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귀환 마교관
61화
손이 덜덜 떨리면서 찻잔이 조금씩 올라갔다.
하지만 이미 잔에 담긴 찻물은 이리저리 출렁거리며 절반 이상이나 바닥에 쏟아졌다.
“이익…!”
마침내 잇새로 기합성이 새어 나왔다.
은기륭이 부드럽게 웃었다.
“허허, 다도를 하면서 그런 소리를 내서는 곤란하다.”
“죄, 죄송…!”
여영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겨우 잔을 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입으로 가져가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팔은 미친 듯이 떨렸고, 찻물은 이제 거의 바닥을 드러낼 만큼 쏟아져버렸다.
이래서야 입으로 가져간다고 한들 마실 찻물도 없었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휙!
갑자기 팔이 솟구쳤다.
‘헉!’
깜짝 놀란 여영이 얼른 고개를 젖혔다.
하마터면 찻잔을 든 손으로 자기 얼굴을 때릴 뻔했다.
졸지에 손을 쭉 뻗어 올린 여영은 얼른 민망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 잡았다.
자칫 찻잔을 놓쳐 천장에 부딪칠 뻔했다.
“헉, 헉, 헉.”
거칠게 숨을 내쉬자 은기륭이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찻잔을 채워 주었다.
또로로롱.
“들어라.”
여영은 다시 굳은 표정으로 찻잔을 잡았다.
‘이번에야말로!’
그러나 또 마찬가지.
어마어마한 압력에 대항할 방법이 없다.
드드드드드…!
표정은 일그러지고, 팔은 다시 부들부들 떨렸다.
“영아는 다도를 모르는구나.”
“하지만… 이건…!”
“왜 그러느냐? 사 교관은 이보다 더한 압력 속에서도 잘 마셨느니라.”
‘이보다 더한…? 거짓말!’
“그는 팔을 떨지도, 기합을 내지르지도, 인상을 쓰지도 않았다. 무척 즐겁게 담소를 나누지 않았더냐?”
“그, 그런…!”
“영아는 나와의 다도가 즐겁지 않느냐?”
“그, 그럴 리가…!”
은기륭의 말에 더욱 약이 오르자, 여영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기 시작했다.
찰나.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여영이 쥔 찻잔이 부서져 나갔다.
“헉, 헉, 헉!”
여영이 무릎을 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힘이 지나쳤다.
한데 사비강은 이보다 더한 압박 속에서 그렇게 태연히도 차를 마셨단 말인가?
단순히 압박만 가해진 게 아니다.
그때그때 변하는 공력의 세기에 따라 적절하게 맞서지 않으면 찻잔을 든 손이 춤을 추리라.
조금 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한데도 사비강은 시종 평온했다.
도대체 그 남자의 정체는 뭐지?
그녀의 귓가에 은기륭의 목소리가 닿았다.
“쯧쯧, 찻잔을 부수다니. 나와 차를 마시는 것이 그토록 싫었던 것이냐?”
“관주님. 정말 너무하세요.”
여영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은기륭이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알겠느냐? 그는 이미 나를 넘어섰다.”
“… 예.”
여영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일로 가득하니, 이 세상은 그만큼 다채롭고 살만한 것 아니겠느냐?”
창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은기륭의 목소리가 여영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
‘틀렸소, 영감. 이 세상은 예측 밖의 일이 지나치게 많아서 삶이 고달픈 거요.’
사비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혹시나 뜻밖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은기륭과 여영의 대화를 먼 곳에서 ‘스틸 사운드(Steal sound)’라는 마법으로 엿들었다.
하지만 역시 별 정보가 없었다.
달라진 미래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지만, 아직은 학관에서도 파악된 것이 별로 없는 듯했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라….’
사실 그것만큼 짜증나는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번 춘향제를 노리는 그놈들에게는 무척 짜증나는 일이리라.
연무기행에 맞춰 계획한 일들이 모두 틀어졌을 테고, 한 달 뒤에 계획한 일을 갑자기 앞당겨야 할 테니.
‘아마 지금쯤 어디선가 은밀한 회동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사비강의 그러한 짐작대로 멀리 떨어진 어느 숲속에서는 은밀한 회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
어느 숲속 깊은 곳.
버려진 사당.
오래전부터 관리가 되지 않은 그곳은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었고, 한때 사당을 장식했던 도구들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폐쇄된 사당 안쪽에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검은 장포를 걸치고 흑립을 깊이 눌러 쓴 모습이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두 사람 모두 면구를 쓰고 있었는데, 한 명은 토끼 모양의 탈이었고, 다른 한 명은 검은색 범탈을 쓰고 있었다.
범탈을 쓴 자가 가만히 읊조렸다.
“녹우(綠牛)가 좀 늦는군요.”
“좀 더 기다려 봅시다.”
하얀 토끼 탈을 쓴 백토(白兎)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범탈을 쓴 흑호(黑虎)도 더 이상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마침내 백토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왔군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당 문이 열리면서 한 인영이 들어섰다.
녹색 소의 탈을 쓴 자였다.
“후우, 후우, 후우.”
호흡이 아직은 거친 것으로 보아 급히 달려온 모양이었다.
흑호가 다가가 물었다.
“이제 오셨군. 어찌 됐소? 적사(赤蛇)는 만나보셨소?”
소 탈을 쓴 녹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춘향제가 한 달 앞당겨진 것은 사실이었소.”
“설마 그들이 뭔가를 눈치 채고…?”
“그건 아닌 것 같소. 다만 용천관 내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던 것 같소.”
“문제라면?”
“큰일은 아닌 듯하나, 어디로 튈지 모를 교관 하나가 들어왔다고….”
“흐음. 고작 교관 하나 때문에 그 난리라니. 용천관이 예전의 명성을 잃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좀 심하군.”
흑호가 중얼거리자, 이번엔 녹우가 질문했다.
“준비는 끝났소?”
“물론이오. 정확히 스무 명이 대기 상태요.”
“좋소. 적사의 말에 의하면 춘향제에서 조직 대항전을 숲속에서 치른다고 하니, 그때가 적절할 것 같소.”
“알겠소, 준비하지.”
흑호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백토가 넌지시 나섰다.
“한데… 무슨 문제라도 있었소?”
“무슨 뜻인지?”
녹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토의 눈길이 그의 소매로 향했다.
소매 끝이 미세하게 갈라져 있었다.
뭔가에 베인 것이다.
백토의 시선을 눈치 챈 녹우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아, 별 일 아니오. 오던 중 정도맹의 조무래기 하나와 맞닥뜨렸지만 잘 처리했소.”
“다행이구려.”
백토의 말이 끝나자, 흑호가 다시 물었다.
“조직 대항전은 정확히 언제 치르는 거요?”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소. 다만, 행사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만큼 마지막 날에 가까울 거요.”
“그렇군.”
녹우의 대답에 흑호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백토가 한 걸음 다가오며 손을 내밀었다.
“수고 많으셨소, 녹우!”
“별 말씀을.”
녹우가 그의 손을 맞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쒜에에엑!
푹!
“커억! 컥!”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
하얀 토끼 탈에 붉은 피가 튀었다.
백토의 손에 들린 단검이 어느새 녹우의 목에 틀어박힌 것.
갑작스러운 상황에 흑호 역시 놀라서 주춤 물러섰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면구에 가려져 있었지만, 들리는 목소리만 감안해도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풀썩!
녹우는 그렇게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백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보았다.
“보지 않았습니까? 소매가 갈라진 것을.”
“하지만 그건 대수롭지 않은….”
“아주 작은 균열에서 커다란 틈이 생기는 법이지요. 미리 땜질을 하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끄음.”
흑호가 신음처럼 소리를 흘렸다.
백토는 단검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내고는 흑호를 보았다.
“시체와 이곳 정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알, 알겠소.”
흑호가 가슴을 진정시키며 대꾸했다.
백토가 뒷짐을 진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럼, 나는 이만.”
그가 사당 밖으로 걸어가자, 흑호는 품에서 화골산(化骨散)을 꺼내 시체에 뿌렸다.
치이이익.
곧 시체가 타들어 가는 소리를 내며 녹아들기 시작했다.
**
샤샷! 샤샤샷!
조문탁은 그야말로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움직였다.
‘이번에야 말로.’
그는 손에 들린 붓을 손으로 꼭 말아 쥐었다.
오늘만큼은 절대로 능소소의 몸에 점을 찍으리라 다짐하면서.
전략을 바꿨다.
연무기행을 하는 동안 능소소의 몸에 점을 찍는 것은 끝내 실패했다.
하지만 사비강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같은 임무를 주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점을 찍기 전에 능소소가 눈치를 채면 끝이다.
우격다짐으로 찍는 건 반칙이다.
‘과연 어떻게 하면 능소소 몰래 다가갈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하고 시도했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능소소에게 은밀함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
바로 쾌속이다.
즉 은신술보다는 경공술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눈치 챘다는 것을 표현하기 전에 찍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역시 잠복밖엔 없지!’
내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문탁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최고의 살수가 될 만한 조건을 점점 갖춰 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쨌거나 조문탁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꼬박 반나절을 보냈다.
배가 고파도 먹지 않았으며, 소변이 마려워도 참았다.
그야말로 살수의 대가처럼 행동했다.
물론, 그는 그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해가 저물녘, 능소소는 그가 은신한 나무 아래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 능소소를 살피며 그녀의 동선을 얼마나 많이 파악했던가?
사비강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실행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철저한 준비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조문탁은 최대한 기를 갈무리하며 자신의 존재를 지워 갔다.
공기가 되어 간다.
아니, 공기는 안 되겠다.
능소소는 걸핏하면 바람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자신의 기척을 눈치 채지 않았나?
바람 보다는 나무가 되는 게 낫겠다.
그게 그거 같겠지만, 실제로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서 은신의 형태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그리고 무공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그 미묘한 차이가 큰 결과의 차이를 만든다.
자박자박.
능소소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걸어왔다.
그녀는 늘 그랬다.
특별히 자신을 의식해서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귀신 같이 눈치를 채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무가 됐다.
그리고 능소소가 나무 아래를 지나치는 찰나.
슈우우우웃!
조문탁이 허공을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역시나 능소소는 느꼈다.
흠칫 거린 그녀가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머리 위라는 건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다.
아니, 생각했으나 늦었다.
이미 조문탁이 바로 위까지 떨어져 내렸다.
‘됐어!’
조문탁이 얼른 붓을 내질렀다.
그런데….
후우우웅!
“엇?”
강한 바람줄기가 불어 닥치는 게 아닌가?
조문탁의 몸이 휙 뒤집히며 능소소 바로 옆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콰당!
“으야얏!”
“앗, 문탁아?”
조문탁이 엉덩이를 문지르며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제기랄! 바로 앞에서 찍지 못하다니! 도대체 그 바람은 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