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106화 (106/670)

# 106

귀환 마교관

106화

사비강의 근신 기간이 끝났다.

물론, 특목반 생도들 역시 다시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특목각 근처는 모처럼 모여든 생도들로 활기가 넘쳐났다.

한 차례 혈풍이 불었던 용천관은 그렇게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특목각의 분위기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일전에 호자림에서 언벽에게 당해 죽을 위기에 빠졌었던 천세명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표정은 예전과 달랐다.

언제나 날카로운 눈초리로 특목각을 응시하던 그가 지금은 더 없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특목각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마침 그의 곁으로 등부형이 다가왔다.

“특목반이 다시 수업을 시작하는군요.”

천세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아니겠소?”

등부형이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천세명을 보았다.

그는 천세명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며 내심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이를 갈면서 사비강을 골탕 먹일 궁리를 시작했을 터였다.

한데 지금은 마치 특목반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가?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기면서 사람이 달라진 것일까?

하긴 그를 살린 사람이 사비강이었으니….

천세명이 등부형을 돌아보았다.

“등 교관. 그동안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소.”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사비강 교관이 교관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왔소. 예전 그의 유약함이라든지, 최근 보였던 돌발 행동 등,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게 없었소.”

“그러실 만도 하지요.”

“하지만 이젠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됐소. 교관으로서의 자질이란 그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님을.”

“무슨 말씀이신지….”

“그는 훌륭한 교관이오. 생도들을 인재로 양성할 줄도 알고, 생도들을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교관. 뿐만 아니라 동료 교관들의 시기와 질투에도 당당하게 맞설 줄 아는 위인이었소.”

등부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천세명이 사비강을 이토록 칭찬하는 날이 올 줄이야.

천세명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아마도 나는… 그의 그런 재능을 부러워했나 보오. 질투하고 시기했겠지. 그래서 그를 그토록 괴롭히려고 했나 보오.”

“천 부장님은 교관부장이십니다. 당연히 교관의 자질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시하며….”

하지만 천세명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오. 그렇게 포장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나 스스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오. 그리고 나의 그런 추악한 모습을 그처럼 이해하려고 노력해 준 그대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표하오.”

“천 부장님….”

“사비강 교관은 나의 이런 옹졸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날 위기에서 지켜주었소.”

“…….”

“뿐만 아니라, 조직대항전을 치르기 전에도 그는 사파의 음모에 대해 누차 경고했었지.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를 배신자로 몰고, 조직대항전을 강행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소. 참으로 부끄럽소.”

“천 부장님.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입니다.”

“그렇소.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지. 하지만 그 실수가 잦으면 신뢰를 잃는 것이오.”

“그래도 천 부장님의 그런 심정을 듣고 나니 오히려 제가 다 부끄럽습니다. 저는 아직도 부러진 오호천황도를 생각하면….”

“허허허. 내 어찌 등 교관의 마음을 모르겠소? 하나, 그 또한 정당한 대결의 결과이니 너무 마음 쓰지 않았으면 좋겠구려.”

“알겠습니다. 제가 오늘 천 부장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웁니다.”

“부끄러울 따름이오. 사비강 교관… 그자는 어쩌면 정말로 내가 감히 넘보지도 못할 위인인지도 모르겠소. 심지어 그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내 탓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소. 정말이지 단 한 번도. 그야말로 진정한 대협의 면모를 가진 자라고 할 수 있겠소.”

“그렇군요. 저는 오히려 천 부장님을 통해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제게 깨달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거참. 등 교관께서 날 자꾸만 부끄럽게 만드는구려.”

천세명과 등부형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등부형은 마음 깊은 곳이 푸근해지는 기분이었다.

얼마만이던가?

이렇게 부정적인 마음을 지우고 따뜻한 생각으로만 대화를 나눴던 것이.

돌이켜보면 최근 자신은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노만 가득했던 것 같다.

어디 그뿐이랴?

물질에 대한 욕망도 많았기에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을,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갖고자 악착같이 살아 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깨달았다.

‘그래, 어쩌면 그가 내 보도를 세 번이나 깨트린 것도 그러한 깨달음을 간접적으로 알려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한낱 칼자루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칼을 사용하는 사람이 중요하다.

도를 처음 잡았을 때, 사부님이 해주신 말씀이었다.

지금껏 그렇게 단순한 진리를 듣고도 외면한 채 화려함에만 치중했다.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뒷짐을 진 채 특목반을 바라보는 천세명.

햇빛을 받은 그의 얼굴이 평소보다 유난히 밝고 환해 보였다.

깨달음을 얻은 자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그래, 나도 이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자. 더 이상은 뇌물도 받아먹지 말고, 공정하게 생도들을 대하면서 나 자신을 좀 더 수양해야겠구나.’

갑자기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사비강’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이러한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 나타난 사람 같았다.

마침 한쪽 구석에서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는 여운진이 보였다.

용천관에서 허드렛일을 맡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의 표정은 언제나 괴로움으로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생도부장’이라는 직책에서 졸지에 관내 잡역꾼으로 전락하였으니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한데 지금은 그의 표정도 온화해 보였다.

‘어쩌면 매일 같이 허드렛일을 하면서 여 교관께서도 뭔가 깨달음을 얻은 걸지도.’

등부형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천세명과 인사를 나눈 뒤 걸음을 돌렸다.

모처럼 용천관을 거닐며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동안은 듣지 못했던 소리들이 들려온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남녀 생도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누는 소리, 대련을 하면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까지.

그 모든 소리가 즐겁게 다가왔다.

‘예전에는 왜 이런 소리들을 듣지 못했을까?’

마음을 달리 먹으니, 이렇게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가 없다.

마침 맞은 편에서 한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왔다.

매혹적인 자태의 여인은 바로 매설란이었다.

등부형은 그녀에게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 보니 매 교관의 귀고리와 반지도 사비강 교관이 선물한 것이라지?’

들리는 얘기로는 꽤나 기물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생도들에게도 그러한 기물들을 나누어 주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만약,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그러한 기물을 손에 쥐고 있다면?

아마도 자기를 위해 사용했거나, 누군가에게 뇌물로 바쳤으리라.

‘과연 그와 나는 그릇이 다르구나.’

등부형이 씁쓸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호연각으로 향했다.

그곳은 각종 병장기를 보관해 두는 곳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얼씬도 하지 않았을 거다.

아니, 거들떠도 보지 않았으리라.

도법을 가르치는 교관인 자신에게는 그만큼 훌륭한 보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기에.

호연각에서 취급되는 싸구려 병장기를 자신이 사용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여겼다.

‘중요한 건 칼이 아니라 사람이지.’

등부형은 피식 웃었다.

이 단순한 진리를 이제야 깨닫다니.

그가 막 호연각 입구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엇? 등부형 교관님 아니시오?”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등부형은 잠깐 멈칫거렸다가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게 누구시오? 사비강 교관님 아니시오?”

“하하하. 반갑소. 석 달 만에 뵙는군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어딜 다녀오시는 길이오?”

“아, 학장님을 뵙고 오는 길이오. 이번의 징계에 대해 다소 부당함이 있어 대화를 나누고 오는 길이었소.”

“하긴. 사 교관께서 억울하실 만도 하오.”

“오오, 이해해 주시는 거요? 등 교관께서 이해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

“하하하! 그렇소? 이 등 아무개를 너무 부끄럽게 만들지 마시오.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아직 남아 있으니.”

“하하하. 그렇군요. 참, 일전에 조직대항전에서의 일은 미안하게 됐소. 그 칼… 아끼던 것 같았는데.”

등부형이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신경 쓸 것 없소. 명장은 도구를 탓하는 법이 아니라 하지 않소? 오히려 진심으로 상대해 줘서 고마웠소.”

“그렇게 받아들여 주신다니 제가 더 고맙소. 그런 의미에서 제가 약소하지만 한 가지 선물을 준비했소.”

“선물이라니…?”

뜻밖의 이야기에 등부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근 그가 온갖 기물을 생도들에게 퍼준다는 소문이 나돌지 않았던가?

마침 사비강이 도집에 갈무리 된 칼 한 자루를 휙 집어던졌다.

턱.

무심결에 받아든 등부형이 손에 들린 것을 찬찬히 살폈다.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도집.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용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척 보기에도 평범한 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등부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혹시…?”

“별 것 아니지만 내 등 교관님을 드리려고 어렵게 구한 선물이라오.”

등부형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 이건… 그 유명한 패, 패왕천룡도(覇王天龍刀)가 아니오?”

사비강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등부형이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상에 이리 귀한 것을 어찌 내게…!”

“뭐, 그간 세 번 씩이나 등 교관님의 도를 부러뜨린 것도 있고… 미안하기도 해서 준비했소.”

“사 교관….”

“하하하. 더 이상은 낯간지러우니 나는 이만 가보겠소. 그럼.”

“사 교관…, 사 교관…!”

등부형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사비강이 자리에서 떠난 뒤였다.

‘아아, 그는 나를 한 없이 작아지게 만드는구나.’

그의 뺨을 타고 한 줄기 눈물이 또르르 굴러 내렸다.

그가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는 사비강에게 받은 패왕천룡도를 허리춤에 패용했다.

‘패왕천룡도가 내 손에 들어오다니….’

패왕천룡도는 지금까지 그가 가졌던 보도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값진 물건이었다.

그렇게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못하는데, 마침 호연각 안에서 한 중년인이 걸어 나오다가 등부형과 마주쳤다.

“오, 등 교관님 아니십니까?”

“아, 호연각주님. 안녕하십니까?”

“네, 그런데 그건… 못 보던 도입니다.”

호연각주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아, 하하하! 어쩌다 보니 생겼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잠시 좀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하하.”

등부형이 기분 좋게 패왕천룡도를 건네주었다.

호연각주 하기공(何其鞏)은 병장기 관리를 맡은 사람답게 각종 병장기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출중한 안목을 가진 자였다.

패왕천룡도를 찬찬히 살피던 하기공이 감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놀랍군요. 실로 대단합니다.”

“하하. 역시 그렇지요?”

“대체 어디서 이런 걸 구하신 겁니까?”

“뭐, 어쩌다 보니… 날 존경한다는 누군가가 선물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등부형은 예전의 습관대로 거짓말이 나왔다.

하기공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선물이라… 그렇군요.”

“어떻습니까? 하 각주님께서 보시기에는?”

“정말 놀랍다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허허, 그 정도입니까?”

“물론이지요. 이 정도로 정교한 세공과 발도 시의 깔끔한 느낌은 가히 의심할 여지가 없군요.”

“허허허.”

“어쩜 이렇게 똑같이 만들었는지…. 웬만한 사람이 본다면 틀림없이 깜빡 속아 넘어갈 겁니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깜빡 속아… 음? 속아…?”

“예, 패왕천룡도와 아주 흡사하니까요. 하지만 조예가 깊은 사람이 본다면 역시 짝퉁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겠지요.”

“가만… 지금 그게 짝퉁이라는 말이오? 그 패왕천룡도가?”

“음? 모르고 계셨습니까?”

오히려 하기공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순간 당황한 등부형이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허, 허허! 그, 그럴 리가요. 다, 다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단, 단지 각주님이 얼마나 잘 알아보시는지 궁금해서 짓궂은 장난을 쳤을 뿐입니다. 무례했다면 용서를….”

“하하하. 아닙니다. 장난을 치실만도 합니다. 그만큼 진품 같은 짝퉁이니까요. 하지만 선물하신 분도 참 재미있는 분이군요.”

“그, 그렇지요. 아주… 재미있는 놈, 아니, 분이지요.”

대꾸를 하는 등부형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사비강, 이 개자식…! 진짜로 죽여 버릴 거다!’

그의 눈가에 또 다른 의미의 이슬이 맺혀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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