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귀환 마교관
62화
능소소가 얼른 조문탁에게 다가와 부축했다.
“괜찮니?”
“으윽, 괜찮아.”
“많이 놀랐지?”
“뭐, 좀….”
가만, 좀 이상하지 않나?
놀라야 하는 건 능소소가 아닌가?
뭐, 갑자기 불어 닥친 바람 때문에 좀 놀라긴 했지만, 그게 어디 능소소 탓인가?
이래서야 마치 능소소가 바람을 고의로 불러일으킨 것처럼 말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더 깊어지기도 전에 능소소가 웃었다.
“그래도 정말 대단해. 지금까지 여기서 내가 지나가길 기다렸던 거야?”
“뭐, 그랬지.”
“대단하다. 얼마나 기다린 거니?”
“반나절.”
“정말 고생했겠다. 그런데 어쩌지? 실패했잖아.”
능소소가 진심으로 미안한 듯 말했다.
하지만 조문탁이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넌 붓으로 점을… 앗!”
그제야 능소소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다.
팔과 어깨, 다리, 옆구리 등.
온통 먹물로 찍힌 점투성이가 아닌가?
“치사해!”
“헤헤. 은신의 기본은 완벽하게 숨는 게 아니라, 완벽하게 속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비강 교관님이 해주신 말씀이지.”
“그런…!”
“이미 내 목적을 아는 이상 네가 한순간도 방심하지 말았어야지. 이걸로 드디어 나의 승리야.”
“피, 어쩔 수 없네.”
능소소가 피식 웃으며 인정하고 말았다.
평소라면 조문탁이 근처만 다가와도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또는 그의 손에 들린 붓을 잔뜩 의식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감쪽같이 속았다.
정령을 다룰 수 있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괜히 더 예민했던 탓이다.
“진정한 고수는 환경이 아무리 변해도 마음의 중심이 호수처럼 고요한 자다. 그러니 작은 변화에 놀라지 말고 언제나 정신을 다스리는 것에 집중해라.”
정령과 계약을 맺고 나서 사비강이 해주었던 말이다.
‘그게 이런 뜻이구나.’
달라진 환경을 신경 쓰다 보니 정작 본인의 안위를 생각하지 못했다.
조문탁은 그 빈틈을 노린 것이다.
두 사람이 그렇게 웃고 떠들고 있을 때였다.
“오오, 뜨겁구만. 뜨거워. 역시 특목반 따라지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불쑥 들린 목소리.
고개를 돌려 보니, 비룡반 상초진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곁에는 이비겸과 황기, 예설영도 함께 있었다.
즉 비룡반 우등생들이 모두 모인 셈.
조문탁이 싸늘한 표정으로 상초진을 노려보았다.
“괜한 시비 걸지 말고 가던 길 가.”
“아이고, 무서워라. 얘들아, 들었어? 다른 반에 있을 땐 심부름이나 하던 녀석이 이젠 우리한테 명령질을 하네?”
상초진이 헤실헤실 웃어댔다.
조문탁이 저도 모르게 능소소를 등 뒤로 돌려 세웠다.
“이여, 멋진데? 내 여자는 내가 지킨다! 뭐 그런 거야?”
이쯤 되자 능소소도 발끈해서 나섰다.
“지금 뭐하는 거죠? 유치해.”
“음? 그쪽은….”
“능소소예요.”
“아, 능 소저. 듣기론 회비를 납부하지 못해서 연무기행 때 말똥이나 치우셨다고….”
모멸감을 느낀 능소소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때였다.
“너희들 여기서 뭐해?”
귀에 익은 목소리.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연우경이었다.
그를 알아본 상초진이 박수를 짝 쳤다.
“오, 이게 누구신가? 특목반 대장 아니신가?”
“뭔 헛소리냐?”
“와우, 찬바람이 쌩쌩 부는군.”
연우경이 상초진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조문탁과 능소소에게 말했다.
“교관님이 찾으신다. 모두 집합하래.”
“이봐. 지금 얘기 중이잖아. 이대로 가면….”
“어쩌라고? 교관님이 부르신다고 했다. 아니면, 네가 직접 우리 교관님과 얘기할 거냐?”
“뭐? 가만. 방금 우리 교관님이라고 했어? 와우, 교관 길들이기로 유명한 그 연우경이 ‘우리 교관님’이란다. 큭큭큭.”
연우경이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상초진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툭 뱉었다.
“하긴, 집안 배경만 믿고 설치는 애들은 원래 변덕이 심한 법이니까.”
차앙!
순간 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검이 뽑혀 나왔다.
연우경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더 나불거려 봐라.”
“이거 살벌하구만. 내가 틀린 말을 했나?”
피식 웃는 상초진이 허리 쪽으로 손을 돌릴 때.
쉬이이이잇!
한 줄기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어느새 조문탁이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이건 또 뭔…!’
상초진이 눈을 부릅뜨고는 얼른 일장을 뻗자, 조문탁과 손바닥이 마주쳤다.
퍼벅!
둔탁한 소리에 이어 상초진과 조문탁이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상초진의 눈이 날카롭게 찢어졌다.
“뭐하는 짓이냐?”
“너야말로. 이런 걸 왜 뽑아 들고 있지?”
어느새 조문탁의 손에는 날카로운 침이 들려 있었다.
상초진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저놈이 어느새…!’
물론 저 침을 이용해서 살공(殺攻)을 펼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적당히 겁만 줄 생각이었다.
자신의 특기인 경공을 이용해서 재빨리 연우경을 제압해 보일 속셈이었다.
한데 조문탁이 귀신 같이 눈치를 채고는 침을 채간 것이다.
‘저 녀석이 원래 저렇게 빨랐던가?’
경공이라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본 조문탁의 경공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놀란 것은 연우경도 마찬가지였다.
‘조문탁이 원래 이렇게 빨랐나?’
한편 조문탁이 끼어들자, 지금껏 가만히 있던 이비겸이 도를 뽑아 들었다.
스르르릉.
그 곁에 선 황기와 예설영 역시 위협적으로 한 걸음씩 나섰다.
연우경이 싸늘하게 웃었다.
“춘향제가 시작되기도 전에 한판 치르고 싶은가?”
그러자 덩치 큰 황기가 커다란 도를 바닥에 쿵! 찍었다.
“연우경. 집안 배경만 믿고 너무 설치지 마라. 난 너 같은 것들이 딱 밥맛 떨어져.”
“후후후. 난 오늘 여기서 단 한 번도 집안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어.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는 건 네 집안이 거지같아서 열등의식을 느끼는 거냐?”
“이 개망나니 같은 새끼가…!”
황기가 노호성을 지르며 도를 한껏 치켜들었다.
연우경 역시 일순 검기까지 일으키며 오른발을 뒤로 뺐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이야, 이거 볼만한데?”
불쑥 들린 목소리.
연우경과 황기가 멈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모든 생도들이 고개를 돌렸다.
서너 장 정도 떨어진 바위 위에 한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서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사비강이었다.
“어, 인사는 생략해도 된다.”
“교관…?”
쉬이이잇! 딱!
육포 조각이 비수처럼 날아들더니 황기의 이마를 딱 때렸다.
“큭!”
고작 육포에 불과한데도 황기의 이마가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녀석아, 교관님이다. 교관‘님’! 말 꼬리를 어디 가서 팔아먹고 온 거냐?”
“이익…! 거기서 뭐하는 겁니까?”
황기가 이마를 문지르며 버럭 소리쳤다.
“뭐하긴? 싸움 구경하지.”
사비강이 히죽 웃자, 생도들이 얼이 나간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게… 교관이야? 듣던 대로 괴짜로군.’
그렇다고 교관이 지켜보는 앞에서 정말 싸움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쳇!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좋을 대로.”
황기가 칼을 거두자, 연우경 역시 검을 갈무리했다.
사비강이 아쉬운 투로 말했다.
“뭐야? 벌써 끝난 거야? 야, 뚱땡이! 설마 저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한테 쫄아 버린 거냐?”
‘이익…! 누가 뚱땡이라는 거야!’
‘누가 기생오라비라는 거야!’
황기와 연우경이 각각 속으로 이를 갈며 사비강을 노려보았다.
사비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쳇, 별거 없구만. 싱겁게.”
사비강이 투덜거리며 걸어가려는데.
“흥! 두고 보십시오! 이번 춘향제에서 특목반이 왜 모자란 것들이란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보여드릴 테니. 흐흐.”
상초진의 말에 사비강이 우뚝 멈췄다.
다음 순간.
‘헛?’
상초진은 물론, 그 자리의 모든 생도들이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다.
분명 저만치 떨어져 있던 사비강이 눈 깜빡할 사이에 상초진 코앞에 다가선 것.
사실 블링크 마법이었지만, 그런 걸 알 리 없는 생도들은 그저 괴이한 경신법이라고만 여겼다.
사비강의 얼굴에 그늘이 잔뜩 졌다.
그는 귀신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탁한 웃음을 흘렸다.
“크크크. 아아주 기대하마. 아아주. 잔뜩 기대하마. 부디 보여 다오.”
“그, 그러…지요.”
상초진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비강이 그의 어깨를 툭 치더니 저만큼 걸어가 버렸다.
‘뭐야? 저 교관은…!’
상초진이 내심 투덜거리는데, 연우경이 싸늘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증명이라… 그렇게 무시하던 우리 반에 개박살 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생각보다 특목반은 정말 특별할지도 모르거든.”
말을 마친 그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조문탁과 능소소도 얼른 사비강의 뒤를 쫓아갔다.
“저 새끼… 뭐야? 정말로 그 괴짜 교관한테 물든 건가?”
상초진이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한쪽에 가만히 서 있던 이비겸이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개박살이라… 후후. 재미있군. 집안만 믿고 설치는 연 공자가 우리를 얼마나 민망하게 할지 두고 보지.”
**
“실망이 몹시 크오.”
천세명의 표정은 시종 딱딱했다.
그럼에도 매설란은 무덤덤했다.
이미 예상한 상황이다.
연무기행에서 임무 실패를 직감한 후부터 그의 비난은 각오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난 매 여협을 믿을 수가 없소.”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무엇이오?”
“어째서 사비강 교관을 그리 미워하시는 건가요?”
“그야 당연히…!”
‘하찮은 미꾸라지 같은 녀석이 학관의 물을 온통 흐리며 설치니까!’
라고 소리치려던 말이 목구멍으로 쑥 넘어갔다.
본심을 곧이곧대로 들어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교관들의 세계다.
“학관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그렇소. 실제로 그의 무공이 의심스럽기도 하거니와.”
“하나, 그가 마공을 익힌 게 아니라는 건 이미 드러나지 않았던가요?”
“물론, 그렇긴 하오. 가만, 지금 매 교관은 도대체 누굴 편드는 거요?”
“이게 편을 들고 말고의 문제인가요? 저는 그저 이유가 궁금할 뿐이에요.”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오.”
“아뇨, 이젠 중요해졌어요. 처음엔 저도 사비강 교관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천 부장님 말씀대로 생도들에게 혼란을 주고, 올바르지 못한 길로 인도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결과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죠.”
“해서 지금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거요?”
천세명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매설란은 시종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제 임무는 생도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거랍니다. 그게 교관으로서 지녀야 할 첫 번째 사명이지요.”
“매 교관!”
“왜 그러시죠?”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는 당신을….”
“파면할 생각인가요? 그렇다면 전 부당함을 고발할 생각입니다. 정도맹에요.”
“뭣이…?”
천세명이 충격 받은 표정으로 뺨을 씰룩였다.
매설란이 내심 조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그저 알량한 자존심 싸움이었을 뿐이었잖아? 그런 질 낮은 싸움에 나까지 끌어들이려고 했다니!’
기분이 나빠서라도 이대로 고분고분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사비강은….
‘… 매력적인 남자지.’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그녀는 다소 당황하면서도 싫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한편, 그런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던 천세명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조소를 지었다.
“호오… 그런 거였소?”
“무슨 말씀이신지?”
“연무기행은 남녀가 연정을 품기 좋으니, 임무를 수행하기에 딱 좋다고 그러셨지. 한데 이제 보니… 정말로 연정을 품게 되었나보구려.”
“……!”
“허어, 그것 참, 뜻밖이오. 섭혼천녀가 오히려 남자에게 빠지다니. 후후.”
천세명의 눈길이 음흉한 빛으로 물들면서 매설란의 몸을 아래위로 훑었다.
마치 기루에서 기녀들을 훑을 때와 같은 눈빛이었다.
매설란이 싸늘한 표정으로 맞섰다.
“천 부장께서는 말씀을 조심하세요.”
“아아,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오. 그대가 연정을 품을 거라고는….”
천세명이 말을 더 잇지는 않았다.
매설란의 전신에서 은은한 살기가 뻗어 나오는 것을 느꼈기에.
천세명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감히 내게…!’
매설란이 몸을 돌렸다.
“그럼, 이만 가보죠.”
“괜찮겠소?”
“뭐가 말이죠?”
“이대로면 춘향제에서 특목반은 집단 따돌림을 받을 가능성이 높소. 이미 교관들과 생도들 사이에서는 특목반을 낙오자들의 모임 정도로 의식하고 있소. 정말 계속 그런 반에 머물 생각이오?”
매설란이 피식 웃었다.
“낙오자… 혹시 모르죠. 낙오자들을 부러워하게 될 지도.”
“도대체 그 무슨….”
“한 가지 충고해 드리죠.”
“충고?”
“사비강 교관님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는 당신들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에요. 제가 보증하죠.”
말을 마친 매설란이 살랑살랑 걸음을 옮겨 실내를 빠져나갔다.
쾅!
천세명의 주먹이 탁자를 내리쳤다.
그가 귀신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놈이고, 이년이고 전부 왜 저지랄들이야!”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침착하자. 서두를 건 없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춘향제에서 확실히 밟아 버리면 된다.
그럼 사비강은 책임을 지게 될 것이고, 특목반은 해체되리라.
그리고 용천관은 다시 예전의 그 평화로운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두고 보자고.”
천세명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