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80화 (80/670)

# 80

귀환 마교관

80화

“흠, 죽이진 못한 건가?”

활을 거둔 언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마지막 화살이 천세명의 급소를 뚫지 못한 기분이 든다.

‘죽이진 못했겠어.’

생각보다 천세명의 경공술이 빨랐다.

중상은 입혔겠으나, 목숨은 붙어 있으리라.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뭐, 상관없다.

천세명이 그리 중요한 인물은 아니니까.

언벽은 시선을 내려 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올라선 나무 아래로 백의의 수위무사들이 잔뜩 쓰러져 있었다.

그들이 착용한 하얀 무복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당연히 살아 움직이는 자는 없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고 암벽 쪽을 바라보았다.

‘꼴에 정파라고… 쯧쯧.’

자신도 정파에 몸담고 있었지만, 정파라고 소리치는 인간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언행불일치를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천세명만큼은 혈사련으로 돌려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공만 정파에서 익혔을 뿐, 그의 행실은 사파의 삼류 무사만도 못했으니까.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가?’

이해 못할 일이다.

그렇게 약아빠진 짓은 다 하면서, 자신이 배신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비분강개하며 덤벼들다니.

‘결국 사람은 관성으로 움직이는 것인가?’

아마 그럴 거다.

필시 천세명은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라는 걸 멈췄으리라.

그저 평화에 찌들어 살면서 세월이 흘러가는 대로 생을 이어갔을 뿐이리라.

멍청한 짓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나저나 내 이름을 말했을까? 내가 배신자라고….’

언벽은 먼발치 암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제 해가 완전히 저물어 그곳의 지형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다.

하긴, 자신의 이름을 말하면 어떻고, 그렇지 않으면 어떤가?

어차피 오늘부로 ‘언벽’이란 이름은 버렸다.

“이제부터 내 이름은 언마(彦魔)다. 킬킬킬.”

그렇게 농을 하듯 혼자 중얼거리고는 웃어 버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마만인가?

이 두근거림은.

과거 마교의 잔챙이들을 휩쓸고 다닐 때, 딱 이런 느낌을 받았다.

적을 향해 화살을 날릴 때, 그 화살이 상대의 두개골을 박살내거나 심장을 꿰뚫을 때.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 후 평화가 계속되자 더 이상의 설렘은 사라졌다.

하루하루 지겨운 나날들.

그러던 어느 날 깨달았다.

자신은 평화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님을.

살육 그 자체에서 희열을 느꼈음을.

목숨을 걸 정도의 치열함 속에서만 자신의 삶이 빛난다는 것을!

‘흐음. 사비강과 상필지라….’

당장 가서 그들을 제거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사비강은 그럭저럭 처리할 수 있더라도, 초절정에 다다른 상필지만큼은 쉽지 않다.

게다가 매설란과 당이협까지 가세한다면….

‘혼자서는 무리지.’

곧 깨끗하게 단념했다.

해가 저물었으니, 처음의 계획대로 접선 장소로 가는 것이 낫겠다.

사비강과 상필지가 이쪽의 음모가 시작됐다는 것을 알아챘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나?

고작 연습용 병장기를 든 생도들을 데리고.

반면 이쪽은 흑살대가 있다.

흑살대원 하나하나가 최소한 부교관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흑살대주 조량과 흑호, 그리고 자신이 있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리라.

‘흐흐흐. 학장, 당신은 저 또라이 교관 녀석 말을 들었어야 했소.’

언벽이 용천관 쪽을 힐끔 보았다.

지금쯤 용천관도 한바탕 난리가 나고 있으리라.

사실 사비강이 본회의에서 조직대항전을 취소해 달라고 건의했을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일을 꾸미기 위해서 얼마나 기다렸던가?

하지만 멍청한 천세명은 사비강의 말이라면 우선 반대하고 보는 위인이었다.

반대를 위한 반대.

때문에 언벽은 일부러 넌지시 사비강 편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천세명이 더욱 발끈하며 계획대로 조직대항전을 치르자고 밀어붙였다.

‘뭐, 수위무사들의 복색이 바뀌었다는 걸 알았을 땐 좀 놀라긴 했지만.’

그러나 작은 어긋남으로 계획 전체가 틀어지진 않는다.

흑살대는 그 정도로 흔들릴 조직이 아니다.

“오랜만에 즐겨 보자고. 후후.”

언벽이 품에서 붉은 뱀 가면을 꺼내더니 얼굴에 덮어썼다.

그러고는 나뭇가지를 박차고 어디론가 쏘아지듯 날아갔다.

**

“이건… 너무 심하군요.”

염자량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숲속 곳곳에 처참하게 도륙당한 수위무사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대처를 잘못한 거다.”

사비강의 말에 생도들이 돌아보았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 표정이다.

“적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데 반해 수위무사들은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지. 그러니 힘이 분산될 수밖에.”

“사파의 습격이 있을 거라는 걸 알리셨잖아요?”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판단했겠지.”

오랜 시간 평화에 찌들어 있었다.

감을 잃었거나, 적을 얕잡아 보았거나.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 반대가 될 거다.”

“무슨 뜻입니까?”

“놈들이 분산될 거고, 우린 뭉쳐서 친다. 저놈들은 너희들이 연습용 병장기나 들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필시 방심하고 있을 거다.”

생도들의 표정에 희망이 떠올랐다.

매설란이 불쑥 물었다.

“왜 정도맹을 치지 않고 이런 곳을 노렸을까요?”

“명문 정파들이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거지. 분열을 일으키도록. 애지중지하는 자식이 죽으면 누구라도 눈이 뒤집힐 테니까. 다들 복수를 하겠다며 나설 테고, 정도맹의 통제는 제대로 먹히지 않을 거야. 결국 가장 결집해야 할 시기에 분열이 일어날 거고.”

“정말 비열한 놈들이군요.”

“크크크. 효율성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비열해. 그걸 얼마나 속으로 감추느냐, 드러내느냐의 차이일 뿐.”

매설란이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왠지 그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기에.

사비강이 지도를 펼쳐 보이며 한 곳을 짚었다.

“일단 우린 이곳으로 먼저 간다. 여기에 다섯 명이 있을 거다.”

“교관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그야 이미 겪어 본 일이니까.’

염자량의 질문에 사비강이 속생각을 삼키며 대꾸했다.

“지금쯤 놈들은 수위무사들을 어느 정도 정리했을 거다. 아마 눈에 띄는 생도들도 꽤나 처리했을 테지. 이제는 연무장으로 가는 길목을 막으려고 할 거다. 즉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에 인력을 분산 배치해 두었을 거다. 이곳도 바로 그런 곳 중 하나다.”

염자량도 더는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강이 생도들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자, 이번엔 실전이다. 다들 정신 바짝 차려라. 첫 임무는 단리정과 조문탁 그리고 목단화가 주축이 된다.”

“알겠습니다.”

“놈들은 위급하다고 판단되면 신호탄을 쓸 거다. 그러니 그럴 겨를도 없이 빠르게 처리하는 게 중요하다.”

“예!”

생도들이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좋아, 최대한 이 기회를 이용해서 실전 경험을 쌓게 해주마.’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는 매설란은 내심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 어쩜 저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지….’

문득 사비강과 대화를 나누었던 지난밤이 떠올랐다.

**

“생도들이 직접 싸우게 만들겠다고요?”

“그래.”

사비강의 표정은 단호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예요? 그 사파 놈들은 고수들로 이루어져있다면서요!”

“그랬지. 아마 그쪽 접선자가 죽었으니 더 보충했을 거야.”

“그럼, 더욱 피해야죠!”

“그래도 이 방법이 가장 안전해.”

“차라리 일부러 사망 판정을 받으면 어때요? 시작하자마자 다 자결해 버리거나. 그럼, 북소리가 세 번 울리기 전에 용자림에서 빠져나오게 될 테니까….”

“그럼, 다른 생도들은?”

“그건… 그럼 다시 당신만 수위무사로 들어가면….”

“그래서 어느 세월에 생도들을 전부 찾아내겠어?”

“당 대협도 있잖아요? 당 대협에게 미리 생도들을 모아 두라고….”

“후후후. 사파의 위협이 있을 거라는 경고에도 행사를 강행하는 정파 어르신들이야. 한데 대회 도중 갑자기 생도들을 소집하라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단언컨대 사달이 일어나기 전에는 절대로 꿈쩍도 하지 않을 걸?”

“그렇지만 생도들에게 직접 싸우게 하다니…. 너무 위험해요.”

“그럼, 매 소저가 그 녀석들을 지켜줄 거야? 내가 그 녀석들과 싸우는 동안?”

“그것도 위험해요. 저 혼자서 특목반을 모두 책임지는 건.”

“그러니까 차라리 내가 있는 곳에서 그놈들도 싸우게 하는 게 나아. 실전 경험도 될 테고.”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강호가 원래 그런 곳 아닌가? 발만 삐끗해도…. 아니지, 혀만 잘못 놀려도 죽을 수 있는 곳.”

“하지만 아직 다 배우지도 못한 아이들을….”

“누구도 그 녀석들이 완벽히 배울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아.”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없어. 내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몰라도 이 방법이 최선이야.”

“아마 머리가 나빠서 그런 걸 거예요.”

매설란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너무 걱정 마. 특목반 녀석들을 사자 새끼로 키울 테니까. 한 번쯤은 절벽으로 떨어뜨려 볼 필요가 있어.”

“그러다가 영영 다시 오르지 못할까 봐 걱정이죠.”

“그럼 어쩔 수 없지. 그건 그 녀석의 운명이니.”

“냉정하시네요.”

“세상이 원래 그러니까.”

사비강이 쓴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자신이 겪은 세상은 냉정하다 못해 무정했다.

세상이 그렇다.

그러니 거기에 맞서 싸우려면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설란.”

매설란이 움찔거리고는 사비강을 보았다.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기에.

사비강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 채 말했다.

“난 그 녀석들을 강하게 키울 거야.”

그러기 위해서 이 위기를 성장의 기회로 삼으리라.

“무리하는 게 아닐까 봐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걱정 마. 내가 있는 한, 그 녀석들은 절대 안전하니까. 후후.”

‘도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매설란은 입을 딱 벌리면서도 왠지 그라면 정말 생도들을 지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적의 습격을 실전 경험의 무대로 만들겠다니.

‘어쩌면… 이 남자, 정말 말도 못하게 강한 거 아냐?’

**

흔들흔들.

흔들흔들.

높게 치솟은 나뭇가지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나뭇가지 위에는 한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단리정이었다.

팽팽하게 잡아당긴 시위.

‘이 감촉… 좋다.’

손가락에는 두 개의 화살을 걸고 있다.

이제야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기분이다.

그동안 위력이 약한 연습용 활을 사용하느라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교관님이 기회는 단 한 번뿐이라고 했다.

여기서 볼 때 북극성이 떠 있는 곳 바로 아래.

그 즈음 어딘가에 적들이 있을 거라고 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어.’

녀석들이 신호탄을 던져 올려서는 안 되기에.

그전에 모든 일이 깔끔하게 마무리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첫 단추를 꿰어야 할 자신의 임무가 가장 중요하다.

흔들. 흔들.

예전 같았으면 벌써 팔이 저려 왔으리라.

하지만 지옥 훈련을 겪은 후로는 시위를 당긴 채로 반 시진 정도는 거뜬히 견딜 것만 같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스팟!

순간 저만치 아래에서 불빛이 번쩍이더니 곧게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저게 뭐지?’

하지만 의문도 잠깐.

집중해야 한다!

저게 바로 교관님이 말한 그것이리라.

“한 순간 빛이 보일 거다. 그때가 유일한 기회다.”

사비강의 말을 떠올리며 단리정은 모든 정신을 화살촉 끝에 집중했다.

마침내 빛의 구가 멈춘 그곳!

단리정의 눈이 커졌다.

‘보였다!’

패애앵!

시위를 떠난 두 자루의 화살이 순식간에 어둠속으로 파묻혀 갔다.

쒸엑! 쒸에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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