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33화 (33/670)

# 33

귀환 마교관

33화

살얼음판을 걷는 듯 냉랭한 분위기.

세 사람이 뿜어내는 예기가 숨 막힐 듯 팽팽했다.

철도정이 미간을 좁히고는 물었다.

“꼭 이래야만 하겠나?”

“그래야만 하네.”

단구기가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몸에서는 어마어마한 살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아까부터 그 살기는 오로지 철진기에게만 향했다.

그때 또 다른 사람이 안마당에 뛰어 들어왔다.

“철 문주! 이게 대체 무슨…?”

창천문주, 호요범(胡堯范)은 막 마당으로 들어서다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말을 삼켰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단구기? 여기에 왜 자네가? 그보다 이 상황은 어떻게 된….’

궁금한 게 많았지만 워낙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그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이윽고 단구기가 입을 열었다.

“이보게, 요범.”

“음? 말하시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그제야 호요범이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우리의 은원을 정리하고자 함이네.”

“은원이라니…?”

“나와 도정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자네는 끼어들지 마시게. 이왕이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좋고.”

“대체 그게 무슨….”

호요범의 말을 무시하고는 단구기가 철도정을 보았다.

“다시 말하지. 자네 아들을 죽이도록 해주게나.”

“자네! 정말 이렇게 나올 건가!”

결국 철도정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단구기는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철도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바위처럼 무거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내 딸이 죽었네.”

“그, 그건….”

철도정이 뭐라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단구기를 건드렸다가는 그야말로 자폭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게다가 이 자리에 있는 호요범의 눈치도 보였다.

단구기가 몸살이라도 난 사람처럼 온몸을 가늘게 떨었다.

“자네는 기억하는가? 내가 딸을 찾기 위해 지난 몇 년간 강호를 배회한 것을.”

“이보시게….”

“나도 멍청했지. 하나밖에 없는 딸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도 모르고, 어디에 있었는지도 몰랐으니.”

화살대를 쥔 단구기의 주먹에 기가 실렸다.

눈을 감았다.

딸을 찾아 강호를 배회하다가 안강으로 돌아왔을 때, 안강백가의 시종 하나가 찾아와 기가 막힌 소리를 했다.

바로 안강백가와 승도진가 그리고 금정문의 자제들이 딸을 겁간하고 죽여 버렸다는 것.

“그 시종이 말하더군. 아비인 자네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뿐만 아니라 자네들이 적극 나서서 내 딸의 시체를 불태웠다고. 우연한 기회에 그 시종이 그걸 목격해 버렸다고.”

단구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쯤 되자 철도정도 눈을 지그시 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 속에서 그날의 일이 되살아났다.

아들 철진기가 찾아와 모든 일을 고해바쳤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혈수궁 단구기가 누구인가?

그의 실력이라면 어디서든 중소 문파 하나쯤은 거뜬히 세울 인물이다.

다만 하나 뿐인 딸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게 좋다며 세속의 욕망을 모두 접어 두고 유유자적 살아가던 자가 아니던가?

그에게 있어서 딸은 삶의 전부였다.

그 전부를 이 멍청한 아들놈이 빼앗은 거다.

노발대발 소리쳤다.

“나는 모르겠다! 네놈이 어딜 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뒈져버리든지 말든지! 너 같은 새끼는 내 새끼가 아니다!”

아들을 지켜 줄 명분도, 단구기의 분노를 달래 줄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던가?

울고불고 매달리며 사정하는 아들을 끝내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이에 세 문파의 수장들이 모였다.

그들은 바보 같은 아들 녀석들이 저지른 죄악을 덮어 주기로 뜻을 모았다.

숨겨 두었던 시체를 가져와 불에 태워 화장을 시켰다.

그 후로 단구기는 딸을 찾아 하염없이 강호를 떠돌아다녔지만, 그들 중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가문과 문파를 건사하기 위해서라면.

그 일은 영원한 비밀이 되었어야 했다.

한데….

‘시종 새끼 하나가….’

모든 걸 망쳤다.

철도정이 천천히 눈을 떴다.

단구기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고, 호요범은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철진기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발만 동동 굴렸다.

‘한심한…!’

단구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날 찾아온 그 시종을 일장에 때려죽였지. 모든 사실을 알고도 그때서야 말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날 미치게 만들었네.”

“이봐, 구기… 이런다고 딸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지 않나?”

단구기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격정적으로 타오르는 울분을 억누르는 듯 보였다.

그러는 사이 철진기는 은밀하게 걸음을 옮겼다.

‘웃기지 마! 이대로 죽어 줄 생각 없다고!’

마침내 그가 단구기의 등 뒤로 돌아갔을 때.

‘병신. 감상에 젖어서 눈을 감고 등까지 보이다니.’

찰나, 그가 바닥을 찼다.

“죽어! 이 미친 도살자 새끼야!”

철진기가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검을 휘둘러 갔다.

철도정이 눈을 부릅떴다.

‘저 미친놈이!’

자식이란 게 부모 뜻대로 안 되는 법이라지만, 어찌 저리 무모하단 말인가?

철도정이 막 바닥을 차는 순간.

쒜에엑!

단구기의 손에 들린 화살이 그대로 철진기의 왼쪽 눈에 틀어박혔다.

콰악!

“크아아아악!”

철진기가 몸을 뒤집으며 비명을 내질러댔다.

“진기야! 구기, 이노오옴!”

비분강개한 철도정이 곧바로 발검과 동시에 단구기를 베어들어 갔다.

단구기가 얼른 바닥을 차며 활을 휘둘러 막아냈다.

까앙!

불꽃이 터지면서 금속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졸지에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버린 호요범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못했다.

철도정이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감히 내 아들을!”

“후후. 저런 개망나니도 아들이라고 감싸는구나.”

“내 아들은 건드릴 수 없다! 절대로! 기야, 괜찮으냐?”

철도정이 얼른 철진기에게 달려갔다.

“끄으윽. 아버지. 아버지! 흐으윽!”

철진기가 피를 철철 흘리며 울부짖었다.

그를 살피던 철도정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고 휙 돌아섰다.

어느새 단구기가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노옴! 그만 두지 못할까!”

“도정. 자네는 내게 소리칠 자격이 없네. 자네는 그저 엎드려 빌어야 할 뿐.”

철도정은 개소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감정을 내세우기보단 이성을 앞세워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들어 단구기의 목을 따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들을 지키는 것이 먼저다.

‘아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아들을…!’

그가 참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엎, 엎드려 빈다면… 내 아들을 살려주겠나?”

“훗. 그럴 리가.”

패앵!

철도정이 눈을 부릅떴다.

쒜엑! 쒜엑! 쒜에엑!

세 대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따다당!

그가 재빨리 검을 휘둘러 화살들을 쳐냈다.

하지만 곧이어 또 다시 세 대의 화살이 쏟아졌다.

“크이익!”

‘정녕 내가 알던 그 단구기인가?’

확실히 더 강해졌다.

물론, 이는 단구기가 아칸 포션을 복용한 덕이었지만, 그런 사정을 철도정이 알 리 없었다.

철도정이 이를 악물고 마구 쏟아지는 화살을 쳐냈다.

따다당! 따당!

하지만 강기까지 머금은 화살을 전부 막아내기엔 무리였다.

푸욱!

“커헉!”

결국 화살 한 대가 그를 지나쳐 철진기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기야!”

철도정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그러는 사이.

푸푸푹!

또 다시 세 대의 화살이 철진기의 가슴에 꽂혔다.

철진기가 부들부들 떨며 철도정을 보았다.

“아버…지. 쿨럭!”

“오냐, 기야! 아비가 있으니 걱정 마라!”

“아버지… 크흑, 아버….”

한 차례 경련을 일으키던 철진기가 이내 축 늘어지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기야아아!”

철도정이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단구기는 품에서 데블 파이어를 꺼냈다.

붉은 기운이 너울거리는 돌.

그가 호요범을 돌아보았다.

“요범. 자네는 최대한 멀리 피하시게. 아마 마을 절반이 통째로 날아가 버릴 걸세.”

“구, 구기. 자네 지금 뭘 하려는 건가?”

“이쯤 되면 알잖은가? 멸문시킬 생각이네.”

“하지만….”

단구기의 딸에 대한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처음 알게 된 호요범은 뭐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한편, 조금 전 아들의 죽음을 지켜본 철도정은 눈이 뒤집혔다.

“이노옴! 단구기! 네놈이 기어이 내 아들을 죽였구나!”

“보이나? 이것이 내가 발견한 폭렬단이네. 나는 이것의 위력을 처음 확인했을 때 깨달았지. 이건 불에 타 스러져간 딸이 내게 준 선물이라는 것을. 너희들을 똑같이 화형시켜 달라는 딸의 유언이라는 것을.”

“그러면서 잘도 내 아들의 목숨부터 요구해 왔구나!”

“쿠쿠쿠. 보고 싶었지. 앞서 두 문파에게는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거든.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자네에게는 확인해 보고 싶었네.”

“무슨 개소리냐!”

“자식을 잃은 나와 똑같은 입장이 되었을 때, 과연 그대들은 무어라 할 것인지. 그걸 확인하고 싶었네.”

“이 육시럴, 미친 새끼야!”

“이제 다 봤으니 미련은 없네.”

철도정이 검을 휘두르며 질풍처럼 날아갔다.

동시에 단구기가 손에 기를 집중했다.

자폭할 심산이었다.

아직 호요범이 자리를 뜨지 않았지만 상관없다.

남을 배려할 만큼의 여유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그가 막 데블 파이어를 바닥으로 던지려는데.

쉬이이잇!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 닥쳤다.

곧이어.

쉭, 팡!

퍼퍽!

느닷없이 한 남자가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나더니, 손으로는 단구기의 가슴을 밀쳐내고, 발로는 철도정의 배를 걷어차는 것이 아닌가?

“컥!”

“크악!”

두 사람이 동시에 비명을 터뜨리며 튕겨 나갔다.

단구기가 들고 있던 데블 파이어는 어느새 남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사비강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인물에 호요범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자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지? 이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군….’

한편, 사비강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읊조렸다.

“이제야 궁금했던 게 다 풀린 셈이군.”

그러더니 단구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이, 약속이 다르잖아?”

“무슨 소리요!”

단구기가 입가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소리쳤다.

“여기서 이걸 터뜨려 버리면 내가 받아야 할 것들을 받지 못해.”

“상관없소! 나는 이 세상에 미련이 없으니!”

“그건 당신 생각이고. 난 상관이 있다니까.”

그때 철도정이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이익! 네놈은 또 누구냐!”

“용천관 교관, 사비강이다.”

“용천관…? 용천관 교관이 왜…?”

“내 물건을 받으러 왔다.”

“개소리 말고 방해하지 마라!”

아들의 복수에 눈이 먼 철도정이 이번에는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며 사비강에게 달려들었다.

찰나, 사비강의 몸이 사라지더니 그의 등 뒤에 귀신처럼 나타났다.

“어느 틈에…!”

철도정이 황급히 돌아서는데.

빠악!

사비강의 주먹이 그대로 안면에 직격했다.

“커억!”

쿠당탕탕!

튕겨 나간 철도정이 탁자를 부수며 나뒹굴었다.

그러는 사이 단구기는 다시 품에서 또 다른 데블 파이어를 꺼내들었다.

‘이번에야말로 끝이다!’

그가 손에 기를 집중시켰다.

이 하나가 터진다면 자신이 지닌 모든 데블 파이어가 폭발하고 말리라.

그 위력이라면….

아마도 이 마을 절반이 날아가 버릴 것이다.

환하게 웃는 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그만… 만나러 가마.’

그 순간.

쒜에에엑!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베르타스가 눈 깜빡할 사이에 단구기의 가슴을 꿰뚫었다.

푸욱!

“꺼억!”

석상처럼 굳어 버린 단구기가 피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사 교관…! 어째서 저놈을 구하는…!”

“무슨 헛소리야? 난 그저 내가 죽기 싫을 뿐이라고. 게다가 아까부터 말했잖아. 받을 건 받아야 한다고.”

사비강이 냉랭하게 말을 뱉고는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단구기의 가슴에서 칼을 뽑아냈다.

쑤욱!

츄아아아!

결국 단구기는 피를 분수처럼 쏟아내며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철도정이 실성한 자처럼 웃어젖혔다.

“크하하하! 놈! 꼴좋구나! 꼴좋아! 이 개 같은 놈! 잘 뒈졌다! 잘 뒈졌어! 네놈은 진작 그렇게 뒈졌어야…!”

눈물을 흘리며 웃어대는 철도정의 머리 위에 시커먼 기운이 조그맣게 뭉쳤다.

“…음?”

다음 순간.

“파이어 버스트.”

사비강이 나직이 뇌까리자.

퍽!

검은 기운이 폭발을 일으키며 철도정의 머리를 단숨에 날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비강이 손을 거두며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뭘 잘했다고 시끄럽게… 쯧.”

0