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귀환 마교관
105화
탓, 쉬잇! 쉬이잇!
어두운 숲속을 그림자 하나가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흑천회주의 왼팔, 흑사귀였다.
그는 지금의 사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녀석이 나타나더니 흑천회를 단시간에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회주가 죽다니!
눈앞에서 죽어 버린 회주를 보고서도 믿기 힘들었다.
이름이 ‘가득삼’이라고 했던가?
개소리다.
자신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 정도로 고수라면 지금껏 몰랐을 리가 없다.
정도맹에서 작정하고 은밀히 지원하고 있는 고수가 아니라면.
분명 이름도 가명이리라.
‘제기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혈혈단신으로 서른 명을 상대하다니.
흑천회 무인 중 살아 남은 자는 자신 밖에 없었다.
그가 후퇴 명령을 내린 직후, 사비강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움직이면서 수하들을 일격에 죽여 버렸다.
사람이 저렇게도 강할 수가 있나 싶었다.
어디 가서 웬만하면 무공으로는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건만.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타났단 말인가?
숨이 점점 가빠졌다.
옆구리가 질척거린다.
부서진 검 파편에 맞은 부위에서 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지혈을 했지만, 경공을 써 가며 격하게 움직이니 다시 출혈이 시작됐다.
‘젠장!’
그가 막 나뭇가지를 박차는 순간.
툭, 우지끈!
나뭇가지가 맥없이 부러져 버렸다.
그와 함께 흑사귀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헛!’
얼른 경신법을 펼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옆구리의 뜨끈한 감각은 더욱 심해졌다.
정신없이 달려온 곳은 호숫가였다.
‘타고 갈 만한 것이…!’
주위를 황급히 살폈지만 특별히 보이는 건 없었다.
“젠장!”
몸이 멀쩡했다면 수상비(水上飛)를 펼쳐서라도 달려보겠건만, 지금 상태로는 무리였다.
마침 호숫가로 두 사람이 더 내려섰다.
사비강과 매설란이었다.
“크크. 제법 멀리 달아났군.”
사비강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흑사귀는 알고 있었다.
상대가 마음만 먹었다면 보다 일찍 자신을 추월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마치 배부른 채로 사냥을 즐기는 맹수처럼 그는 자신을 느긋하게 추격해 왔다.
가득삼이라고 밝힌 저 청년은 필시 초절정 이상의 고수다.
같은 초절정이더라도 그 단계에서는 종이 한 장 차이도 어마어마한 법이다.
게다가 자신은 부상까지 입었다.
승산은 희박했다.
“네놈들의 정체가 뭐냐!”
흑사귀가 버럭 소리쳤다.
사비강이 흑사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천천히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단 말이지? 그렇다면 뭐 죽기 전에 궁금증은 풀어 주지.”
말을 마친 그가 얼굴을 잡아 뜯기 시작했다.
인피면구가 뜯어지면서 가득삼의 얼굴이 사라지고 사비강의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역시…! 네놈은 가명을 사용한 거였구나!”
“뭐, 그렇게 됐다.”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고 저벅저벅 다가왔다.
흑사귀가 천천히 물러섰다.
“원하는 게 뭐냐?”
“네 목숨.”
“정도맹에서 온 놈들이냐?”
“글쎄. 그건 저승에서나 알아보든지.”
사비강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았다.
팟!
블링크 마법을 쓴 사비강이 눈 깜빡할 사이에 흑사귀 앞으로 이동했다.
흑사귀는 기분 나쁜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사람이 어찌 순식간에 이렇게 이동할 수 있단 말인가?
빨라서 놓친 것이 아니다.
자신 역시 초절정에 이른 고수다.
그 정도 차이를 모를 리가 없다.
이건 그냥 순간 이동이다.
“이런 바보 같은…!”
콰악!
사비강의 손이 흑사귀의 목을 움켜잡았다.
“크으… 꺼억!”
흑사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비강의 눈동자는 달빛만큼이나 차갑게 식어 있었다.
사비강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깔렸다.
“흑사귀. 지금까지 해온 짓은 말할 것도 없고, 너는 앞으로도 정사화합의 걸림돌이 될 놈이지. 거기에 부녀자를 겁간하고, 아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죽일 놈. 역시 살려 둘 가치가 없어.”
“끄으어어…!”
흑사귀는 죽어 가면서도 사비강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상대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 내심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침내 사비강이 싸늘하게 읊조렸다.
“가라.”
다음 순간.
화아아악!
“크아아아아악!”
뜨거운 불길이 갑자기 나타나면서 흑사귀의 전신을 화르륵, 태워 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비강의 손에 잡힌 채 한참이나 허우적거리던 흑사귀는 마침내 시커먼 잿더미가 되고서야 축 늘어지고 말았다.
플레어 마법이었다.
지금껏 지켜만 보던 매설란이 사비강 곁으로 다가왔다.
“이걸로 다 된 건가요?”
“아직.”
“그럼, 또 뭐가….”
사비강이 바닥에 떨어진 흑사귀의 검을 주워 들더니 느닷없이 등 뒤로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닌가?
쒜에에에엑!
검이 어둠을 가르며 쏜살 같이 날아갔다.
곧이어 숲속에서 둔탁하고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기척…!’
그제야 매설란도 숲속에서 흘러나온 기척을 감지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인해 상대의 기가 일순 흐트러진 것이리라.
아마도 부상을 입었으리라.
탓!
사비강이 얼른 바닥을 차고 날아갔다.
블링크 마법을 사용하면서 그의 몸은 다시 순식간에 숲속의 나뭇가지 위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사비강이 날렸던 검이 나무 기둥에 깊이 박혀 있었다.
검신에 묻은 혈흔으로 보아 상대에게 부상을 입힌 게 분명했다.
뒤늦게 도착한 매설란이 미간을 곱게 찡그렸다.
“놓쳐 버렸군요.”
“아니. 이걸로 이제 다 된 거야. 이만하면 밑밥은 충분하겠지.”
사비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
강호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해천문의 ‘가득삼’이라는 청년이 호투장이라는 비밀 도박장을 초토화 했다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호투장 주인이 흑천회주였으며, 흑천회는 혈사련 소속 단체였다는 사실까지 공공연하게 알려졌다.
광인이 된 흑천회주 갈천성이 마을 곳곳을 뛰어다니며 은밀한 부위를 흔들어대니 금방 그 정체가 탄로 났던 것이다.
무인들은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그 이야기로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듣자하니 흑천회주는 초절정 고수라는데… 도대체 ‘가득삼’이라는 청년은 뭘 어떻게 한 거지?”
“단지 호통을 쳤다는군. 반성하라고. 그 한 마디에 미쳐 버렸다더군.”
“에이, 이 사람아. 그게 말이 되는가?”
“말이 안 되도 사실일세. 어디 흑천회주 뿐인가? 그 동생이라는 패왕도 손짓 한 번에 죽여 버렸다더군!”
“손짓 한 번이라니. 정말 대단한 고수가 나타난 모양이야.”
“허참, 흑천회가 혈사련 소속 단체라던데. 알고 보면 혈사련도 별 것 없는 게 아닌가?”
“어이, 말조심하게. 그래도 혈사련은 무시할 단체가 아냐. 이 기세라면 앞으로는 혈사련이 사파를 대표하는 문파가 될 거야. 그 말은….”
“정사대전이 될 거란 소리군.”
“뭐, 어쨌거나 ‘가득삼’이라는 청년이 정파라고 하니, 혈사련으로서는 골칫거리가 하나 생긴 셈이지.”
그리고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아무런 표정도 없이 듣고 있는 자가 있었다.
이 층 난간 쪽에 자리 잡고 묵묵히 식사를 하는 노인.
희끗한 머리카락에 가지런한 수염,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형형한 눈동자와 당당한 풍채는 선풍도골의 위엄을 풍겼다.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열 손가락마다 뼈마디가 유난히 굵어서 다소 기이한 모습이라는 점이었다.
이는 그가 익힌 ‘귀살조공’이라는 무공 때문이었다.
그렇다.
그는 바로 혈사련의 주작, 악천괴였다.
식사를 마친 그가 물을 한 잔 들이켜는데, 마침 흑의 경장을 착용한 여인이 죽립을 눌러 쓰고 다가섰다.
“여유가 넘치시는군요.”
악천괴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꾸했다.
“앉으시게.”
죽립을 쓴 여인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제야 악천괴가 부드럽게 웃으며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바로 홍묘 서래향이었다.
“모든 일이 잘 돌아가고 있으니, 여유가 없을 까닭도 없지 않은가?”
서래향이 눈살을 구겼다.
“호투장 일을 들었을 텐데요?”
“그건 내 소관이 아니지.”
일순 악천괴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그 표정에는 틀림없는 질책과 힐난이 담겨 있었다.
서래향이 입술을 살짝 씹고는 말했다.
“충분히 주의를 주었어요. 흑천회주가 멋대로 나서는 바람에….”
“아랫사람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데 무얼 믿고 맡길 수 있겠나?”
“하지만 회주가 패왕이 죽고 나서는 전혀 말을 듣지 않아서….”
“구차한 변명일세. 아랫사람 관리가 제대로 안 되면 아랫도리로 관리해 볼 생각이라도 했어야지.”
악천괴가 엉큼한 시선으로 서래향의 몸을 훑었다.
서래향이 벌떡 일어났다.
“감히…!”
“아아, 흥분 가라앉히시게.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서니 그런 실수를 하는 게야.”
서래향이 어금니를 뿌득 갈면서도 더 이상 토를 달진 않았다.
악천괴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다.
흑천회주와는 격이 다르다.
특히 그는 흑룡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자다.
악천괴가 물 한 모금을 마신 다음 말을 이었다.
“자금 줄이 끊어진 것은 혈사련으로서 큰 타격일세.”
“…….”
“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 흑천회는 자네 소관이었으니까.”
“본론을 말씀하시죠.”
“뭐 지나친 걱정은 하지 말게. 다행히 우리 쪽에서 진행하는 일은 잘 되고 있으니. 당장 급한 자금은 칠성문을 통해서도 조달 받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텐데요.”
“그래서 지금도 열심히 일하는 중이라네. 아, 잠시.”
악천괴가 문득 손을 들어 올리고는 의식을 집중했다.
누군가에게서 전음을 전달 받는 중인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곧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방금 소식이 들어왔군. 황하물상(黃河物商)을 우리 쪽에서 접수했다는군. 뭐, 이 정도면 충분히 흑천회를 대체할 만하지.”
“황하물상을?”
서래향의 표정이 흔들렸다.
황하물상은 황하를 중심으로 교역하는 상인들로 구성된 단체였다.
강호 십대 상단에 속하는 곳이었는데, 정도맹이 중원을 다스리는 동안에도 독자적인 행보를 유지했던 곳 중 하나였다.
그런 황하물상을 손에 넣었다는 건 확실히 대단한 성과였다.
‘과연 흑룡께서 총애하실 만하군.’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만 했다.
그가 나서면 무엇이든 빠른 진척을 보인다.
마침 난간 밖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뛰어놀고 있었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아이들은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마을을 어슬렁거리던 파락호 패거리와 몸을 부딪치고 만 것이다.
패거리는 아이들을 윽박지르고는 코 묻은 돈을 뜯어내며 히죽거렸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서래향이 악천괴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수로 그들을 접수한 거죠?”
악천괴는 저만치 눈물을 훔치며 떠나는 아이들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간의 본능 중에서 가장 빠르면서도 충실히 반응하는 게 바로 ‘공포’라네.”
퓨퓽, 퓽!
순간 악천괴가 손가락을 빠르게 튕겼다.
세 줄기의 지풍이 날아갔다.
잠시 후, 관도 복판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솟구쳤다.
조금 전의 파락호 세 명이 갑자기 쓰러져 죽어 버린 것이다.
그들을 죽인 사람이 ‘악천괴’라는 것을 서래향은 바로 알아챘다.
그녀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하여튼 이해할 수 없는 자.’
어떨 때는 여인과 아이마저도 잔인하게 찢어 죽이면서, 지금 같은 경우는 또 아이들의 복수를 하지 않나?
아니다.
틀렸다.
그는 아이들의 복수를 한 게 아니다.
그저 저 파락호들의 행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리라.
먹이사슬의 아래쪽에 위치한 저들이 분수도 모르고 저지르는 행동에 그저 기분이 나빠졌을 뿐이리라.
그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였다.
악천괴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보았다.
“자아, 자네의 고민을 내가 해결해준 셈이군. 이제 자네는 내게 무얼 해줄 텐가?”
그의 음흉한 시선이 서래향의 몸을 한 차례 훑었다.
“나는 이미 흑룡을….”
“혹시나 해서 말인데. 련주께서 자네를 어찌 생각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네.”
서래향이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흑천회주에게 말했던 ‘흑룡의 여자’라는 말은 통하지 않으리라.
련주가 자신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악천괴도 알고 있는 것이다.
곧 서래향의 입가에 색기 서린 미소가 피어올랐다.
“원하는 걸 드리죠.”
“좋네, 좋아.”
“대신 하나만 더 부탁할게요.”
“으음, 뭔가?”
“사람을 좀 찾고 싶어요.”
“누군지 알만 하군.”
“그래요. 그자에 대해 알아봐 주세요.”
“하나, 해천문의 ‘가득삼’이라는 것을 그대로 믿을 수는….”
“그의 진짜 얼굴을 알고 있어요. 인피면구 안에 숨어 있던 얼굴. 그 남자만 집중해서 보았으니까 또렷하게 기억하죠.”
“그렇다면 할 만하겠군.”
악천괴의 대꾸에 서래향이 싸늘한 미소를 그렸다.
그날 밤, 그가 날린 칼날에 스쳤던 어깨의 상처가 유난히 쓰려 왔다.
‘반드시 찾아내 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