서는 늦었네. 그만 나오라고 하시게.”

“무슨 말씀을….”

“지겹네. 내 말하지 않았나? 이젠 뭐든 꺼내야 할 때라고.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밀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을 마친 설백이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서는 숨 막힐 듯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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