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귀환 마교관
32화
사비강은 건물 지붕을 타고 빠르게 달렸다.
마을 복판에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화마를 곁눈질로 힐끔 보았다.
데블 파이어(Devil fire).
마계에서 온 물건이다.
마나 혹은 내공을 실어 충격을 가하면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킨다.
사람 정도는 순식간에 연소시켜 버리므로 그 시체를 찾기도 힘들다.
마나를 화염 속성으로 변환시킨 다음, 특정한 약물과 함께 투명한 마공석에 농축시킨 것.
데블 파이어에 실리는 힘에 따라 그 파괴력은 달라진다.
안강의 동혈에 배치되어 있던 데블 파이어는 모두 스무 개.
그 외에도 아칸 포션과 헬라의 눈물이 포함되어 있다.
‘전부 받아내 주지!’
빠르게 내달리는 사비강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가 저만치 앞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경공과 트라이스 마법을 섞어 가며 사용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 그를 보았더라면 이 괴이한 이동 방법에 넋을 놓았으리라.
하지만 지금 건물 지붕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마을 한쪽에서 치솟은 불기둥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
“크하하하하!”
어느 건물 지붕 위에 우뚝 서 있던 단구기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저만치 치솟은 불기둥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이로써 승도진가도 이 세상에서 지워졌다.
“이제 금정문만 남았군.”
이쯤 되면 금정문에서도 느낀 바가 있으리라.
결코 이 사건들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필시 경계를 강화하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것이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
폭렬단만 있다면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한방에 날려 버릴 수 있다.
그가 막 몸을 돌리려는데.
“음…?”
단구기는 저만치 건물 지붕 위를 응시하며 눈을 끔뻑였다.
그는 순간 헛것을 보는 줄만 알았다.
한데 아니다.
분명 뭔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뭐지?’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뭐, 저런 경신법이 다 있지?’
상대는 분명 자신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오고 있었다.
아니, 중간 중간 사라졌다가 훅 가까워지니 그 표현은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
귀신처럼 접근하고 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이 시점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무인.
아무리 생각해도 호의를 가졌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제거할 수밖에.’
단구기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며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그나저나 볼수록 괴이한 경신법이로고.’
마침내 그가 시위를 놓았다.
패앵!
기를 머금은 화살이 밤공기를 가르며 빛살처럼 날아갔다.
쒜에에엑!
찰나.
땅!
상대가 검을 뽑아 들고 휘두르자, 화살이 그대로 튕겨 나가면서 옆 건물 지붕에 꽂혔다.
‘빠른 반응!’
위협을 느낀 단구기가 재빨리 품에서 폭렬단을 꺼내 들고 특별히 제작한 화살대에 끼웠다.
그리고 시위를 당긴 후.
“멈추시오!”
그제야 상대가 흠칫거리고는 멈췄다.
건물 세 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본 두 사람.
단구기가 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채 물었다.
“어디서 오신 고인이시오?”
“용천관 교관, 사비강이다.”
“용천관…?”
단구기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용천관 생도들이 이곳에 나타난 게 좀 뜻밖이긴 했지만, 이렇게 곧바로 걸림돌이 될 줄이야.
‘사비강이라… 처음 듣는 이름인데 대단한 실력이군.’
하지만 나이도 젊어 보이는데 다짜고짜 반말을 꺼내는 것이 썩 좋아보이진 않는다.
단구기가 여전히 시위를 당긴 채 말을 이어갔다.
“공격적으로 접근하시기에 질문을 드렸소. 나는….”
“알고 있어. 혈수궁, 단구기.”
“호오, 못난 이름을 알아주시다니 영광이구려.”
“후후. 잊을 수가 없지.”
사비강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 속뜻을 알 수는 없었지만 단구기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한데 사 교관께서는 무슨 용무로 내게 오시는 거요?”
“너에게 받아갈 것이 있어서.”
“받아갈 것? 그게 뭐요? 그리고 아까부터 꼬박꼬박 무례한 말투를….”
“학살자에게 존대라도 바라는 거냐?”
“학살자라?”
“틀렸나? 네가 날린 그 화살로 벌써 두 가문이 멸망하지 않았나?”
단구기가 움찔 떨었다.
‘역시 내가 쏘는 걸 봤다는 건가?’
그 순간, 사비강이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단구기가 버럭 소리쳤다.
“멈추시오! 더 이상 접근한다면 당신에게도 활을 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소.”
사비강이 가만히 그를 노려보았다.
“그걸 쏘면 적어도 반경 삼십 여장이 초토화 될 텐데. 무고한 사람들 수십 명을 날려 버리시겠다?”
‘뭐야? 폭렬단의 위력을 자세히 알고 있잖아!’
단구기의 놀란 표정을 지켜본 사비강이 팔짱을 꼈다.
“네가 쏘려는 그것. 붉은 돌.”
“이 돌에 대해… 알고 있소?”
“데블 파이어라는 거지.”
“대부파… 뭐?”
“뭐, 발음은 그냥 넘어가고. 아무튼 네가 ‘폭렬단’이라고 부르는 그걸 내게 넘겨줘야겠어. 그건 네가 학살이나 저지르라고 거기 떨어져 있던 게 아니거든.”
“웃기는 소리! 느닷없이 나타나서…. 가만, 내가 이걸 ‘폭렬단’이라고 부른다는 건 어찌 알았소?”
“말하자면 사연이 길다. 어쨌든 그 물건들 전부 내게 넘겨. 보아하니 아칸 포션은 이미 꽤 복용한 것 같은데, 아직 남은 게 있겠지?”
“무, 무슨 소리를…?”
“아아, 모른 척하지 마. 아칸 포션은 원래 체내의 마나를 영구 상승시키는 포션이지. 일반 마나 포션 보다도 훨씬 귀한 거라고.”
‘이자… 지금 뭐라는 거야?’
“뭐, 일반 무인들이 복용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마련이겠지만, 넌 운 좋게도 독문심법의 도움을 받은 셈이지.”
사실이었다.
그의 독문심법인 소하진기는 이름 그대로 내공을 자연스러운 흐름에 역행하듯 운기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데 그 방식이 마나를 다루는 것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마나의 상승 대신 내공의 상승으로 이어진 것.
그러나 이 역시 정통한 방법은 아니다.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양을 복용하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단구기가 사비강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리 없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마시오.”
“그러니까 네가 주운 걸 내놔. 그럼 그동안 저지른 짓도 모른 척해 줄 테니.”
“좋소. 단, 지금은 돌려줄 수 없소. 이틀 후, 당신을 찾아가서 주겠소.”
사비강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기어이 금정문도 지워 버리겠다?”
“다, 당신…! 그걸 어떻게…?”
“하나만 묻지. 오래전부터 궁금했거든.”
“뭐, 뭐요?”
“세 문파를 멸문시킨 이유가 뭐지?”
단구기가 다소 멍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이자는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그보다 오래전부터 궁금했다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마치 자신이 앞으로 저지를 일을 과거의 일처럼 묻지 않는가?
정말이지 꿈이라도 꾸는 기분.
그때였다.
팟!
사비강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더니 건물 하나를 건너뛰어서 나타난 게 아닌가?
“헛!”
깜짝 놀란 단구기가 뒤로 훌쩍 물러나면서 시위를 놓았다.
패앵!
쒜에에엑!
이번에는 사비강도 놀라서 움찔거렸다.
진짜로 저걸 쏠 줄이야.
“이런 미친…!”
사비강이 얼른 손을 뻗으며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홀드!”
그 순간 날아들던 화살이 코앞에서 멈칫거렸다.
찰나, 사비강이 몸을 회전시키며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화살을 낚아챘다.
휘리리릭, 탁!
단구기가 눈을 찢을 듯 부릅떴다.
‘나, 낚아채? 내 화살을?’
적어도 상대는 절정을 뛰어넘은 고수이리라.
그런 자가 용천관 교관이라니.
게다가 처음 듣는 이름이지 않나?
‘가만, 그보다 조금 전… 화살이 잠깐 멈추지 않았던가?’
단구기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야 없지 않나?
어찌 날아가던 화살이 허공에서 멈춘단 말인가?
단구기는 생각을 거두고는 바닥을 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일단은 이 자리를 떠는 게 급선무다.
원래는 내일 금정문을 없애 버릴 계획이었다.
한데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 없애야만 한다.
저런 자가 방해를 해온다면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기에.
한편, 화살을 낚아챈 사비강은 데블 파이어를 조심스럽게 빼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조심성이라곤 전혀 없는 녀석이잖아!”
하마터면 마을 복판에서 불기둥이 또 솟아오를 뻔했다.
홀드 마법의 지속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특히 화살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일수록 유지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강기를 머금은 화살이라면 홀드가 아예 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 홀드가 먹혀들지 않았다면 적어도 근방의 수십 명이 하룻밤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리라.
사비강은 저 멀리 달려가는 단구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작정 쫓아서는 곤란하겠군.’
자칫 흥분해서 여기저기 데블 파이어를 쏴대면 골치 아파진다.
‘아까운 데블 파이어를 그렇게 낭비하게 할 순 없지.’
생각을 마친 그가 조용히 뇌까렸다.
“인비저빌러티(Invisibility).”
스르르륵.
다음 순간, 그의 몸이 어둠 속에 천천히 묻혀 갔다.
**
털썩.
금정문의 문주 철도정(鐵圖正)은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그의 호신위 네 명이 얼른 다가와 부축해 주었다.
그가 멍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 그게 정말이냐?”
“예, 문주님. 틀림없이 승도진가라고 합니다.”
“승도진가가… 멸문을 당해….”
“현재 흑암대(黑巖隊)와 금룡단(金龍團)이 현장에 급파되었습니다.”
“승도진가가….”
철도정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지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의 눈동자가 격하게 떨렸다.
잠시 후 안마당으로 소문주인 철진기(鐵珍奇)가 달려 들어왔다.
“아버지! 들으셨습니까?”
“조금 전에 보고 받았다.”
“승도진가입니다! 승도진가!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분명 그 녀석 짓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다음에는 우리입니다! 분명 그 단구기 녀석이 우리마저 없애 버릴….”
“닥쳐라!”
“아버지…?”
“네놈은 죄의식도 없단 말이냐!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이 누구 때문이더냐?”
“하지만 저 혼자 그런 것도 아니고….”
“오냐. 너와 함께 사고를 친 녀석들은 전부 죽어 버렸으니, 이제 너도 죽으면 되겠구나!”
“아버지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버지도 한때는….”
“시끄럽다! 그만 물러가라. 꼴도 보기 싫으니.”
철도정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철진기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몸을 휙 돌리는데.
“문주님! 단 대협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뭣이?”
철도정이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마침 나가려던 철진기가 시종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단 대협이라니? 혹시 혈수궁 단구기를 말하는 것이냐?”
“그, 그렇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
“대문 밖에서….”
그때.
쒜에엑!
푹!
“컥!”
시종의 가슴으로 화살이 튀어나오더니 그가 푹 고꾸라졌다.
철도정의 호신위 네 명이 황급히 검을 뽑아 드는데.
쒝! 쒜엑! 쒜에엑! 쒜엑!
푸푸푸푹!
동시에 네 자루의 화살이 빛살을 머금고 날아들더니 호신위들의 급소에 모두 틀어박히는 것이 아닌가?
놀랄 틈도 없이 귀에 익은 목소리가 중문에서 들려왔다.
“마중 나올 필요 없네.”
철도정과 철진기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미 단구기가 안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색이 된 철진기가 부들부들 떨었다.
“도대체 경계를 어찌 서기에 외부인이 여기까지….”
“물론 내가 처리했다.”
단구기의 말에 철진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처, 처리하다니…?”
“죽였다.”
“……!”
단구기가 철도정을 보았다.
“오랜 친구여. 내가 원하는 것은 사실 단 한 사람의 목숨이면 돼.”
“그건… 안 되네.”
철도정은 이미 그 뜻을 짐작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구기는 화살을 들어 철진기를 가리켰다.
“알잖은가? 자네 아들. 저 녀석만 죽이게 해준다면 아직 여기에 살아 있는 무고한 사람들 누구도 다치지 않을 걸세.”
이윽고 철진기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한편 이 광경을 어둠 속에서 몰래 지켜보는 자가 있었으니….
‘호오. 이것들 봐라?’
사비강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